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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52화 (52/155)

52화. 엿듣고 싶지 않았어요 (1)

“이곳이 힐데아 폰 힐링턴 영애께 배정된 침실이랍니다.”

나는 지금 어둑해진 황궁의 복도를 황궁 시녀의 안내에 따라 걷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어떤 방 앞에 시녀가 멈추어 문을 열었다.

화려한 금색의 잎들이 세공된 문은 꽤 웅장했다.

“부르실 일이 있으면 침실 옆의 종을 흔드시면 됩니다. 가문의 전속 시녀들을 데리고 오지 못해 불편하시겠지만, 황궁의 경비를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이니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무척 넓고 좋은 방이군요. 황궁에서 힐링턴에 보여주신 배려에 감사드려요.”

의례적인 말을 하며 나는 방을 응시했다. 특히, 사람 다섯이 굴러도 넉넉할 것 같은 사이즈의 침대를 보며 생각했다.

‘사치의 끝판왕.’

역시 황궁은 황궁이구나.

‘구석 골방을 주지 않을까도 상상했었는데.’

벤자민과 어울리는 바람에 황후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을 테니, 방 배정을 하는 것에도 압박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황후가 그 정도로 치졸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대로 그냥 넘어가려는 것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내심 안심이 되었다.

“바로 쉬어도 될까요?”

“당연하지요, 힐링턴 영애.”

다리가 아파 침대에 가서 앉으니,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황궁 시녀가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황궁 시녀들이 항시 대기 중이니 시간 상관없이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목욕 준비와 함께 실내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옷시중을 들러 시녀들이 들어올 겁니다.”

“알겠어요.”

“……가볍게 요기할 음식이 필요하시면 전달해주시면 되시고요. 더 설명을 원하시는 것이 있으실까요?”

나는 의미 없이 치맛단의 레이스 장식을 매만지며 물었다.

“제 동생, 로제리엘의 방은 이 방과 먼가요?”

“아닙니다. 복도를 한 바퀴 돌아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이 로제리엘 폰 힐링턴 영애께서 머무시는 방입니다. 혹시 힐링턴 공작 각하의 방도 안내드릴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빠의 방 위치, 황궁의 조심해야 할 것들.

항상 황궁 근위기사들이 돌고 있어서 조심해야 하는 통금 시간, 그런 것들을 빠르게 주워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은 하나같이 빡빡해서 이곳에서 살면 참으로 머리 아프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차와 함께 가문에서 챙겨오신 짐들을 정리해두었으니 확인해보셔요. 그럼 바로 옷 시중과 목욕 준비를 도와드려도 될까요?”

“부탁할게요.”

그 말과 함께 종이 울렸고, 우르르 몰려들어오는 황궁 시녀들에게 몸을 맡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연회 첫날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으니까.

*

가브리엘은 짜증을 숨기지 않고 목을 조이는 크라바트를 집어던지다시피 했다.

평민 출신이라 연회장에 참가하진 못한 채 대기하고 있던 부관, 디안은 그 태도에 속으로 혀를 찼다.

“왜 그러십니까, 주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세요. 에스코트에 제대로 실패하신 건, 아니지, 혹시 또 평상시처럼 얼음처럼 굳어 계셨던 건 아니겠죠?”

가브리엘의 눈썹이 사납게 씰룩였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던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치고, 손도 잡았지.

그렇게 생각하니 막판에 로제리엘 때문에 엉켰던 속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힐데아의 붉은 눈과 목에 걸려 있던 붉은 목걸이.

귀족들 모두가 한 번씩 그것을 보며 떠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가브리엘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그러나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그리고 지켜보던 디안은 혀를 씹은 것 같은 표정을 하며 몸서리를 쳤다.

잘생겨도 주군의 저런 얼굴은 면역이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결혼시켜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벤자민 황태자가 문제다.”

“네? 황녀나, 황제가 아니라요?”

“그래. 황태자, 벤자민. 힐데아와 아는 사이인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디안은 고개를 기울이며 연신 중얼거렸다. 정말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가브리엘이 알면 짜증을 낼 만한 것이겠지만 힐데아나 황태자나 둘 다 사교성이 0에 가깝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힐데아가 제 동생 외엔 누구도 곁에 두지 않고 친근하게 교류하는 또래 친구도 없는 것처럼, 황태자 역시 황후 데자이아의 치맛폭에 감싸여 제 기사들이나 측근들을 제외하면 어울리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둘이라고?

“자세히 알아봐라.”

“두 분이 어디서 만났는지를요?”

“아니.”

“그러면 무엇을 조사하란 말씀,”

“황태자,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라. 뭔가 걸려.”

가브리엘의 서늘한 목소리에 장난스럽게 대꾸하고 있었던 디안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서렸다.

그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고, 지금 저 얼굴이 단순히 질투에 눈이 먼 사내의 얼굴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혹시 황태자에게 무슨 의심스러운 점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위험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특히.”

힐데아를 바라보는 그 눈이.

그렇게 중얼거린 가브리엘은 피곤하다는 듯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다 멈칫하며 제 손을 들여다봤다. 다시 발그레해지는 뺨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뻔히 보였다.

“주군, 명령은 이행하겠습니다만 자꾸 힐데아 영애와 손잡았던 기억을 반추하실 거라면 저 좀 나가서 편히 쉬어도 될까요? 주군은 화려한 연회장에서 즐겁게 식사하고 대화 나누고 힐데아 영애를 수십 번 보고 오셨겠지만 저는 이 아무것도 없이 쓸데없이 사치스러운 방에 앉아서 주군 계속 기다려야 했…….”

가브리엘은 손을 들었다.

저 빌어먹을 수다쟁이.

그는 서늘하게 대꾸했다.

“좋다. 나가.”

디안이 꼬리 달린 강아지처럼 희색이 만연한 얼굴을 했다.

“시간도 늦었으니 저 씻고 일찍 잘 거예요. 그러니 외롭고 쓸쓸하고 힐데아 영애가 막 보고 싶어서 짝사랑에 심장이 아파도 저 부르시면 안 됩니다, 주군? 꿈나라로 일찍 들어갈 거니까요.”

“디안.”

능청스러운 말에 가브리엘은 이를 부득 갈았다.

“부를 일, 없으니, 당장, 나가.”

“네!”

주군의 싸늘한 축객령에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른 디안이 나갔을 때, 열린 창문 틈으로 무언가가 굴러들어왔다.

가브리엘은 서늘한 눈으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건 누군가의 글이 담긴 작은 메모였다.

-밤 1시. 정원에서 우리 좀 보죠?

조각 같은 미남자의 얼굴이 구겨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

나는 불현듯 잠에서 깼다.

낯선 곳에서 잠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억나지 않는 악몽이라도 꾼 것인지 번쩍 눈을 떴을 때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깜빡이며 복잡한 문양의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곳이 황궁이며, 데뷔탕트를 치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을 때,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문을 통해 비쳤다.

불행히도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황궁 시녀가 경고하듯 붙였던 설명이 떠올랐다. 황궁의 정원은 무척 아름다워 구경하기 좋지만, 통금 시간이 지난 이후에 돌아다니는 것은 삼가 달라고 했던.

‘하지만.’

속이 답답했다.

보통 이럴 땐, 내 이능을 풀어내며 무럭무럭 자라는 식물들을 보며 응어리를 풀어내곤 했다.

그럼 스트레스가 풀린단 말이야.

아니면 운동을 하거나. 근데 여기서 운동을 할 수도 없고.

‘역시 안 되겠다.’

치열하게 고민하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숄을 집어들고 천천히 방문을 열어 목적지인 황궁의 정원을 향해 움직였다.

설마 이 늦은 시간에 거기에서 누굴 마주치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

역시 깊은 밤이어서 그런지, 정원은 고요했다. 흘러내리는 숄을 잡아 올리면서 손을 뻗었다.

이능을 사용하는 감각은 보이지 않는 손이나 발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 꽃을 자라게 하고 싶다. 활짝 피게 하고 싶다. 그러면 이렇게.

“……예쁘네.”

활짝 피어난 꽃은 유독 싱싱하고 반짝거렸다.

꽃과 식물에는 여전히 특별한 관심은 없었지만 이능을 퍼부은 것들에게는 유독 시선이 갔다.

특히 이 꽃은.

‘가브리엘의 눈과 같은 색이네.’

꽃잎의 끝부분은 흰색에 가까웠지만 가운데로 갈수록 진한 보라색으로 퍼지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어설프게 웃음을 짓고 있다가 입술에 힘을 주었다.

어째서인지 감각은 손으로 옮겨갔다.

‘힐데아.’

그렇게 부르면서 바라보던 남자.

낯설고 멀기만 했던 사람.

그런데도 한 번씩, 이렇게, 불현듯 생각하게 되는 이름.

아직도 누군가의 손이 얽혀 있는 것 같은 감각에 목덜미가 빳빳해졌다.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식은땀에 젖어 깼었던 꿈속에는 분명 그 남자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렇게 심장이 욱신거리는 걸지도 몰라. 요즘 가브리엘만 생각하면 부정맥이라도 걸린 것처럼 이렇게 욱신.

“……내가 왜 여기서 봐야 합니까?”

그래. 저렇게 가끔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도 한…….

“그럼 어디서 봐요, 이 황궁 넓은 데서? 괜히 편지라도 오가다가 무슨 오해를 받으려구?”

익숙하게 들려오는 두 개의 목소리에 나는 동상처럼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터질 것처럼 뛰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동그랗게 장식되어 잘린 나무 뒤로 몸을 웅크리고 숨은 뒤였다.

숨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을 손으로 막은 채로.

‘내가 왜 숨었지?’

차라리 그냥 나갈 것을.

아니면 빨리 자리라도 피했어야 했는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멀리서 들려왔던 목소리가 더욱 가깝고 선명해졌다.

확실했다. 음성의 주인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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