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당신의 파트너가 저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2)
“……그리고 황후 폐하, 고귀하신 제국의 달을 뵙습니다.”
“오랜만이로군요, 벨키우스 공작. 그대의 노고가 컸다는 것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제국의 복이로군요.”
그제야 우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 황후가 황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황후의 말이 맞소. 게다가 젊디 젊은 전쟁의 영웅이니 춤 한 곡이라도 추고 싶은 영애들이 줄을 잇지 않겠소?”
너털웃음을 터뜨린 황제가 각국의 사신들과 모여 있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눈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브리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황제가 일부러 보란 듯이 모여 있던 이들 중 어떤 여인에게 손짓을 했기 때문이다.
“황녀 라피이아, 이리 가까이 오거라. 무릇 이 자리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라고 할 만한 이는 네가 아니겠느냐. 어울리는 자리에 있어야지.”
이 자리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
그 느긋한 말에 황제의 옆에 있던 황후의 얼굴이, 그리고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서 있던 황태자 벤자민의 얼굴이 조각처럼 굳었다.
황후를 두고 대놓고 황녀에게 가장 고귀한 여인이라 했다.
‘황후를 대놓고 모욕하는군.’
경직된 분위기가 무척이나 살벌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손짓하는 황제나, 그 손짓에 천천히 다가오는 황녀나 만만치 않았다.
‘여전하군.’
가브리엘은 벌써 피곤해졌다.
‘지긋지긋한 황족들 같으니.’
이런 수 싸움이나 읽을 것이 아니라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힐데아의 모습이나 보러 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 능구렁이 같은 미친 노인네가 망쳐놓았고.
“허허, 잘 어울리는구나.”
“아바마마, 부끄럽습니다.”
“무엇이? 너무 겸손한 말을 하는구나, 황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말에 귀족들이 수군거린다.
선대 황제가 정한 혼약이라는 것에 목매달 정도로 집착했던 황제 디트로이아의 행보를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태도는.
황제파의 귀족들이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 어떻게든 해야 할 임무를 깨달았다.
황녀 라피이아와 전쟁 영웅 벨키우스 공작을 붙여놓을 것!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가브리엘은 황제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부러 사나운 눈길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뻔뻔했다.
오히려 라피이아의 등을 살짝 밀어 그쪽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군.’
힐데아가 이 광경을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라고.
기가 막힌 헛웃음을 터뜨린 가브리엘은 황녀가 한걸음 제게 다가오면 두 걸음 멀어졌고, 그것을 두세 번 반복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 자리의 모두가 보았다.
“…….”
“…….”
주변에 싸늘한 침묵이 돌았다.
황녀의 그린 듯한 얼굴 위로도 선명한 짜증이 스쳤다.
뭐. 어쩌라는 건가.
“자아, 이쯤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소.”
아마 황제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 살벌한 대치가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금 황제에게로 향했다.
“오늘은 여기, 젊은 벨키우스 공작을 치하하기 위한 승전 연회이기도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정식으로 열지 못했던 귀족 자제들의 사교계 데뷔파티이기도 하지.”
모두가 황제의 말뜻을 이해했다.
축언과 이능.
보통의 귀족 자제들은 자신이 지닌 축언과 이능을 데뷔탕트 때 뽐내듯이 공표했다.
그러면 그 순간의 발표에 따라 이후의 처지가 크게 뒤바뀌었다.
고귀한 축언과 그에 해당하는 이능을 발휘하는 이는 그만큼의 명성을, 처지에 맞지 않는 볼품 없는 축언과 가치 없어 보이는 이능을 발휘하는 이에게는 싸늘한 동정을.
그리고 여기.
누구보다 서늘한 얼음판 위에 선 듯한 표정을 한 이들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황족인 황녀 라피이아와 황태자 벤자민이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축복 받는 황태자와 황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싸늘한 조연에 불과했다.
고고한 자존심을 지닌 이들인 만큼 둘 모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축언과 이능,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었으니.
특히, 제 아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자존심 드높은 황후 데자이아의 얼굴은 살벌할 정도였다.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느 방향을 손으로 가리킨 채.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위해 최고 신관을 모셨다오. 박수로 맞이해주시오.”
황족들 쪽에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시종의 안내에 따라 한 사람이 등장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
“힐데아.”
아빠와 로제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나는 오렌지 주스가 담겨 있던 잔을 들고 입술을 축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희다시피 한 남자가 황족들 쪽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최고 신관, 크라이스.
그때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 설핏 입꼬리에 간지럽히는 듯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저는 물러나지 않기로 했어요, 아버지.”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힐링턴의 쌍둥이.
그중 첫째에 대한 소문.
과연 죽은 힐링턴의 공작부인은 첫째의 이능에 의해 죽게 된 것일까? 하는 음습한 호기심.
“피하지 않을 거예요.”
“……네 뜻을 존중하마.”
“에이, 분위기 칙칙해요!”
로제가 불쑥 끼어든 것도 그 순간이었다.
내 팔에, 그리고 아빠의 팔에 팔짱을 끼며 장난스럽게 히히 웃으며 속삭였다.
“왜 당연한 걸 물으세요, 아빠! 언니가 왜 피해요? 언니는 이렇게 반짝반짝한걸.”
너무 고맙고 퍽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여기가 온갖 귀족들이 다 모여 있는 대연회장이라는 건 기억해줬으면 하는데, 로제.
어쨌든 긴장했던 순간이 왔다.
최고 신관 크라이스가 앞으로 나서며 모여 있는 이들을 굽어보듯 내려 보았다.
“저는.”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마법적인 요소인 것인지 혹은 누군가의 이능인 것인지 내뱉는 크라이스의 목소리는 곧 홀을 가득 진동하듯 크게 울렸다.
“저는 최고 신관 직을 맡은 크라이스라고 합니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짝짝, 울리는 작은 박수 소리와 함께 크라이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제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최고 신관은 항상 유일신 연님께서 내리신 축복의 축언을 해석하는 임무를 맡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저만큼 현재의 귀족 여러분의 축언과 이능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째서일까.
이곳에서는 거리가 상당했는데도, 슬며시 내려 뜬 크라이스의 녹색 눈동자가 화살처럼 사람들을 꿰뚫는 것 같았다.
실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창백하게 질리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내보이기 싫은 축언이었거나.’
혹은.
‘축언이 없는 자.’
방금까지는 단순히 귀족의 서열에 따라 패가 갈리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시험 속에 던져진 듯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나 또한.
나는 식은땀이 차기 시작한 손을 꽉 쥐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그런 내 손을 간지럽히며 손가락을 벌렸다.
돌아보니 방긋 웃고 있는 로제였다.
“언니야.”
“응…….”
“다 괜찮아!”
돌덩이 같이 올라오던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 로제의 사랑스러운 이능 덕분일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착한 동생이 또 있을까. 나도 로제에게 같이 활짝 웃어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너는 긴장 안 돼, 로제?”
“긴장할 게 뭐가 있어? 내 축언과 이능은 다른 사람들에게 평가받기 위한 것이 아니잖아.”
“우리 로제는 어쩌면 이렇게 씩씩할까.”
“히히, 정말? 그럼 로제 좋아?”
우리가 알콩달콩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크라이스는 말을 마치고 손을 내밀었다.
마침 곁으로 다가온 황궁의 시종은 엄숙한 태도로 천으로 말려있는 두루마기를 내밀었다.
‘저게 그거구나.’
나는 더 자세히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크라이스의 손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천을 바라보았다.
금빛 수술이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는 그것 위에는 분명 이번에 사교계 데뷔를 하게 된 영애와 영식들의 이름이 모두 수놓아져 있을 것이다.
예절 시간에 배웠던 대로.
“으악, 저걸 언제 다 불러?”
“로제, 쉿.”
로제는 옆에서 목 졸린 듯 질렸다는 소리를 냈다.
난 그러지 말라는 듯 로제의 손을 한번 꽉 잡았고.
“하지만 언니야, 저건 너무 끔찍한 전통이야. 최고 신관님도 읽다가 졸겠는걸……?”
그런데 그 순간. 우연이었을까?
최고 신관 크라이스의 눈이 나와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없었을 거리였으니 순전히 내 착각에 불과했겠지만 말이다.
“너희는 마지막쯤에 불리겠구나, 힐데아. 로제리엘.”
난 아빠를 돌아보았고, 꼭 노려보는 것처럼 최고 신관을 바라보고 있는 아빠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그냥 넘길 수 없을 만큼 진한 증오였던지라 흠칫할 정도였다.
하지만 로제의 빠르게 이어지는 흥분에 찬 말에 생각의 그물이 뚝 끊겼다.
“그러네요? 그럼 언니야. 아빠. 시간도 많은데…… 저, 잠깐 배 좀 채우고 오면 안 돼요?”
“로제?”
“저기 연어가 아주 맛있어 보이던데! 이놈의 드레스 입겠다고 물도 제대로 못 마시게 하고 이건 생고문이나 다름 없, 읍읍! 읍읍!”
“로제, 너 정말!”
나는 황급히 로제의 입을 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얘를 누가 말려.
도통 긴장할 틈을 안 주는구나, 사랑스러운 동생아!
*
황후는 진심으로 이따위 전통은 다 빌어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축언이 뭐고, 이능이 뭐길래.
연이어 불리었던 영애나 영식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하는 것을 냉담하게 바라보고 있던 데자이아는 어느 순간 냉소를 터뜨렸다.
저 멀리 확연히 눈에 띄는 여인 둘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힐링턴.
‘이가 갈리는 이름이지.’
벨키우스라는 충성스러운 개만해도 짜증이 나 죽겠는데, 힐링턴도 만만치 않게 거슬리는 가문이었다.
비록 지금은 예전과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황제가 명령한다면 충분히 그 곁에 서리라.
그렇다면 황제와 힐링턴이 가까워지지 않도록 이간질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중 가장 좋은 것이 마침 황후의 앞에 굴러떨어졌다.
‘혼담을 깨고 싶어 한다지.’
황제 디트로이아, 그녀의 남편은 그게 문제였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철이 덜 드는지 욕심만 늘었다. 오, 물론 그녀 또한 욕심은 만만치 않았지만 적어도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았다.
‘벨키우스와 힐링턴의 혼담으로 황제와 벨키우스, 그리고 황제와 힐링턴이 멀어진다면. 그야말로 이 몸의 승리나 다름이 없지.’
그때 황후의 시선을 읽은 귀부인들 중 누군가가 부채를 살랑이며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