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불편함의 이유, 가시 같은 감정 (2)
분이 치밀었다. 눈이 치켜 올라갔다.
나와 손이 닿는 것도 싫은 건 가브리엘, 사실 당신이 아닌가요?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고개를 확 치켜들어 원망을 담아 바라보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
“…….”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의 눈이 크게 흔들린 것이. 꼭,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그에게 일순간 떠올랐다.
‘지금.’
나는 가브리엘의 입술이 한차례 떨리는 것을 목격했다. 분명히.
‘내가 잘못 본 건가?’
바로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더 그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등장한 사람은.
“언니야?”
로제리엘이었다.
“!”
나는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팽개치듯 놓았다.
아차 싶을 정도로 무례하게.
‘아…….’
무어라 말하려 했던 가브리엘의 입이 꾹 다물린 것도 그 순간, 내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브리엘에게 바로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을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갸우뚱 고개를 흔들고 있는 로제리엘이 있었다.
어설픈 웃음이 입꼬리에 매달렸다가 기화되었다.
내 동생.
내 소중한 여동생.
‘내가 지금 무슨.’
불현듯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언니야, 저기 초콜릿 완전 맛있어. 같이 먹으러 갈래?”
해사하게 웃고 있는 로제의 얼굴이 망막을 때렸다.
욱신거리는 심장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고하는 것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 빠르게 뛰며.
알고 싶지 않아.
깨닫고 싶지 않아.
나는 처음 겪는 내 감정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
연회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난 가브리엘의 곁을 떠나 로제의 손에 이끌려 다녔다.
“부인들! 우리 언니 데려왔어요!”
로제가 처음 보는 사람들 속으로 쏙 들어가며 외쳤다. 기함할 무례였다. 분명 그랬으나.
“보세요, 힐다엘 백작 부인. 저희 언니예요! 제가 말씀드린 대로 우리 언니, 정말 예쁘지요? 이 자리에서 제일 예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황후 폐하께 실례가 되려나요?”
“어머나, 기어코 언니를 데려온 건가요, 로제리엘 영애?”
“네!”
뭐? 누구라고?
나는 속으로 소리 없이 경악했다.
힐다엘 백작 부인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데뷔탕트 준비를 하며 드레스를 맞추는 동안, 나는 나보다 사교계에 훨씬 밝은 마담 루뮈에로부터 여러 가지 조언을 들었다.
그 중, 힐다엘 백작 부인이 있었다.
‘영애가 사교계에서 편하게 지내려면, 힐다엘 백작 부인의 호감을 사는 것이 좋을 것이랍니다.’
‘왜죠?’
‘그녀는 돈이 많아요. 지위도 고귀하지요. 덕분에 황후도, 황제도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인사랍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죠.’
‘그게 뭔가요?’
정략결혼을 통해 백작 부인이 되었지만, 막강한 부를 거머쥔 대지주의 아내였다.
부부 사이도 연애 결혼을 한 것처럼 무척 좋다고.
‘눈치가 빨라요.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 곁에 다가온 자들을 아주 귀신같이 빨리 알아채지요.’
백작 부인은 이득을 노리고 다가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인간 불신에 걸려 있다고 했다.
황후파와 황제파로 나뉜 귀족들의 행태에 진저리를 내는 까다로운 인물이라는 정보도 있었고.
그래서 편으로 만들면 더없이 좋을 상대이지만, 그러기 제일 어려운 인물이라던 마담 루뮈에의 조언이 생각났다.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내 황당한 속도 모르는지 로제는 방글방글 웃었고, 백작 부인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휘었다.
“처음 뵙겠어요, 힐데아 영애. 후후, 정말 명랑한 동생을 두셨군요. 로제 영애는 종일 제 언니 이야기만 했답니다.”
“아…….”
나는 당황했지만, 얼른 예절을 갖춰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힐링턴의 힐데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그리고 이어지는 민망할 정도의 침묵. 더 나눌 대화가 없으니 당연했다.
그러자 로제를 보며 환히 웃어주던 그녀 곁의 귀부인들이 어색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날 바라봤다.
“…….”
“힐데아 영애는 조용하신 편이로군요. 우아한 태도에 무척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이에요.”
저 말은 대꾸 없이 입 다물고 있다고 질책하는 말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칭찬하는 말일까.
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아니야, 언니야.”
“……응? 뭐라고, 로제?”
로제리엘이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쏙 빼앗아 갔다. 나는 집에서나 할 행동에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고.
로제, 지금 뭐 하는 거니?
“이거 아니고, 저거 먹어 봐. 힐다 백작 부인이 강력 추천해주신 것인데 진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야.”
“어머!”
로제의 말에 귀부인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좋나요. 자매 사이가 왜 이렇게 좋은 건가요? 힐링턴은 복 받았군요.”
“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로제 옆에 멀뚱히 뺏긴 접시만 바라보고 있는데 아까보다 귀부인들의 눈이 훨씬 유해졌다.
이제 그 웃음은 내게도 향해졌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돌아온 호의에 얼떨떨해졌다.
로제. 너 인간 부적이니?
심지어 이번에는 다른 귀부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힐데아 영애도 아까까진 좀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로제 영애의 입담 앞에서는 쩔쩔매는 것 같군요.”
도도한 인상의 귀부인은 눈이 가늘었고, 나 못지않게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리고 눈가의 점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쉽게 대꾸하기 힘든 분위기였지만 로제리엘은 막강했다.
히히 하고 빙구 같은 웃음을 지은 내 동생은 능청맞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화답한 것이다.
“엥, 쩔쩔매는 게 아니에요, 시오넬 후작 부인. 언니는 절 너무 사랑하는 거라서요. 그렇지, 언니야?”
또랑또랑한 눈을 보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귀부인들이 치즈 하나에 몰린 고양이들처럼 일제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로제를 바라봤기 때문에.
이 자리 좀 부담스러운데……?
“그, 렇긴 한데 로제.”
나는 대꾸를 하다 더 경악할 만한 것을 깨달았다.
지금 말을 건 귀부인이 아까 황녀의 뒤를 따르던 영애들 중 하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더구나 그 옆에서 서로 눈 마주치면 노려보다가 로제를 보며 푸근하게 미소 짓는 다른 귀부인들은 황후의 측근이라는 것까지.
‘와, 역시 로제.’
이 모든 정보는 만약을 대비하여 마담 루뮈에에게 주요 귀족들의 인상착의와 특징을 듣고 외운 것이었다.
그랬는데, 내가 필사적으로 준비한 것들은 로제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용이 없으니까.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앞에서는.
지지세력이 누구든지 로제를 보며 웃을 수밖에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불현듯, 내 주변을 바라보다 깨달았다.
내가 서 있던 연회장과 로제의 옆에 서 있는 지금의 연회장이 같은 공간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걸.
‘사랑스러운 로제.’
로제는 멋쩍다는 듯이 웃다가 명랑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어머,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우리 언니가 이렇게 똑똑…….”
그러면서도 나랑 팔짱을 낀 채 나도 대화에 이끌려는 친절이 똑똑히 보였다.
그 호의에 가슴이 지끈했다.
‘무척 사랑스러운. 나도 아낌없이 사랑하는 내 여동생. 나도 사랑하는…….’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만약 내가 했다면 손가락질받았을지도 모르는 행동은 로제리엘이 했을 땐 귀여운 소녀를 바라보는 웃음으로 치환됐다.
가브리엘은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지만, 아빠도 그리고 주변의 귀족들도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모두가 로제를 보며 웃고 있었다. 모두가.
‘이상하다.’
저들 못지않게 나도 로제를 아끼고 사랑했다.
내 우울할 뻔했던 어린 시절을 구원해준 로제의 작은 손을 똑똑히 기억하니까.
지금도 날 보며 환히 웃고 있는 눈에는 순진함이 가득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고, 항상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로제.
한 번도 로제를 질투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도 로제를 향해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데 가슴이 뻥 뚫린 듯 휑했다.
‘정말 이상하다.’
배가 고픈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픈 건가?’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는데, 재잘거리던 로제가 내 입에 무언가를 쏙 넣어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눈을 휘며 웃는다. 어쩐지 로제를 보며 웃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도 향했다.
나는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이, 게 뭐야?”
“응. 이것도.”
“……로제, 잠깐.”
“다 먹었어? 그럼 이것도.”
그렇게 로제가 아기새 먹이 먹이듯 내게 몇 번이나 음식을 주길 반복하자, 서먹하게 날 바라보는 귀부인들은 더 이상 주변에 없었다.
그녀들은 내게도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
그건 나와 우연히 시선을 마주친 아빠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면서 기분은 더욱 추락했다.
아빠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놓치기까지 했다. 평생 사교계 예절에 질릴 대로 질려 있을 그 아빠가.
파트너의 일로 아빠가 내게 미안해하는 것 같다 느낀 것도 부끄러운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으.’
나는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에.
노래하듯 말하는 로제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침묵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