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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49화 (49/155)

49화. 남자의 질투는 뜨겁다

벤자민은 말했다.

“축언으로 사람의 등급이 매겨지는 세상이죠.”

“…….”

차분한 어조로 흘러나온 그 말이 슬프게 들렸다면 이상한 것일까?

확실히 <영애는 달콤하다>의 원작 소설에서는 잘 느낄 수 없었던 비정함이 이 현실에 있었다.

이를테면 축언과 이능이 없거나, 유능하지 않거나, 볼품없어 보였을 때의 반응들.

일반적인 귀족 사회였다면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황녀라 할지라도, 제 주인의 위세만 믿고 저런 식의 시비를 걸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작위보다도 먼저 우선되는 것이 바로 축언과 이능.’

황제와 황후를 보면 알 수 있다.

황제 디트로이아는 분명 잔인한 인물이었지만 놀랄 만큼 강력한 이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못하지.’

그 강력한 이능 덕분에 차기 황제의 어머니라는 위치로 야금야금 전력을 늘려가고 있는 황후 데자이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권력은 굳건했다.

황녀 라피이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이능을 지닌 황제의 총애가 머물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저렇게 세상 다 가진 듯 다니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동의했다.

“그렇네요, 전하.”

“역시 그렇죠?”

축언으로 가늠되는 세상.

저 연회장을 가리키면서 속닥거리는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해서 나도 퍽 울적해졌다.

그때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영애.”

꼭 수줍어서 떨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울타리 속 새장 같았던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저들의 반응과 같았는데. 그랬는데. 영애는 달랐어요.”

미심쩍은 표정으로 벤자민을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한 건 넘어진 걸 일으켜주고 손수건 준 것밖에 없는데.

“영애가 주었던 손수건.”

“……그것이 왜,”

“내게 정말 소중했어요. 감동이었거든요. 그때 나는 황태자도 아니고 그냥 한미한 가문의 공자였을 뿐인데도 영애는 친절했죠. 그건.”

“전하?”

“축언과 이능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사람의 태도였어요.”

진짜 손수건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만약 그 정도 호의로 황태자의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건 너무한 것 아닌가 싶었다.

무례한 태도였을지도 모르지만, 뒤에 이어질 말이 더 두려웠던 나는 황급히 그의 말을 끊어냈다.

거기까지 해요, 벤자민 전하.

당신의 엄청난 어머니의 견제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

“그저 손수건일 뿐이었습니다, 전하. 그 정도는 누구나…….”

“아뇨.”

벤자민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퍽 처연한 몸짓이었다.

“아니었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한미한 가문의 영식이 한심하게 넘어져 있을 때 다가와 일으켜주려고 하진 않았을 거예요. 심지어 내 어머니조차.”

“그건…….”

이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

“영애의 축언을 들었어요.”

객관적으로 황태자는 성격이 좋아 보였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내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그런데도 황태자는 대화하는 내내 내 냉담한 표정에 기분 나빠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모두의 반응을 그대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죠. 내게 그건 너무 반짝거리며 빛나 보여서…….”

아니야! 나는 황급히 말했다.

“그런 것까지는 아니에요. 전하께서 저를 너무 좋게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좋게 본 게 아니라 그대로 본 거예요. 영애만 괜찮다면 가깝게 지내고 싶어요. 이를테면 사냥 대회에 개인적으로 초대를 한다던가. 괜찮을까요?”

벤자민은 수줍게 웃었다.

아마도 자신에게 축언과 상관없이 대해준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

‘내가 크라이스에게 느꼈던 호감처럼.’

그 속사정이 이해되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슬쩍 들었지만.

‘너무 부담스러워.’

“전하, 저는.”

“네, 힐데아 영애.”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것처럼 보이는 가브리엘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는 황녀 라피이아의 관심도.

황제파와 황후파 귀족들의 뚫어지는 시선 역시 다 부담스러웠다.

‘하아, 오늘 일진이 왜 이럴까.’

나는 멀리 보이는 아빠에게 눈을 맞추며 열심히 텔레파시를 보냈다.

‘아빠, 저를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제발 이리 오셔서 저 좀 구해주시면 안 될까요!’

힐링턴 공작이라면 황태자도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아가려 할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우연인지 아빠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거리는 있었지만 분명히 아빠도 날 봤다.

난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아빠, 제발.’

그러나 텔레파시는 파삭 부서졌다.

움찔했었던 것처럼 보이던 아빠는 내가 아니라 황태자 쪽을 바라봤던 것이다.

그래. 뭘 바랐지. 우리는 눈빛만으로 뜻을 알아줄 리가 없는 서먹한 부녀 사이인데.

‘그런데 아빠 표정이 왜 저렇게 험악하시지.’

어쨌든 난 미련 없이 이번에는 로제 쪽을 바라봤다.

‘로제는 다를지도 몰라.’

우리 듬직한 동생은 내가 곤란해할 때마다 기적처럼 등장해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기 일쑤였으니까.

이번에도 기대했지만, 로제는 뒷모습만 보였다. 아무리 봐도 아까부터 고대했던 그 망할 초콜릿을 즐겁게 녹여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잠깐만. 쟤 지금 엉덩이 춤 춘 거 아니야?

아, 로제. 그런 건 집에서나 하라고 했지!

나는 미련 없이 누군가 날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기로 했다.

체념하며 황태자에게 몸을 돌리고 차분히 말하려 했다.

전하, 지금 제 입장이 무척이나 곤란할 것 같아요. 이 말을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바로 그때였다.

“!”

누군가의 길쭉한 팔이 황태자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팔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자 차가운 얼굴을 한 가브리엘의 옆모습이 보였다.

‘언제 이리로 온 거지?’

당황해서 바라보자 가브리엘은 눈만 살짝 올려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어쩐지 평소보다는 훨씬 유해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약속한 대로 다녀왔습니다, 영애.”

“……네, 가브리엘.”

약속까지는 아니었는데.

‘어쨌든 대화의 흐름이 바뀐 건 다행이야. 이제 거절만 잘 하고 떠나면 될 것 같은데.’

힐끗, 가브리엘이 원래 있었던 곳을 보니 전쟁 영웅과 대화를 충분히 나누지 못한 영애들의 서슬 퍼런 눈빛이 내 쪽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음, 수명이 백 년은 늘 것 같다.

“그런데 힐데아 영애.”

“네?”

“전하와 아는 사이셨습니까?”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이걸 알았다고 해야 해, 몰랐다고 해야 해?

하지만 내 침묵을 무어라 생각한 것인지 가브리엘은 언제 유해졌냐는 듯 단단한 얼굴로 변했다.

그리고 내게서 시선을 돌려 곧장 황태자 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가브리엘?

“송구합니다만, 황태자 전하.”

참 이상하다.

유려하고 매끄러운 말투는 가브리엘이 저렇게 말할 수도 있었구나 새삼 생각하게 하면서도.

“제 파트너께 용건이 있으십니까, 전하?”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뭐지?

*

가브리엘은 초조했다.

대체 어떻게 아는 것인지 몰라도 황태자 벤자민의 호감을 사는 것은 힐데아에게 절대 좋지 않은 일이었다.

벌써부터 황후는 이를 갈 듯이 힐데아를 응시하고 있지 않던가.

‘아니. 그것뿐만은 아니지.’

흔들리는 눈으로 차분하게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힐데아를 보았다.

저를 향할 때와는 퍽 다른 모양새였다.

웃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불편한 기색은 없어서 가브리엘은 큰 충격을 받았다.

‘나만, 싫었던 건가?’

이를 꽉 깨문 가브리엘은 인정해야 했다. 치졸한 이 감정을. 당장 황태자고 나발이고 저 자를 힐데아의 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자신의 치졸한 질투를.

‘왜.’

사실 벤자민만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황후와 황제의 가운데에 서 있다가 사라진 최고 신관이라는 놈 역시 거슬리긴 마찬가지였다.

가브리엘은 힐데아가 로제리엘 외의 사람에게 그렇게 부드러운 눈빛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었다.

어째서. 왜? 도대체 언제.

‘축언을 가르쳐주었을 때 만났을 테지만.’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귀족들을 떼어놓고 겨우 힐데아의 곁으로 다가왔을 때, 질투는 정점에 달했다.

힐데아를 향해 수줍게 웃고 있는 황태자의 시선이 가시처럼 짜증 났고.

그런 그를 경계하지 않고 친근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힐데아에게 충격을 받았다.

‘대체 언제 만난 거지?’

손수건은 또 뭐고.

가브리엘은 바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황태자의 시선에서 힐데아를 가리고자 몸으로 막아섰다.

온유한 듯 일순간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황태자의 시선이 그에게로 내리꽂혔다.

가브리엘은 사납게 비틀리려는 입매를 힘주어 참았다.

“제 파트너께 용건이 있으십니까, 전하?”

황태자 벤자민.

세간의 평가는 나쁘지 않다.

축언과 이능을 타고나지 않아 열등감을 키울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나, 어미의 말을 잘 듣는 차분한 성격이라지.

하지만 그것 외엔 뛰어난 능력을 보인 적이 없어 황녀 라피이아보다도 영향력이 적다는 평가가 있는 비운의 황태자였다.

하지만 저 눈은 다르다.

‘대체 뭐지?’

힐데아를 바라보는 눈은 가브리엘의 신경줄을 툭툭 건드렸다.

정말 소문대로라면 저를 앞에 두고 움찔하기라도 해야 했는데, 황태자는 소름이 끼치도록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순진한 듯, 유순한 듯한 처진 눈매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이상하다. 벨키우스 공작, 그런 걸 묻기 전에 나한테 먼저 할 말이 있지 않던가요?”

인사를 하지 않을 것을 지적한 것이다.

파지직 소리가 날 정도로 살벌한 시선이 뒤엉켰다.

가브리엘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겉모습만큼은 흔들리지 않은 듯 부드럽게 말했다.

“다급한 마음에 실수하였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벤자민은 억울하다는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말이 이상하네요. 영애는 나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공작이 다급할 것이 뭐가 있죠?”

“파트너의 곁을 비우는 것은 예의가 아닌 줄로 압니다만. 황궁은 유독 넓고 오늘 연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그러니 꺼져.

가브리엘은 벤자민을 향해 대놓고 눈을 서늘하게 뜨며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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