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상대의 반응을 신경 쓴다는 것은
하지만 착각이었던 것인지 마차가 덜컹하는 순간 가브리엘의 얼굴은 평소의 딱딱한 표정 그대로였다.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몰라 말씀드려 보았어요.”
평소보다 더 경직된 것을 보니 현재의 상황이 퍽 기분 좋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당혹스러웠다.
가브리엘도 그렇다. 아무리 로제가 좋다고 해도, 이런 억지 같은 일에도 휘말려주다니.
“로제가 장난이 조금 심해요.”
그는 중얼거렸다. 조금?
그 목소리가 어쩐지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 잘못 들은 것일까?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로제, 그 아이는 모든 것을 마냥 좋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박하게 평가하자면 철이 없을 때가 간혹 있지요.”
“네, 간혹.”
“하지만 그것마저 사랑스러우니까요.”
“사랑, 스럽.”
뭐야. 너무 감격해서 말을 내뱉지 못할 정도일까?
그는 갑자기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내가 걱정스럽게 바라봐야 했을 정도로.
“가브리엘, 괜찮으신가요? 물이라도 드려야 할지.”
“아니요, 쿨럭, 괜찮습니다.”
아아, 우리에게도 공통의 화제가 있지 않은가. 바로 로제.
어쩐지 마음이 느슨해졌다.
“그 애가 자매를 너무 사랑하고 아껴서 벌인 일이니, 모쪼록 좋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가브리엘이 느릿하게 말했다.
“두 영애 사이가, 무척, 좋은 것 같아, 부러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왜 저렇게 이를 갈 듯이 말하는 거지?
‘아.’
그러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배려가 부족했구나.’
로제에 관해 이야기하느라 순간 잊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형제자매가 없다는 것을.
정확히는 벨키우스 사변으로 인해 주변에 남아 있는 혈족 자체가 없다는 것을.
‘사변에 대해 들었을 때, 많이 외롭겠다고 생각했었으면서.’
그걸 생각하니 가슴 속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굉장히 불편해졌다. 따끔, 따끔하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힐끗 살피다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 지금 좀 이상하지 않나?’
내가 그의 반응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신경을 쓰는 모습이 꼭…….’
꼭 누군가를 좋아할 때…….
바로 그때였다.
“힐데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깊어지려는 생각의 그물이 뚝 끊겼다.
“도착했나 봅니다.”
그의 말대로 황궁에 도착한 것인지, 어느새 마차가 멈추어 있었다.
*
로제리엘의 행동력은 정말 알아주어야 한다. 안내를 위해 마차로 다가온 황궁 시종의 말은 황당했다.
“로제, 그 아이가 벌써 들어갔다고요?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요?”
힐데아의 지금 저 표정이 바로 황궁 시종에게 로제가 먼저 들어갔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의 제 표정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진 협의한 적이 없었다.
정말 미치겠군, 로제리엘.
“……예, 그렇다고 합니다. 아마 힐링턴 공작과 함께 들어간 것 같습니다.”
힐데아는 당황스럽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로제가 오늘 왜 이러지?”
가브리엘은 그런 힐데아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상황을 다 알면서도 그녀를 속이고 있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이 쓰게 타고 올라왔다.
‘우스워.’
목적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웃으며 상대를 속일 수 있는 자신이었는데 힐데아에게는 그 모든 것이 예외가 되었다.
힐데아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유리창에 비춘 그녀의 얼굴을 탐하듯이 바라보았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럴 때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비록 첫 춤을 같이 출 영광을 누릴 수 있겠느냐 청하기도 전에 거절당하고 말았지만, 힐데아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다.
‘동생을 끔찍하게 생각하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가브리엘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힐데아, 손을.”
마주친 힐데아의 얼굴은 건조할 정도로 적막했다. 하지만 시선을 피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늘 여러모로 죄송해요, 가브리엘.”
“저는…… 괜찮습니다.”
“로제를 보면 따끔히 혼을 내놓을게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쿵, 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 말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차가운 거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의 마음은 다시금 기쁨으로 달아올랐다.
망설이던 그녀의 손이 내뻗은 제 손바닥 위로 차분히 내려앉았기에.
‘천국과 지옥을 수시로 오가는 기분이군.’
가브리엘은 처음 그녀와 함께 마차에 느꼈던 벅찬 고양감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지만 가브리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힐데아는 난감한 표정을 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자신과 파트너 입장을 해도 괜찮냐는 물음이다.
사실 그건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물어야 할 말이었다.
안에는 그의 승전식 연회랍시고 기다리고 있는 인간들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 로제리엘이 이런 수를 쓰자고 했을 때 탐탁지 않았었던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힐데아는 오로지 이쪽을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잘 생각하셔야 해요. 어떻게든 말이 나올지 모르는데…….”
“네.”
너무 빠르게 답해버린 것 같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힐데아, 저는.”
그는 닿은 손이 달아날까 두렵다는 듯, 아프지 않게 힘을 주었다.
“저는, 좋습니다.”
당신이 좋아요. 그러니 내겐 당신의 파트너가 되는 것은 더없이 영광입니다, 힐.
그 말을 삼키며 가브리엘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이끌었다.
활짝 열린 화려한 황궁의 연회장을 향하여.
*
보지 않는 척하면서도 연회장에 있는 이들의 시선은 한쪽으로 몰려 있었다.
바로 힐링턴 공작의 손을 잡고 계단을 걸어 내려온 분홍색 머리카락의 사랑스러운 여인을 향하여.
그녀를 바라보던 귀족들 중, 어떤 영식이 유독 몽롱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저 사랑스러운 영애가 로제리엘 폰 힐링턴입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런데 옆에 있는 건 힐링턴 공작인데. 부친과 함께 들어온 것 같군요.”
“흠흠, 이상하네요. 그러면 안 되는데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사랑하던 아내, 엘리자베스 외엔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던 힐링턴 공작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딸의 손을 잡고 들어온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바로 로제리엘의 목에 걸려 있는 화려한 목걸이.
사람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혹시?
“그런데 저 목걸이. 그 벨키우스에서 직접 주문 제작해갔다는 목걸이가 바로 저것 아닌가요? 엄청나게 화려한걸요. 분명해요.”
“하지만 보석 색깔이…….”
“어마, 붉은색이 아니네요? 쌍둥이 모두 붉은 눈이라던데.”
“……그러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뚝 끊겼다. 로제리엘의 목에 걸린 목걸이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붉은색 목걸이는 누구의 목에 걸렸단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가브리엘 폰 엘른 벨키우스 공작 각하 드십니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전쟁 영웅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울렸다.
간간이 담소를 나누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고.
-……힐데아 폰 힐링턴 공작 영애 드십니다!
그 뒤를 이어 힐데아 폰 힐링턴의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 역시 크게 울렸다.
“지금 힐데아 폰 힐링턴이라고 했나요?”
문이 열리고, 그린 듯이 잘 어울리는 남녀 한 쌍이 나타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저들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한순간 탄식을 내뱉으며 감탄했다.
“어쩜 저렇게 완벽한…….”
꼭 현실이 아닌 옛 동화 속 엘프라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 혼담의 주인공, 벨키우스와 힐링턴.
혼담이 파하길 바라는 이들에게는 애석히도 그들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남녀 한 쌍이었다.
길쭉한 팔다리와 훤칠한 체구를 지닌 백금발의 벨키우스 공작은 근사한 몸매만큼이나 화려한 얼굴을 자랑했고.
힐데아 폰 힐링턴은 제 차가워 보이는 은발처럼 얼굴도 얼음처럼 무표정했으나 눈에 띄는 화려한 미인이었다.
특히, 제 옆에 파트너로 선 남자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히는 상황에서도 표정엔 일말의 변화가 없었다.
우아하고 도도하게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사교계 첫 데뷔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차분해 보였다.
“이런…….”
누군가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마, 황제파의 귀족이었던 듯하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귀족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입장한 한 남녀를 노려보았다.
특히, 등장한 은발 여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향하여.
‘찾았다.’
힐데아 폰 힐링턴의 목에는 그들이 그렇게 찾고자 했던 붉은색의 목걸이가 당당하게 걸려 있었다.
가브리엘의 파트너는 힐링턴의 쌍둥이 중 첫째, 힐데아 폰 힐링턴이었다.
*
정말 탐이 나는 녀석이다.
‘어디서든 주목을 이끌지.’
황제 디트로이아는 자신이 불러들여 축하해주어야 할 가브리엘을 바라보며 입술에 호선을 그렸다.
‘저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이미 모든 관심은 가브리엘과 그의 손을 잡고 들어온 은발의 영애를 향해 꽂혀 있었다.
덕분에 이 뒤에 들어오게 되어있을 황족들의 입장은 자연스럽게 초라해지게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황후?”
그리 물으며 옆을 보니 분에 차 미치겠다는 눈빛을 하면서도 온화하게 웃으려 노력하고 있는 그의 아내, 이 제국의 또 다른 기둥, 황후 데자이아가 보였다.
시선을 돌린 황후는 표독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고 황제를 노려보았다.
눈빛으로도 몇 번이나 죽일 것 같은 모양새다.
“무엇을 물으시는지 전혀 모르겠군요.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