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불편함의 이유, 가시 같은 감정 (1)
하지만 벤자민은 다시 한번 활짝 웃었다.
웃어?
“흐응, 연회장에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것인데 공작의 말은 오묘하군요. 꼭 내가 힐데아 영애를 지키지 못 할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하하. 그럴 리 없겠지만요.”
지키긴 누가 뭘 지킨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고귀하신 위치의 황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한 영애를 붙들고 계시면 이상한 시선이 따라붙지 않겠습니까?”
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힐데아를 더 위험하게 만들고 있지 않나?
그렇게 비꼬는 말에 벤자민의 눈썹이 잠깐 꿈틀했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불쾌한 빛을 살짝 내비치기도 했다.
“이상한 시선은 또 무엇인가요?”
“이를테면, 아들을 너무 아끼는 누군가의 심정의 변화라던지요.”
“…….”
“그 후폭풍은 무섭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황태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가브리엘은 속으로 비틀린 웃음을 터뜨렸다.
황후와 사전 협의가 된 행동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여기서 황태자와 더 대화를 나누는 것은 힐데아에게 좋지 않았다.
그가 느끼는 질투심을 제외하고서라도.
돌아서서 힐데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이끌려 했을 때였다.
“힐데아 영애.”
황태자는 교묘하게도 자신이 아닌 힐데아를 지목해 말을 걸었다.
힐데아는 괜찮다는 듯 자신의 옆으로 나오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가브리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떼어놓고 싶다.’
그는 촉이 좋았다.
다년간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돌았기 때문인지, 사람의 눈빛을 읽어내는 것에는 특히 유별났다.
그렇기에 황태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는 순간, 그는 알았다.
어미와는 전혀 달라 보이는 황태자이지만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고.
그래서 자꾸 힐데아를 제 뒤로 숨기고 싶어지는 것이라고.
‘집착.’
그가 느끼기에 황태자는 내면의 어딘가가 비틀린 사람이었다.
‘제멋대로의 기대.’
그리고 자신만의 어떤 기대를 품고 힐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는 위험한 인간이다.’
그 눈빛은 광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보통 저런 자들은 제 기대에서 상대가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돌아버리지.’
유독 어려 보이는 얼굴의 황태자가 빙긋 웃으면서 눈을 깜빡였다. 정확히는 힐데아 쪽을 향해서.
자신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나약한 생물이라는 것을 피력하듯.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전하.”
“혹시 벨키우스의 약혼녀가 힐데아 영애인가요?”
하지만 뒤이은 질문에 가브리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하.
가브리엘은 속으로 탄식했다.
황태자 벤자민이 순수하다고? 개소리. 지금 상황을 다 알면서 저렇게 찔러본 것이다.
왜냐하면.
“아니요, 전하.”
힐데아가 저렇게 대답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심한 목소리는 차갑기까지 했다.
‘……그래. 아니지.’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직접 그녀의 목소리로 들으니 가슴을 칼로 꿰뚫린 기분이었다.
가브리엘은 멍하니 힐데아의 차가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힐데아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 듯이.
“역시 그렇죠?”
“예, 전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경련했다. 황태자의 기묘하게 휘어진 눈이 그를 비웃었다.
이래도 나설래? 라는 듯.
가브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황태자는 신이 난 사람처럼 말했다.
“그러니 벨키우스 공작은 힐데아 영애의 보호자가 아니고, 행동을 간섭할 수는 없…….”
“하지만 전하.”
“?”
가브리엘이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이어진 힐데아의 대처였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가브리엘의 팔 위로 차분히 올렸다.
꼭 에스코트하는 파트너에게 팔짱을 끼듯이.
“……힐?”
가브리엘과 벤자민의 얼굴 위로 떠오른 희비의 감정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영, 애?”
힐데아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차가운 목소리로 건조하게 말했다.
가브리엘은 제게 닿은 그녀의 손만 보았다.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 같아서.
아니,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 손을 맞잡아주고 싶었다.
“벨키우스 공작님이 힐링턴의 약혼자인 것은 맞지요. 그리고 오늘 저를 위해 에스코트하는 수고를 해주셨으니, 저는 이제 파트너의 예의를 지키러 가고 싶습니다. 물러나길 허락해주신다면요.”
벤자민의 얼굴이 한순간 무너졌다. 배신감이 깃든 표정이기도 했다.
내가 아니라 가브리엘이라고?
그렇게 말하듯이.
힐데아는 치마를 한 손으로 살짝 잡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오늘의 대화는 무척 유익했어요. 제게 먼저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모쪼록 남은 연회의 첫날도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무례하지 않은 깔끔한 거절이었다. 여기서 더 잡으면 그것이 구차해질 정도로.
“……그래요.”
잠시 흔들리는 표정을 했던 황태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뒤로 물러났다.
빙긋 웃으면서.
“연회는 내일도 있으니까요. 우리 내일 또 봐요, 힐데아 영애.”
끝까지 마지막 미련은 버리지 않고.
*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황태자를 잡아먹을 듯이 구는 가브리엘의 태도도 충격적이었지만, 무려 전쟁 영웅인 벨키우스 공작을 앞에 두고도 차분하게 응수하는 벤자민 역시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리고 제일 불편한 것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자아도취에 걸린 것은 아니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하필 내 앞에서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그래서 대화의 맥을 끊어버렸다.
파트너의 관계를 이용해서 황태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가족들에게 다가가면 끝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바로 그 순간, 내가 손을 올리고 있던 가브리엘의 단단한 팔이 움직였다.
아, 이제 더는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긴 했다. 민망함에 입술을 깨물며 손을 거두려는 찰나.
‘!’
그가 내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그 친밀한 접촉에 나는 걷던 것을 멈춘 채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브리엘?’
그리고 날 내려다보는 조용한 보라색 눈을 마주쳤다.
이상하다.
고작 손을 잡은 것뿐인데.
“미안합니다. 하지만 힐데아, 당신이 손을…….”
왜 이렇게 심장이 아프지?
“떨고 계셔서.”
그는 변명이라도 하듯이 빠르게 대꾸했다. 내 시선을 피하며. 나도 맞잡은 우리의 손 쪽으로 눈을 내렸다.
으음, 그래.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팔에 올린 내 손의 떨림이 그에게 전해졌을 수도 있다.
단순히 그것뿐이다.
‘위로일 뿐이야. 아무 뜻도 없는. 그는 로제의 일에는 극단적으로 친절해지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로제의…… 언니고.’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떠올리면 바로 이 손을 놓는 게 옳았다.
로제가 보게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런데 가브리엘은 그렇다 치고 자석이라도 된 듯 딱 달라붙어 미동도 하지 않는 내 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난 집요할 정도로 내 손을 노려봤다.
“…….”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너, 알게 모르게 무슨 욕망이라도 품었니?
바로 그때, 그가 스치듯 물었다.
“황태자와 아는 사이셨습니까?”
“우연히 스쳤을 뿐이에요.”
“혹, 그가 혹시 무슨 협박이라도 했다면.”
“그런 것 아니었어요. 전하는 친절하셨으니까요. 다만 상황이 불편했을 뿐이지요.”
“……하지만 힐데아, 그는…….”
가브리엘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놓자.’
나는 꽉 잡힌 그 손만 바라봤다. 하지만 손가락이 말을 안 듣는다.
‘얼른 놓자.’
그렇다면 차라리 가브리엘에게 말을 해야 했다.
입이 뻐끔거렸다.
손을 잡을 필요는 없다고.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건 좀 이상하지 않냐고.
저기에 아빠와 로제가 있을 테니, 곧 떨림은 멈출 것이라고. 그러니 빨리.
내가 못 놓겠으니 당신이 놓으라고!
그렇게 확 고개를 들어 올리다, 어느새 다시 날 바라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
심장이 쿵 울렸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전혀 다른 의미로.
눈앞을 흐릿하게 만들었던 열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표정이…… 차가워.’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야.
가브리엘의 얼굴은 감정이 거세된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했다. 서글프게도 그건 내게 퍽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를 거북해하는 그 표정.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표정.
평소라면 얼마든지 참아넘길 수 있는 정도의 서러움이었는데,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왜 나를 그렇게 봐? 손은 당신이 먼저 잡아놓고.’
오늘 온종일 눈먼 시선에 두들겨 맞는 하루였기 때문일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감정이 넘을 것처럼 넘실거렸다. 아프고 서러웠다. 욱신거렸다.
로제와 너무 다르다고 비교하는 목소리들.
내 축언과 이능에 대해 불길하다고 이죽거리는 목소리들.
아비와 사이가 나쁜 것 같다고 추측하며 비웃던 목소리들.
사실 그런 것들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는 것들이었는데도 알게 모르게 쌓였던 모양이다.
‘아파. 그 목소리들보다도 이 순간이 더 서러운 것 같아.’
코끝이 찡했다.
‘이게 뭐라고.’
가브리엘이 나와 로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그것들을 모두 참고 지금까지 에스코트하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야 했다.
“싫, 으십니까? 그렇다면 손을…… 놓을까요.”
눈치도 없이 가브리엘이 물었다.
헛웃음이 났다. 누가 할 소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