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의 눈은 보라색
“난 왜 하필 이걸 골라서…….”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나는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방으로 올라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로제는 외출 중이었고, 가브리엘 역시 일정이 있어 저녁 식사에는 아빠와 나만 있었다.
물론 우리 둘 사이엔 끔찍한 침묵이 감돌긴 했지만…….
어쨌든 난 고급스럽게 포장된 커프스 버튼을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는 중이다.
“안 줄 순 없어.”
이미 리라에게 전달되어 내가 가브리엘에게 줄 선물을 사 왔다는 얘기는 저택에 퍼졌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으니 주긴 줘야 하는데.
‘축언을 담는다고.’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축언을 담을 수 있는 물건이라면 충분히 귀중할 테니 면이 서니 이대로 주어야 했다.
내가 내 축언을 담아 그에게 줄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데 왜 나는 고민하는 거지? 그냥, 그냥 주면 되잖아.’
내 축언이 불길하다는 소문이 그렇게 파다한데 가브리엘이 좋아할 리도 없고.
선물함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반복하는 것이 벌써 19번째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 나답지 않아.”
알 수 없는 수치심에 귓가가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입안의 살을 깨물며 마지막으로 미련을 버리겠다는 듯이 뚜껑을 닫았다. 탁!
“역시 아니야. 고민해서 뭐 해. 그만하자.”
오늘 당장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내일 당장 나가서 다른 커프스 버튼이라도 사와서 그걸 주자. 그러면 간단해. 응, 좋았어. 완벽해.
만족스럽게 결론을 냈을 때.
“무엇을 말씀이세요, 아가씨?”
“!”
갑자기 들린 소리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왜 그렇게 놀라셔요.”
“리, 리라? 언제 왔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곳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리라가 서있었다.
“노크를 세 번이나 했는데 말씀이 없으셔서 들어와 봤지요. 그런데 아가씨……. 그게 바로 시엔이 말한 물건인가요?”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던 미녀와 시선을 마주치다가, 나는 내가 들고 있는 커프스 버튼이 담긴 선물함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게.”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별, 것 아니야. 정말이야.”
“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걸요.”
그러고 보면 내가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직접 나가서 산 것이 처음이었다.
자유분방하게 다니는 로제와는 달리 난 웬만해서는 외출도 잘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리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리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잖아.
결국 난 질끈 감고 대충 대꾸했다.
“맞아, 가브리엘 주려고 산 물건. 하지만 정말 아무 뜻도 없어. 그러니 내일 사람을 통해 보낼 생각이야. 어, 내가 직접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네, 그건 그렇지요. 그런 일에 움직이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아가씨?”
“응? 왜?”
대화가 끝나간다고 안심했을 때, 리라가 훅 치고 들어왔다.
“왜 내일이지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리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시간이 조금 늦었긴 하지만, 지금 보내도 무례하진 않을 것 같은걸요, 아가씨. 사람은 언제든 부를 수 있고 거리도 멀지 않고요.”
“하, 하지만.”
이게 아닌데?
난 색이 같은 다른 커프스 버튼을 살 생각이었다.
이건 내 서랍장 깊은 곳에 숨겨두고.
숨겨둘 이유를 누군가 묻는다면 왜 그런지 나도 대답할 수 없었지만, 이걸 주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고 나면 어떤 것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 복잡한 속을 리라가 알 리 없었다.
“제게 맡겨 주시면 바로 사람을 시켜 전달하도록 할게요. 어차피 같은 저택 부지 안에 계시니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랍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걱정 마세요, 아가씨. 신속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지시하겠어요.”
그게 아니야…….
손이 떨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내미는 리라에게 그것을 내밀어야 했다.
“자, 잘 부탁해. 리라.”
“네, 아가씨. 최대한 빨리 그분께 전달하도록 하지요.”
축언은 담기지 않은, 하지만 그의 보라색 눈동자를 떠올리게 하는 커프스 버튼을.
*
가브리엘은 초조했다.
마음을 더 직접적으로 전하고 싶었다. 직접 힐데아에게 고백하며 청혼하면 기겁하며 도망갈 것 같았다. 지금도 싫어하는데…….
‘그럼 이 방법은 어때요?’
그 방법을 알려준 것은 로제리엘이었다.
한창 전쟁터에 있을 때, 마음을 전하지 못해 우울해하는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축언을 목걸이에 담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선물하는 것의 의미도.
상대의 눈과 똑같은 색의 보석을 가진 세공품에 간절히 상대를 그리워하며 축언을 담으면 된다.
그것은 곧 청혼과 다름없었다.
상대가 그것을 받는다면…….
상상만 해도 얼굴이 붉게 뜨거워졌다.
‘만약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면? 그러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로제리엘은 픽 웃었다.
‘네, 우리 언니는 이런 것에 관심이 없어서 모를 수 있는데요. 당장 다른 사람들은 똑똑히 알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건 훌륭한 견제가 될걸요?’
‘견제?’
‘그럼요. 쓸데없는 것들이 붙지 않게 할 수 있죠!’
그렇게 해서 전했는데, 역시나 로제의 말대로 힐데아는 보석 자체의 뜻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동요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받아주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랬는데…….
“하아.”
그는 세상 울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힐데아가 오늘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사러 외출했다는 소식이 벌써 저택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것도 남성용 선물을!
‘대체 누구에게 줄 선물을?’
입 무거운 힐링턴 사용인들에게 퍼진 정보였으니 확실한 정보라 했다.
물론 가브리엘이 듣게 된 정보의 출처는 어디에나 끼어서 수다 떨기 좋아하는 부관, 디안이었지만.
바로 그때 상념을 끊어내는 목소리가 툭 치고 들어왔다.
“역시 내 말이 맞았죠?”
가브리엘은 고개를 들었다.
반짝반짝한 부담스러운 눈이 보여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왜 또 왔지, 이 여자는.
“뭐가 말입니까?”
며칠 전 갑자기 들이닥쳐 보석을 또 거하게 뜯어간 약탈자를 향해 눈을 부라리자, 분홍 머리의 로제리엘은 얄밉게도 씩 웃었다.
“목걸이요.”
“…….”
“뭘 모른 척을 하고 있어요? 그냥 주면 언니가 안 받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나한테도 비슷한 목걸이 하나 그냥 던지라고 했고요.”
그랬었지.
그래서 전혀 다른, 아무런 의미도 축언도 담기지 않는 다른 보석이 담긴 목걸이를 로제리엘에게도 선물해야 했었다.
그때 준 가브리엘도, 받은 로제도 얼마나 서로 역겹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보지 못한 사람들은 몰랐을 것이다.
“이해가 안 갑니다.”
“뭐가요?”
“왜 그래야 했는지. 로제리엘, 당신에게도 함께 선물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아닙니까.”
가브리엘은 시무룩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다 알지 않은가.
자신이 힐데아를 앞에 두면 세상에 둘도 없을 얼간이처럼 귀가 빨개진다는 것은.
그래서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가 힐데아에게 푹 빠졌다는 것은 이미 저택 안의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터인데 어째서, 굳이?
순간 가브리엘은 보았다.
차갑게 식은 표정의 로제리엘이 자신을 한심해 죽겠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겁니까? 기분 나쁘게.”
“아오, 진짜!”
가브리엘은 로제리엘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성난 황소처럼 가슴팍을 두드리는 것을 보았다.
그 모양새가 어찌나 파격 넘치고 힘 있어 보이는지, 결코 얌전한 영애처럼 보이지 않는 풍경이었다.
‘손에 검만 쥐여주면 완벽하겠군.’
그런 헛생각에 빠져 있을 때, 로제는 험악한 눈을 뜨며 그를 노려봤다.
어떤 적 앞에서도 굳은 적 없던 가브리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어깨가 움찔거렸다.
“가브리엘, 있잖아요. 언니에 관해서는 생각을 좀 하지 않으면 안 돼요? 내가 이러다가 화병이 생길 것 같거든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너무 조심스럽다고요. 그래서 계속 빙글빙글 돌고, 어후, 그냥 본능에 맡기고 행동을 저지르면 안 돼요? 아직도 언니 앞에서 제대로 숨도 못 쉰다면서요. 어쩌려고 그래, 정말.”
“…….”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본능이라니, 대체 로제리엘의 말투는 왜 저런단 말인가.
“힐데아에겐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 나쁘다고.”
“으으!”
로맨틱한 말이었지만, 로제의 얼굴에는 짜증만 더 진해졌다.
“아, 이 사람이 정말. 밀고 당겨야 되는데 서로 밀고만 있잖아요. 그러다 서로 확 밀어서 둘 다 바다로 떨어지려고 그래요? 아, 돌아버리겠다.”
“?”
“언니가 그렇게 해야 받는 거?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자고요. 그야 언니는 가브리엘보다 날 더 좋아하니까!”
가브리엘의 표정은 상한 음식처럼 순식간에 썩어버렸다.
“진짜 어떻게 나한테도 질투를 해요? 언니가 그쪽 이런 모습 알면 진짜 황당할 텐데. 근엄한 전쟁 영웅, 뭐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대체 언니 앞에서 어떻게 한 거예요? 내숭?”
그 모습을 보며 체증이 내려간다는 듯 깔깔 웃는 로제리엘은 정말 사악해 보였다.
“내숭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둘의 사이는 언제나 이랬다.
화제는 언제나 힐데아였고, 가브리엘은 대가를 제공하고 로제리엘은 그에게 정보를 주거나 자리를 만들거나 조언을 주었다.
근 12년 동안.
가브리엘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쪽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줄곧 품어왔던 의문이었다.
어렸을 때 로제에게도 물었었던 질문.
대체 왜 도와주는 거지?
설마 자신이 싫어서 언니 쪽에게 약혼을 미루려고 그러는 건…….
“난 언제나 언니 행복이 우선이에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이거죠.”
하지만 언제나 로제리엘은 말을 돌렸다. 세상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거 신경 끄고, 전쟁 영웅님이 당장 며칠 뒤 일에나 신경 써야 한다는 거!”
진정 얄미웠다.
한 대 콱 쥐어박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기사단원들이 말하곤 했던 얄미운 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사이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때, 갑자기 로제리엘이 다분히 놀려 먹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길한 기분에 그는 한걸음 뒤로 주춤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