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파트너가 바뀌었습니다
모든 일이 꼬이게 된 것은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
드디어 데뷔탕트의 날.
나는 주변을 뛰다시피 하는 시녀들의 손길을 받아 열심히 치장 중이었다.
‘전쟁터가 따로 없어.’
입어보는 드레스가 몇 벌이나 되는 것은 연회가 이틀이나 치러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또 그동안 황궁에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벌써 질려 있는 내 얼굴만큼이나 시녀들 역시 안색이 창백했다.
물론 로제의 방도 이와 다르지 않은 풍경일 것이다.
어쩌면 그쪽이 더 살벌할지도.
“시엔, 빗 좀 가져와!”
“보석함도 얼른 가져와. 아가씨, 목걸이는 선물 받으신 것으로 착용하실 것이지요?”
“메인 드레스에 맞춰서 벨키우스 공작님이 선물하신 헤어핀을 같이 세트로 맞추고 퍼프 소매에 맞춰 흰색 레이스 장갑을-”
끝없이 쏟아지는 질문들 사이에 이따금 대답하며 몇 시간을 보냈다.
“아가씨, 졸지 마세요.”
“허리 펴셔요. 구두는 이것으로-”
머리카락이 만져지고, 코르셋을 조이고 드레스를 걸치다시피 몸에 얹고, 그 뒤엔 다시 몇 달라붙은 시녀들이 내 얼굴에 예술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음, 역시 눈꼬리는 길게 빼는 것이 좋겠어요. 눈썹은 우아하게 아치형으로.”
“애교점도 그려 넣을까요? 아, 아니에요. 이건 어울리지 않겠네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들은 척척 손발이 맞았다.
내 주변에서 사용인들이 이렇게 활발하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처음 봐서 조금 신기할 정도였다.
“자아……. 완성입니다.”
어느덧, 얼굴의 화장과 마지막으로 향수가 칙칙 뿌려지는 것을 끝으로 시녀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어서 거울로 확인해보셔요, 아가씨. 정말, 정말 너무…….”
뒷말을 채 잇지 못하는 시녀들이 꼭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모양새라 의아하긴 했지만, 난 조심스럽게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거울을 둘러봤다.
‘…….’
긴장한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생의 영향으로 딱딱하기만 한 표정의 내 얼굴이 싫어 잘 보지 않았던 거울 속에는.
‘와.’
걱정한 것과는 달리 무척 화려하게 치장한 어엿한 귀족 영애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난 감탄했다.
‘이렇게 보니까 나도 정말 귀족 영애의 한 사람으로 보이는구나.’
역시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다.
다년간의 훈련으로 인해 빳빳하고 우아하게 선 자세 그대로, 한껏 부푼 치맛자락은 영화 속에 나오는 모습같이 아름다웠다.
‘그럭저럭 욕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제일 눈에 띄는 건 단연코 금색으로 반짝거리며 빛나는 마담 루뮈에의 드레스였지만.
복도로 나오니 먼저 마주친 것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리라였다.
그녀는 내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살피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리라는 이 순간에도 웃어주지는 않는구나. 그래도 내뱉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잘 다녀오세요, 아가씨.”
“응. 다녀올게, 리라. 로제는?”
“벌써 한참 전에 내려가셨어요.”
“이런, 로제 성격에 투덜거리면서 기다리고 있겠네. 얼른 내려가 봐야겠어.”
나는 리라에게 짧게 인사를 한 뒤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나를 반긴 상황은 그렇게 아름답지 못했다.
“어…….”
우아한 가문의 마차 앞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은 분명 아빠여야 했다.
그런데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왜 저 사람이 여기 있어?’
멍한 표정의 가브리엘이었기 때문이다!
“…….”
“…….”
나는 몇 초간 굳었고 어쩌면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머리가 하얗게 굳었다. 설마. 설마?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자동적으로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 상황을 파악했다.
‘로제. 로제. 로제!’
뻔했다. 우리의 말괄량이 로제가 무슨 사고를 친 것이 분명했다.
하필이면 나와 가브리엘을 사이에 두고!
‘로제의 파트너가 가브리엘인데, 지금 그가 여기에 있고 로제가 없다는 것은.’
아, 나는 그대로 머리를 짚고 탄식을 내뱉을 뻔했다.
우리의 로제가 결국 가브리엘을 버리고 아빠 손을 잡고 튄 거야? 그런 거야? 그러면 내 파트너는?
‘대체 왜 이런 짓을.’
가브리엘도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래서 저렇게 아무 말도 없는 것이겠지?
그를 차마 볼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순 없었다.
주변의 사용인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우리를 보며 이상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안, 녕하세요, 가브리엘.”
전혀 안녕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오늘도 참으로 잘생기셨네요.
정말이었다.
작정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가브리엘의 모습은 그야말로 나는 남주입니다, 하고 써 붙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원작대로 황녀가 가브리엘에게 반해서 시끄러워지고, 영애들도 달라붙어 로제에게 시비를 거는 상황이 생기겠다 싶을 만큼.
‘확실히 가브리엘은 지나치게 잘생겼지. 어깨는 또 왜 저렇게 넓어…….’
그때, 가브리엘은 꼭 꿈에서라도 깬 사람처럼 어깨를 흠칫거리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나는 그의 이해 못할 행동에 눈만 깜빡였다. 눈 뜨고 잤나?
“힐, 데아 영애?”
“네.”
“오늘 정말…….”
“예?”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침묵한 채 서 있는 그를 보다 난 헛기침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돼서 저도 너무 당황스럽긴 하지만, 일단은……. 연회장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공작님.”
그는 그제야 우리에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부디, 손을.”
나는 미안함에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가브리엘이 내미는 손을 잡고 천천히 마차 위로 올랐다.
제대로 출발도 하기 전에 몸이 무거웠다.
아무리 사랑하는 내 동생 로제라도 오늘만큼은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 황궁까지 거리는 꽤 되었다.
그리고 친하지 않은 사람과 근거리에 앉아 가는 마차의 공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색하기 마련.
그런데 날 거북해하고, 불편해하는 가브리엘과 졸지에 단둘이 마차를 타게 된 것이 아닌가.
‘로제, 로제, 로제! 너 정말!’
난 로제의 이름만 부르짖으며 드레스 자락이 구겨지지 않게 움켜쥐었다.
내리면 딱밤을 때려줄 거야, 로제리엘!
*
달그락달그락 울리는 말발굽 소리 외엔 로제리엘이 탄 마차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때, 하품하던 로제가 갑자기 귀를 탈탈 털었다.
“으으, 이상하네,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지켜보던 시어스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툭 내뱉었다.
“흥,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겠느냐?”
“어라? 아빠아, 정말 이러실 거예요? 진짜 삐치신 거예요? 언니랑 못 들어가서요?”
“이 아비가 뭐라 하였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로제는 어쩐지 부루퉁한 얼굴의 아빠를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와아, 그게 아닌데요. 삐친 다섯 살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계시잖아요!”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는구나. 딸들에게 이런 서러움이나 당하다니, 내 처지도 기구하군.”
“아빠아!”
모처럼 첫째 딸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할 기회를 냉큼 빼앗겨 분노에 차 있었던 시어스는 곧 한숨을 내쉬며 몸을 늘어뜨렸다.
대체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로제와 가브리엘이 유독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저택의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건만.
‘왜 갑자기 제 언니를 그 녀석의 파트너로 삼겠다는 이야기를 한 건지.’
이 말도 안 되는 사기극을 벌이게 된 것은 모두 며칠 전 갑자기 찾아온 로제리엘의 말 때문이었다.
‘아빠!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아빠는 오늘부터 제 파트너가 될 거예요!’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하는…….’
‘언니는 가브리엘의 파트너가 될 거고요!’
그 말과 함께 줄줄 내뱉은 의견이라는 것은 힐데아를 속이고 그 애가 가브리엘과 함께 연회장에 파트너로 입장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듣자마자 시어스는 얼굴을 구겼다. 그러다 힐에게 미움받으면 어떡하라고?
“으, 치마 엄청 불편해요. 하루종일 이걸 입고 어떻게 돌아다닌담. 으, 안에 안 보이게 좀 찢어버리고 싶은데 안 되겠죠?”
상황에 맞지 않는 말에 아무리 딸을 사랑하는 시어스라도 헛웃음이 나왔다.
찢어? 드레스를?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저게.
시어스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이 자리에 힐데아가 있었어야 했는데.
“로제, 그게 얼만 줄은 아느냐? 아무리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넌 돈의 가치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
“아빠, 오늘 같은 날에 그런 잔소리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후우, 널 대체 어찌할까.”
시어스는 말싸움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막내딸을 바라보다가 아프지 않게 이마를 딱 때렸다.
“앗, 뭐예요, 모처럼 기특한 일을 했는데 왜 때리세요?”
“얄미우니 때렸겠지.”
“이런 취급 하시면 저 서러운데! 막 나갈 수도 있다고요.”
“넌 네 언니가 화를 낼 것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시어스는 시름에 잠긴 표정으로 뒤따라 오고 있을 힐데아가 탄 마차를 상상해보았다.
힐데아는 가뜩이나 평소에도 표정이 별로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화가 나면 살얼음이 낀 듯 냉정하게 가라앉아 그 기세가 웬만한 장군 못지않았다.
솔직히 무서웠다.
“히히.”
그런데 사고를 친 로제는 활짝 웃는 게 아닌가.
시어스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뭘 잘했다고 그리 웃지?”
“그야 언니는 저한테 화를 안 내니까요!”
“…….”
“아빠한테는 모르겠지만요.”
자기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소리인가.
‘가뜩이나 요즘 힐이 계속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건만 이젠 로제까지.’
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낀 시어스는 통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로제는 발랄하게 재잘거렸다.
“하지만 아빠, 그 목걸이를 하고 언니가 아빠랑 들어가면 퍽 곤란해질 거라고요.”
시어스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