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삼각관계의 주인공?
“힐데아 영애만 괜찮다면 잠시 대화 상대로 머물러도 괜찮을까요?”
나는 부담되니 제발 제자리로 돌아가주세요, 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황녀 라피이아보다 연상에, 그녀의 배다른 남매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순진함이 얼굴에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길거리에서 그를 향해 도우러 갔던 이유도 바로 저 눈빛 때문이었다.
유순하게 처진 눈매에는 넘어진 아이처럼 울먹한 기운이 있어 보는 사람이 절로 손을 뻗게 만들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외모야. 저 얼굴이 나보다 연상이라고? 얼굴에 방부제를 펴바른 것도 아니고…….’
그러나 상대는 어린 소년도 아니었고, 황족이었으며, 무려 그 무시무시한 황후 데자이아의 아들이었다.
‘절대 어울려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저렇게.’
나는 힐끗 상석으로 눈을 주었다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눈알을 굴려야 했다.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 최고 신관 크라이스의 옆에 있는 황후의 시선이 번뜩일 정도로 이쪽을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살벌하게 경고하고 있잖아.’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나를.
고귀한 자신의 아들이 감히 나 따위에게 말을 걸어서 참을 수 없다는 느낌이랄까.
뭐 시작도 하기 전에 황후에겐 완전히 찍힌 모양이었다.
‘어차피 힐링턴과 데자이아는 악연이겠지만.’
난 한숨을 내쉬면서 도대체 왜 다가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전하, 혹시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 것입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본 모양이군요. 그때는…….”
“이 연회장에서 황태자 전하와 같은 의복을 입고 있는 분이 또 계실리 없으니까요.”
“음, 영애. 그때의 그 일은…….”
역시 비밀 유지인가?
그곳에서 자신을 본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그렇다면 이런 자리보다는 조용한 테라스로 이동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가 미안했어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황태자가 뭐라고 했지?
“내가 영애를 속인 꼴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일로 찾아온 건 아니에요. 그냥, 영애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요. 반가워서.”
어쩐지 수줍어하는 것 같은 표정이 기묘했다.
왜? 설마 넘어진 것에 손 한 번 내밀어줬다고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벌써 힐링턴과 황후 데자이아와의 관계성이 어떤지 고려하는 시선들이 무척 따가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대화를 파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
내 뺨에 닿는 저 시선.
난 눈을 힐끗 돌렸고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가브리엘……. 왜 저런 표정이지? 얼굴 뚫어지겠잖아.’
가브리엘의 시선이 이쪽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꼭 화가 난 것도 같아 보이는, 내 착각이겠지만…… 내가 걱정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러나 그는 당장 이쪽으로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게서 떠난 황녀가 가브리엘의 주변에 다가갔고, 벌떼처럼 그녀의 뒤를 따르는 다수의 영애들이 가브리엘의 곁을 차단한 모양새였으니까.
‘풋.’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었다.
저 딱딱한 얼굴이 나한테만 비추는 것은 아니었구나.
그래도 저 영애들을 바라볼 때에 비하면 날 볼 때의 얼굴은 애교에 가까운데?
마침, 그가 입술을 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가브리엘은 꽤 지척에 있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곳에 계시면.’
몇 번을 반복한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때 내가 가브리엘을 보고 있는 것이 무례하다 여겼는지, 벤자민이 헛기침을 했다.
“저기 힐데아 영애? 저 아직 안 갔는걸요.”
“아. 죄, 송합니다, 전하.”
벤자민은 질책하기보다는 사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가 보고 있던 쪽을 확인하고 더 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에요, 영애. 확실히…… 그는 시선을 끄는 사람이죠. 지금도 그의 승전 연회나 다름이 없잖아요. 이해합니다.”
원작에서 황태자와 가브리엘의 관계가 어땠더라.
아니. 그보다 황후의 존재감이 하도 강렬해서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저 순한 얼굴을 보니 이유를 알 것도 같지만.
“하지만 전하, 감히 한 말씀 올리자면.”
“전하 말고 벤자민이면 안 되나요?”
“……네?”
나는 정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대체 누가 감히 황태자나 황녀의 이름을 쉽게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는 대뜸 지금 생판 처음 보는 남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에게 그것을 요구한 것이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깜짝 놀란 나와는 다르게 벤자민은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려 보이는 외관에 경악스러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행동이었지만.
‘이건 내가 눈치채지 못한 함정인가? 그래? 혹시…… 황태자를 통해 방심시키고 내게 무슨 정보를 얻으려는 황후의 수작인 건 아니겠지?’
이를테면 내 축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정해진 운명이 없다>.
그 이야기가 귀족들에게 퍼졌을 때, 그때의 분위기는 선명했다.
불신, 경악.
그리고 어쩐지 그랬을 것이라는 비웃음.
반면 의아함을 느낀 부류도 있었다.
저게 정말 나쁜 축언인가? 가늠하는 부류.
황후는 어느 쪽이었을까.
“하지만 전하, 지금 저와 대화하고 계신 이 상황 자체를 황후 폐하께선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벤자민의 표정이 변했다.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강아지 같았던 얼굴이 손가락에 가시라도 찔린 것처럼 쌉싸레하게.
그는 시무룩한 얼굴 그대로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맞아요.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 되고 싶은 건 사실이에요. 언제나 그렇죠. 나는 어마마마를 아끼고 사랑하니까. 하지만 영애.”
내가 잘못한 기분이었다.
“나는 순수하게 영애와 대화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거예요.”
*
“어머, 황후 폐하. 지금 전하께서…….”
“보았네.”
건조한 황후의 목소리에 말을 걸었던 귀부인들은 쩔쩔매는 표정을 했다.
“고, 고정하셔요. 전하께서 호기심이 생기신 것일 수도,”
“거기까지. 되었네.”
황후는 턱을 매만지며 가늠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티 내진 못했지만 재미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황후의 그림자나 다름없이 제 뜻을 잘 보이지 않았던 황태자 벤자민.
그런 황태자가 도드라지는 행보를 보인 것도 신기한데, 그게 저 힐링턴의 영애 때문이라니.
더 재밌는 것은 꽤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힐데아와 벤자민의 모습을 벨키우스 공작이 그야말로 꿰뚫어버릴 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꼭 통속소설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처음에 가브리엘과 힐데아가 등장했을 때, 대부분의 귀족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교계의 은밀한 구애에 따라 상대의 눈동자 색의 보석을 담은 목걸이를 선물한 연인 사이가 퍽 냉담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의 행동들로 인해 착각했던 사람들도 은근히 눈치를 채고 있었다.
‘벨키우스와 혼약할 상대가 누구인지.’
벨키우스 공작이 관심 가진 대상은 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로제리엘 영애가 아니라 그가 에스코트해서 들어온 첫째, 힐데아 영애라는 것을.
누구 하나 힐데아에게 다가갈 때마다 살벌하게 눈을 치뜨고 경고를 해대니 모를 수가 없었다.
‘대체 저 여자가 뭐가 좋다고?’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힐데아 폰 힐링턴이 얼마나 독보적으로 냉정하냐면, 연회장에 들어온 이래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제 아버지의 옆에 있을 때도.
사랑스러운 동생 옆에 있을 때도.
심지어 무수한 관심을 받는 전쟁 영웅의 에스코트를 받고 들어올 때도!
어쩐지 목걸이를 준 가브리엘이 힐데아에게 매달리는 것 같은 형상이었고, 힐데아는 그들의 예정된 약혼이 탐탁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러니 재미있지 않을 수가.
안 그런 척하면서 힐데아 쪽을 살피고 있었던 귀족들이 속살거렸다.
“정말 저 목걸이가 대놓고 건드리지 말라는 표시였던 걸까요?”
“하지만 힐데아 영애는…… 축언도 그렇고,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죠?”
“예절은 두말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만 곁에 다가가기는 좀 그렇네요.”
방긋거리며 사람들의 호감을 끌어내고 있는 로제리엘과는 천지 차이.
힐데아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가브리엘의 견제가 없었더라도 힐데아에게 친근하게 말 붙일 수 있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쌍둥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아닙니까?”
“맞아요. 로제리엘 영애와는 너무 다르군요. 게다가 그 축언, 너무 이상하잖아요.”
“흐, 흥. 공작가의 영애라는 것만으로도 뻣뻣하게 굴 수 있는 시대는 이제 지나지 않았습니까? 축언과 이능도 얼마나 중요한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잘 알 텐데요.”
확실히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다가오는 자들을 찔러버리겠다는 듯한 힐데아의 냉정한 얼굴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서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 호기심을 보였다가 지레 겁 먹고 물러난 영식들은 벌써 반감을 갖고 축언이 불길하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느니 치졸한 말들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지금 화제의 중심에 서려는 것이다.
황태자와 벨키우스 공작의 관심 한복판에.
특히, 제 아들이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최초로 경험한 황후 데자이아의 눈은 위험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연회가 시작되기 전, 아직은 힐링턴의 쌍둥이와 어울리지 말 것을 경고했는데도.
‘고작 저까짓 것 때문에 어미의 말을 거부해?’
딱 그런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