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축언으로 사람의 등급이 매겨지는 세상 (1)
“공작 영애들도 별것 없는 것 같군요.”
그녀는 일종의 바람잡이였다.
보지 않는 척하면서 주변에 있던 이들의 귀가 이쪽으로 쫑긋하고 있지 않던가.
특히, 황제가.
황후는 눈을 휘며 모르는 척 대꾸했다.
“부인, 무슨 소리인지?”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다고, 아무리 친딸이라 할지라도 미움은 어쩔 수 없는가 보아요. 그것을 말씀드린 것이랍니다.”
황후는 점잔을 뺐다.
“어허, 부인. 억측은 삼가는 것이 좋겠어요.”
“하지만 황후 폐하, 힐링턴 공작이 쌍둥이 둘을 대하는 태도가 어찌 저리 다르겠습니까?”
귀부인의 시선을 따라 사람들의 눈도 힐링턴의 쌍둥이에게 향했다.
한 명은 눈에 띄게 차가운 인상이었고, 다른 한 명은 보기만 해도 따라 웃게 되는 귀여운 분위기를 풍겼다.
분명한 건 쌍둥이 둘 모두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는 것이었고, 그 옆에 선 부친인 힐링턴 공작은.
오. 사람들은 눈을 빛냈다.
어쩐지 첫째 딸은 쳐다도 보지 않는 것 같지 않은가? 간간이 대화를 나누는 대상은 둘째 딸인 것이 분명했다.
확실한 차별이었다.
“힐링턴 공작만큼 공정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분이 저리 대한다면 다 말 못할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
쾅!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바람잡이의 말은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
그 순간, 사람들은 등골을 스치는 서늘함을 느꼈다.
꼭 이곳에 거대한 몬스터가 등장하여 그들의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이민 것 같은 긴장감이었다.
돌아본 것에는 스산한 빛을 뿌리는 남자, 가브리엘 폰 엘른 벨키우스 공작이 있었다.
그는 우아하게 웃었다. 아니. 분명 웃었는데 이상하게 섬뜩했다.
“부인께서는 입을 조심하는 법을 배우는 게 좋겠군요.”
“베, 벨키우스 공작 각하……?”
귀부인은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에 차질을 빚은 황후 데자이아 역시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공, 작! 지금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앞에서 무슨 무례…….”
“부인께선 자신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라고 착각이라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요?”
저 귀부인이 말하는 바가 결국 황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걸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저런 태도라니?
황후는 그 기함할 무례에 입술을 사정없이 씰룩였다.
지금 저것이 제 사람을 압박하는 것인가. 고작 전쟁터에서 사람 많이 죽인 것을 무엇이 자랑이라고!
가브리엘은 귀부인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기운은 선명히 황후의 살갗을 찔렀다.
그러나 모두가 보고 있는 앞이었다. 황후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브리엘은 미친 사람처럼 해사하게 미소하며 짓씹듯 말했다.
“제가 두 눈 똑바로 보고 있는 앞에서.”
가브리엘은 누구 하나 죽일 듯한 광기 어린 눈으로 하나, 하나 응시했다.
“은애하는 약혼녀의 가문을 욕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잘못 입을 놀리는 이가 있으면.
그대로 달려가 매일 밤 고통스럽게 해주겠다는 듯이.
“다들 아시다시피 제가 성격이 참 더럽습니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귀신 공작 따위의 이명이 붙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알아서들 입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살벌한 경고를 알아들은 귀부인은 퍼렇게 질린 낯으로 졸도할 듯이 휘청거렸다.
황후의 눈짓에도 그녀는 다시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목이 잘릴 것 같았으니까!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힐링턴의 로제리엘, 힐링턴의 힐데아.”
마침내, 최고 신관의 호명이 울렸다.
나는 로제와 함께 최고 신관이 기다리고 있는 계단을 올랐다.
걸음마다 닿아오는 시선들이 어찌나 날카롭던지 그대로 뒤통수가 뚫리는 기분이다.
특히, 가브리엘의 옆에 서 있었던 흑발 여인의 시선이 따가웠다.
‘황녀 라피이아겠지?’
모른 척 걸어 마침내 최고 신관 앞에 섰고, 크라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아는 척을 하듯 눈을 깜빡였는데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을 보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건 원작에서도 꽤 중요한 장면이었지?’
내가 알고 있는 <영애는 달콤하다>의 줄거리 중에서도 축언을 공표하는 장면이 나왔다.
다른 것이 있다면 원작에서의 힐링턴은 쌍둥이가 아니라 오로지 로제리엘 혼자였다는 것.
로제의 <화려하게 꽃피리라>라는 누가 들어도 좋은 축언의 발표로 인해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확 바뀌는 것.
‘특히.’
원작에서의 악녀의 위치에 있던 황후와 황녀의 시선이 그 시점으로 바뀐다.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는 영애에서 강력한 방해물로.
그때, 최고 신관의 입이 열렸고 그의 엄숙한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 또한 나와 로제에게 동시에 꽂혔다.
<화려하게 꽃피리라>.
로제의 축언이 읊어졌을 때, 홀 전체에 탄식이 흘렀다.
웅성거리는 소리 중에는 ‘그래서 로제 영애를 볼 때는-’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그래, 누가 봐도 로제는 사랑스럽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축언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크라이스의 낮게 가라앉은 눈은 거울처럼 반사되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해진 운명이 없다>
내 축언이 크라이스의 입을 통해 나왔을 때.
“…….”
홀에는 싸늘한 침묵이 번졌다. 나는 각오했던 상황에 속으로 웃음을 지었으나, 로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모여 있던 귀족들 중 누군가 “정해진 운명이 없다니, 뭐 죽은 사람이라도 된다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을 때는 심장이 쿵 하고 떨렸지만.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나는 의연하게 허리를 세웠다.
약하고 겁먹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내 축언이 엄마를 해쳤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난 다친 새도 고쳤고, 가브리엘의 심장도 다시 뛰게 만들었어. 정원에 울창하게 솟구치는 나무와 꽃들은 모두 내 힘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고 있잖아. 그러니까 내 축언은 불길한 게 아니야.’
곧 나와 로제가 서로의 손을 잡고 계단에서 내려오자, 모든 귀족들의 축언 발표가 끝났다.
내가 걷는 곳마다 모여 있던 귀족들의 따가운 시선이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그래도 직접 와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네.
“다들 비겁해. 언니, 저런 말들은 듣지도 마.”
투덜거리는 로제의 말을 들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가브리엘을 보았다.
마침 황제가 축언의 공표가 끝났다는 말을 했고, 그때부터 자유롭게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로제가 물었다.
“첫날은 이대로 놀고먹고, 둘째 날은 첫 춤을 추는 거지? 본격적인 데뷔탕트는 둘째 날이고.”
“그런 셈이야. 그런 의미에서 로제, 내일은 꼭 가브리엘과 함께-”
“앗, 저건 로 샤밀레 중앙 광장점 초콜릿 한정판이잖아! 언니, 나 저거 없어지기 전에 먹으러 갈게, 안녕!”
“…….”
앗 하는 사이에 로제가 치마를 잡고 껑충껑충 뛰어가버렸다.
뒤에 홀로 남겨진 나는 황당한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있다가, 제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세웠다.
진짜 이번 연회 끝나면 집에 가서 보자, 로제리엘!
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아빠는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차가운 얼굴을 한 채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건 내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어하는 눈치인 귀족들이 더러 보였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시기와 질투 같은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는 또래 영애들도 제법 보였다는 것이다.
난 쓴웃음을 지었다.
‘무려 전쟁 영웅의 파트너니 좋은 시선은 못 받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마침, 초콜릿 먹겠다고 뛰어간 로제는 다가온 귀부인들에게 붙잡혀 어설픈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능청스러운 로제의 입담에 감화된 귀부인들은 자신들이 누구의 지지 세력인지도 잊은 듯 꽤 즐거운 분위기를 피우며 떠들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는가.
‘나만 조심하면 괜찮겠어.’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힐데아 영애?”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아하고, 기이할 정도로 관능적인 목소리는 꼭 쫄깃한 질감까지 갖춘 듯했다.
어째서일까.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날 부른 것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텐데도.
‘……분명.’
천천히 몸을 돌리자, 부채 사이로 나른하게 바라보는 한 쌍의 푸른 눈이 보였다.
심장이 서늘해졌다.
‘가브리엘을 사이에 두고 로제리엘을 궁지로 몰아넣는 악녀, 황녀 라피이아.’
원작에서는 황녀는 비중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워낙 가브리엘과 로제리엘의 사이를 두고 큰 갈등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그런데 직접 보니까, 도무지 그냥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인걸.’
희고 긴 목을 자랑하듯 올려 묶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장식된 보석과 꽃잎들이 우아하게 빛났다.
그리고 화장 때문만 아니라 사납게 치떠진 눈은 내게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어떻게든 로제를 지키겠다고 마음 먹고 준비하며 나왔지만, 그래도 악역의 어그로가 바로 끌린 것은 심히 서글펐다.
그것도 악역들 중에는 최종 보스에 해당하는 격인 황녀가 직접 나서게 될 줄은.
여기서도 나는 시비 걸고 싶게 생긴 것일까?
그래서 황녀와 황녀 주변의 영애들이 저렇게 가시 같은 눈들을 하고 바라보는 것일지도.
“처음 뵙겠습니다, 황녀 전하.”
난 천천히 예법에 따라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려 고개를 숙였다.
“힐링턴의 힐데아, 제국의 고귀하신 작은 달을 뵙습니다.”
“…….”
잠깐 황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가늘게 휘어진 눈으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기만 했을 뿐이었다.
인사를 건넸는데도 받아주지 않고 세워둔다는 것은 충분한 모욕이었다.
너를 존중하지 않겠다.
너는 나와 대화할 자격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황녀의 휘어진 눈이 다시 한번 내 시선과 얽혔다. 그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 어떻게 반응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