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축언으로 사람의 등급이 매겨지는 세상 (2)
“어머, 자존심도 없나 봐요.”
“어쩜 저렇게 빳빳할 수가.”
“고귀하신 황녀 전하께서 직접 행차하시게 하다니, 경우가 없는 거죠.”
황녀의 뒤에 있던 영애들이 보란 듯이 키득거리며 나를 조롱했다.
보통의 공작 영애라면, 아무리 황녀라고 할지라도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더구나 황녀의 측근들로 보이는 영애들은 어떻게든 공작 영애와는 신분 차이가 큰 사람들이었으니.
하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내 반응을 보고 싶었겠지만, 여기서 화를 내도 손해. 눈물을 흘려도 손해야.’
황녀는 내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후후.”
그러자 재잘거리며 대놓고 모욕하던 영애들의 입이 꾹 다물렸다.
등골이 서늘한 광경이다. 저 많은 이들이 오로지 저 여인의 행동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역시 로판 속의 악녀! 포스가 남달랐다.
황녀는 언제 냉대했냐는 듯이 넌지시 이야기했다.
“완벽한 예법이로군요. 흠잡을 곳이 없는. 하지만…….”
황녀가 한걸음 바짝 다가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부채 너머로 휘어진 눈이 한껏 다가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그대. 그대가 갖고 있는 물건 중 무척이나 탐이 나는 것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요?”
으악, 무서워.
속으로는 살벌하게 떨렸으나, 쉽게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떨지 않고 대꾸했다.
“그것이 물건이라면 기꺼이 바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혹여라도 사람이라면.”
당신이 말하는 그 물건이라는 것이 가브리엘이라면.
그리고 내 동생 로제리엘이라면.
그건 안 되는 일이다.
둘은 서로 행복해야 해.
“사람이라면? 그대는 어찌할 것인가요. 그것이 황궁에 대한 공작가의 충성심을 표하는 방식이라면?”
이럴 때는 얼음 덩어리같이 굳건한 얼굴이 참 큰 도움이 된다.
적의에 적의로.
악의에 악의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호오? 어찌 다르지요?”
“사람이라면 자유 의지가 있으니, 제가 황녀 전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로제나 로제의 약혼자에게서는 관심을 끄세요, 악녀 언니.
나는 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바라본 것이었지만,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황녀 뒤의 영애들은 큰 모욕이라도 받은 것처럼 씩씩거리며 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어찌!”
꺄악, 꺄악 소리와 함께 빠르게 스치는 말들은 대강 이랬다.
대충 무례하다, 어찌 감히 황녀 전하께 그따위 말버릇을, 힐링턴의 공작 영애이면 다인가, 축언도 불길한 주제에!
그런데 축언이 여기서 왜 나와.
“…….”
“……흐, 흡.”
마지막 말은 좀 무례한 것 같아 빤히 바라보았는데, 그 말을 빽 소리쳤던 통통한 인상의 영애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어물거렸다.
“요, 요, 용ㅅ…….”
무슨 말이지?
못 알아들어 더 집요하게 바라봤는데, 이젠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숨이 넘어가려했다.
아, 이젠 빨갛다 못해 파래졌다.
‘저렇게 두면 졸도할 것 같은데.’
“저기.”
“꺄아아악!”
걱정이 되어 말을 걸었는데, 정말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휘청거리는 게 아닌가.
난 좀 시무룩해졌다.
저 살벌한 황녀가 노려본 것도 아니고, 난 그냥 바라본 것뿐인데 저런 반응이라니.
힐링턴 가문의 사용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녀가 코웃음을 쳤고, 눈치를 보던 영애들이 그 문제의 영애를 자신들의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대, 만만치 않군요.”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하지만 솔직하진 않아.”
부채를 탁, 친 황녀가 내 시선을 돌렸다. 난 황녀가 내 목걸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
응? 왜 이걸 그렇게 보지?
“눈은 나는 원하는 것 하나 없다는 눈을 한 주제에. 걸치고 있는 것에는 욕심이 가득하군요.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할지.”
대체 무슨 말이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을 딱딱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무시한다고 여겼던 것일까?
이제 황녀는 그린 듯이 담았던 미소조차 지운 채였다.
“축하해요, 그대.”
“…….”
“나는 누구든 대화만 나누면 제 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은 저기, 힐링턴의 둘째보다도…… 당신이 훨씬 더.”
거슬리거든.
‘그게 축하할 일인가요?’
그 살벌한 경고에 나는 보이지 않게 속눈썹을 떨었다.
*
그렇게 잠시 뒤.
나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는 듯 우아하게 멀어지는 황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었다.
‘내일은 더하겠구나. 이틀째에 본격적으로 춤까지 추기 시작하면 시비 거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거야.’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내 방, 내 침대에서 발 뻗고 눕고 싶을 만큼 피곤해졌다.
아마 저 황녀를 우리 로제에게 상대하라고 하면…….
그건 안 돼. 그것만은 말리자.
‘로제는 황녀에게 주먹질한 최초의 귀족 영애가 될지도 몰라.’
가능성이 꽤 있는 살벌한 추측에 어깨를 부르르 떨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옆에 다가오는 기척이 나더니, 제법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온 것이다.
“영애, 추우신가요?”
내가 놀란 것은 바로 내게 친절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 살벌한 연회장에서 누가 내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주변의 사람들이 휘둥그레 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반응들이 왜 저런담?’
그래서 내 옆에 다가온 이가 평범한 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대체 누가 왔길래.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건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어린 청년, 아니 소년이었다.
누구지?
“……영식, 혹시 지금 제게 물으신 것인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배시시 웃음이 퍼지는 얼굴이 유순했다.
“그럼요. 지금 제 앞에 있는 영애는 그대뿐인걸요.”
동시에.
뇌리에 무언가 기억이 파고들었다. 난 저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어디서?
“어? 영식은?”
내 감탄사를 들은 남자가 갑자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활짝 웃었다.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와아, 절 알아보셨군요?”
“네. 왜 당신이 여기에…….”
푸근하고 친근한 그 얼굴을 보자마자 짧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분명 저 얼굴은 며칠 전에 보았던 영식의 얼굴이 아닌가.
‘잠깐, 뭔가 이상해.’
그런데 분명 저 옷은.
‘저건 황태자가 입고 있던 연회복인데. 여기서 황태자와 같은 옷을 입은 인간이 한 명 더 있을 리는…… 없어!’
알아낸 사실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황녀에 이어 이제 황태자를 상대해야 한다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바라보자, 난처한 듯 웃는 표정을 보며 단숨에 깨달았다.
“저, 힐데아 영애?”
그러니까 길에서 마주쳤던 그는 나와 초대장을 주고 받은 무례한 영식이 아니라, 사실 황태자였다는 소리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가문의 이름을 빌린 것이었을까? 이를테면 위장?’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간혹 고위 귀족들 중에 그런 방식을 택해 외부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황족들도 자주 애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럼 난 지금 황태자 벤자민의 비밀을 본의 아니게 알게 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날 찾아온 거군. 입단속을 하려고?’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런 비밀을 당부하러 온 상대에게 왜 저렇게 웃고 있느냐였다.
*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태자 벤자민은 그녀를 보자마자 받았던 우려대로 사람들의 시선 아래 까 내려지고 평가 받는 힐데아 폰 힐링턴을 보았다.
‘역시.’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다며 호감을 받고 있는 로제리엘 폰 힐링턴과는 대조되는 대우였다.
‘그렇게 대할 사람이 아닌데.’
보는 그가 다 답답했다.
이게 다 그녀와 동행한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눈동자와 같은 목걸이를 걸게 한 행동 때문인 것 같아 짜증이 났다.
그러나 와중에도 그녀는 태양처럼 빛이 났다.
시비를 거는 영애들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고고한 태도 또한 무척 감명 깊었다.
벤자민조차 그럴 수 없었던 태도였다. 당당함이었다.
움직임은 또 얼마나 예절 표본 같은지, 바늘 하나 들어올 것 같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은 벤자민의 뇌리에 콱 틀어박히고 말았다.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벤자민은 이미 힐데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고 있거라, 벤자민. 오늘은 증오스러운 축언과 이능을 발표하는 시간이니까. 먹이를 줄 필요는 없겠지…….’
어머니의 명령과는 정반대의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그런데 이미 황녀 라피이아가 자신의 사람들을 데리고 와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지만, 황태자인 그는 평소 주변에 박힌 이미지대로 나설 수가 없었다.
혹여 눈물이라도 쏟으며 뛰어나갈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하하.’
벤자민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타인은 결코 자신의 존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처럼 우아하며 도도한 태도는 오히려 흉 보는 사람들을 도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특히.
‘저 여자는.’
얼굴이 퍼렇게 질린 빨간 머리카락의 영애.
그건 바로 셀데리아 백작 영애였다.
벤자민의 눈이 호기심으로 번쩍였다.
평소 라피이아의 주변에 자신이 황녀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독한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특히 입이 더러운 영애가 바로 셀데리아 백작 영애였다.
그런데 뭐라 말을 제대로 건네지도 못한 셀데리아 백작 영애가 힐데아의 눈빛 공격 한 번에 얼굴이 퍼렇게 질려 확 질려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벤자민은 그녀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그녀라면 그렇지 않은 척, 사실은 축언과 이능이 없는 황태자인 자신을 무시하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 같아서.
그 추측은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