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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38화 (38/155)

38화. 선물에 의미를 부여하지 맙시다, 제발 (2)

“저곳은 신전입니다, 전하.”

벤자민의 눈동자가 긴장한 고양이처럼 한껏 조여들었다.

‘설마.’

그러나 끊긴 흔적과 주변에 의심되는 곳이라고는 저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건물이 신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당장은 저 안으로 쳐들어가 뒤질 수도 없는 일이니. 하지만 만약 어머니의 조력자가 신전이라면.

‘일이 복잡해지겠군.’

벤자민이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았을 때였다.

갑자기 신전에서 마구 몰려나온 인파가 그들을 덮쳤다.

“윽!”

평소 검술에 재능이 없어 훈련 쪽으로 매진하지 않았던 벤자민은 볼품없이 인파에 휘청거렸다. 눈앞이 빙글 돌고 위아래가 바뀌었다.

그리고 철퍼덕, 걸음마를 딛는 아이처럼 거세게 넘어졌다.

“…….”

순간 어이가 없었다.

까칠한 바닥에 손이 까졌는지 따끔한 감각이 선명했다. 멀리서 전하, 그렇게 외치는 기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 내가, 지금.’

제 상태를 인지하자마자 날카로운 헛웃음이 나왔다. 길바닥에 주저앉은 황태자라니.

‘감히.’

노여움이 불꽃처럼 번졌다.

자신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어머니밖에 없었다.

그런데 감히, 어떤 하찮은 것이 자신을 다치게 했단 말인가?

신전이든, 평민이든 용서하지 않으리라.

유순하고 순한 황태자 벤자민. 그의 상냥함은 사람에 따라 바뀌는 편협한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괜찮으신가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땀에 젖은 고개를 들어 올리니, 흰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보였다.

그리고 이 혼란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고요하고 차분한 어떤 얼굴도.

‘…….’

참 이상한 일이었다.

벤자민은 황태자로 태어나 수많은 아름다운 이들을 눈에 담았다 자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의 심미안을 심각할 정도로 높여주었으며, 그 때문에 벤자민은 순해 빠진 제 얼굴을 좋아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순한 듯 사람을 대했지만 사실 벽을 세우고 제 심미안에 찬 아름다운 사람이 아닌 이상 곁에 두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랬었는데.

‘이 여자는, 뭐지?’

벤자민은 그 여인을 보자마자 꼭 누군가가 후려치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충격에 빠졌다.

단단하게 빗장을 걸어 잠그던 무언가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 이상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물론 그렇긴 하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한 인물이 바로 지척에서 매일 벤자민에게 속삭였다.

바로 그의 어머니, 황후 데자이아였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눈을 뗄 수가 없어.’

벤자민은 단시간에 깨달았다. 그녀의 손을 어벙하게 잡고 일어나는 그 순간, 자신이 넋을 빼놓았던 이유가 그녀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귀족이시군요. 가문의 문양을 보니, 동쪽 영토의 라반 영지의 헤사드 남작가인 듯한데 맞으실까요.”

여인은 박식하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벤자민이 밖을 돌아다닐 때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었기에, 귀족 가문이되 그곳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만큼 한미한 가문을 고르곤 했다.

스스로도 잘 외우지 않고 넘어가는 그 신분을 여인은 가문의 문양을 보는 것으로 파악했다. 제국의 주요 가문들을 모두 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체 누구지?

평소의 성격답게 경계심이 바짝 발톱을 세웠으나, 입에서 튀어나가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벤자민은 스스로의 상태에 기가 막혔다. 목소리는 또 왜 저렇게 얼빠진 멍청이 같은 걸까.

누가 보면 당장 넘어져 눈물이라도 쏟은 소년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상대 여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심란한 기색으로 발갛게 까진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 이것을 왜.”

그건 가문의 문양이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벤자민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저 문양은.

‘힐링턴?’

아까와는 다른 충격이 그를 강타했다.

힐링턴. 요즘 제일 어머니께 많이 듣는 가문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가문에 있는 쌍둥이 자매.

그가 묻기도 전에 상대가 손수건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힐링턴의 힐데아라고 해요. 피를 닦으세요. 손수건은 돌려주실 필요 없어요, 영식.”

명백히 그녀보다 어린 동생을 대하는 태도여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걸 보고 수줍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힐데아는 배려심 넘치게도 못 본 척 고개를 돌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힐데아가 자신의 가문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하지만 영식, 다음부터는 이렇게 쉽게 들킬 말은 쓰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주시는 것도 나을 듯하군요.”

“……예?”

조용조용히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꽤 냉엄한 기색이 있었다.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며, 이곳으로 다가오려던 기사들을 향해 손짓으로 멈추라 명령했다.

“무, 슨 말씀이신지 여쭈어도 되나요, 영애?”

이 대화를 바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왜 저런 냉정한 눈을 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자신이 진짜 그 남작가문의 영식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또렷한 붉은 눈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무례한 눈길은 아니었다.

“편지에 팔이 부러지셨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멀쩡하시군요.”

이런, 낭패였다.

아마도 원래 이 신분의 남작 영식이 눈앞의 여자와 편지까지 주고받는 사이…….

‘왜 이러지?’

기이했다.

이 여인이 남작 영식과 편지를 주고받는다 생각하니, 당장 그 놈을 끌고 와 정말 팔을 부러뜨려버리고 싶은 기분에 휩싸인 것이다.

지금 한 번 본 여인일 뿐인데.

‘이상해.’

벤자민은 입안의 살을 깨물었다.

여기서 황태자라는 것을 들켜도 곤란하고, 대화를 깊게 나누어도 곤란한데 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다급한 기사들의 눈빛을 보면서 그는 손수건을 꽉 쥐었다. 무슨 향수를 뿌린 것인지 좋은 향기가 났다.

“그런데 괜찮으신가요?”

“무엇을요?”

딱하고 불쌍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에 평소라면 울컥 화를 냈을 터인데도, 이상하게 더 시선을 받고 싶었다.

벤자민은 일부러 더 눈에 힘을 빼며 유순한 표정을 해보려 했다.

이상했다. 어머니 외에 누군가에게 순종적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싶은 기분이라니.

일국의 황태자인 자신이.

그것도 그 빌어먹을 벨키우스 공작의 약혼녀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소매치기를 당하신 것 같습니다만.”

“……어?”

벤자민은 이번에 정말 깜짝 놀랐다. 허리춤을 더듬거렸는데, 대체 언제 털린 것인지 텅 비어 있었다.

중요한 물품은 들어 있지 않았으나, 어이가 없었다. 수도의 치안이 이렇게 허술했었나?

“저, 정말 없네요.”

“중요한 물건이 있으셨나요?”

“어,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귀족들이 주로 다니는 광장이라 하더라도 안전하진 않아요. 오히려 이런 곳이 혼잡하여 위험합니다. 가문의 마차가 주변에 있다면 모셔다드릴까요.”

“아, 아.”

이제야 그는 힐데아의 뒤편에 서 있는 시녀와 호위기사, 그리고 마차를 알아보았다.

“괜, 괜찮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더 얽히면 곤란하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영애의 호의에는 정말,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이가 있어서 괜찮을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제가 보낸 편지, 그건 정말 죄송해요.”

연신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을 보고 황태자를 떠올리진 못했으리라.

이때만큼 흔해빠진 제 머리카락과 눈이 고마울 때가 없었다.

뭐라 하는지도 모를 만큼 어수선하게 남작 영식인 척 들은 대화를 토대로 사과의 말을 지껄였다.

“여, 영애가 싫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때, 벤자민은 천천히 올라가는 여인의 입술을 보았다.

‘아.’

그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

‘웃었어.’

구름 사이에 숨어 있던 해가 비죽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보라색으로, 짙은 주황색으로 물들이는 장엄한 광경을 보았을 때 같다고 해야 할까.

힐데아 폰 힐링턴에 대해서 들어본 것은 많았다.

그 중 어디에서도 그녀의 성격에 대한 칭찬은 없었다.

똑똑하다. 아는 것이 많다. 어린 나이에 답지 않게 가문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이 없다. 차갑다. 친구가 없다. 주변의 모두가 그녀를 어려워 한다…….

‘예뻐.’

하지만 저 미소를 두고 어떻게 그런 소리를 했을 수 있었을까.

저렇게 친절한 사람에게?

“사과해주어 고마워요, 영식.”

“저야, 저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진 미소여서 더 안타까웠다.

탄식하는 벤자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힐데아는 표정을 굳히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살펴 가세요.”

마차 사고와 같았던 그 짧은 만남을 끝으로 힐데아는 미련 하나 없다는 듯 꼿꼿하게 세운 뒷모습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아마 넘어진 그가 앳되 보이는 외양이 아니었다면 다가오지도 않았을 것처럼 냉정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

곳곳에 숨어 있던 기사들이 다가와 괜찮으냐 연신 물었다.

벤자민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하지만 전하, 방금 전의 그 여인은.”

“그래. 힐링턴이더구나.”

가브리엘.

언제나 어머니를 통해, 그리고 증오스러운 아버지를 통해 껄끄럽게 생각해왔던 상대.

그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가 목매는 상대가 바로 힐링턴의 둘째 영애 로제리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 은발의 영애는.

힐데아는.

‘선택받지 못한 거구나.’

축언. 그 증오스러운 축언.

정확한 것은 몰라도 둘 모두 축언을 타고났다고 했다.

그런데도 첫째에 대해서는 온화한 소문이 돈 적이 없었다.

어쩐지 동질감이 감돌았다.

‘나처럼.’

축언을 타고나지 못한 못난 황태자. 그리고 축언을 타고났으나 축복 받지 못한 힐데아.

친해지고 싶었다.

궁금했다. 차갑고 냉정하다는 얼굴도,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던 성품도.

벤자민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이에게는 내가 몇 살로 보인 거지?”

기사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전하가 좀 어려 보이시기는 합니다만…….”

벤자민의 눈이 상냥하게 휘어졌다. 어머니의 냉정한 명령은 힐링턴의 모든 것들을 경계하라 하였지만.

“상냥한걸.”

“전하?”

그는 다시 보고 싶어졌다.

저 영애를.

이번에는, 넘어져 어쩔 줄 모르는 어린 영식과 그녀가 아니라 제국의 하나밖에 없는 황태자와 고귀한 힐링턴의 영애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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