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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53화 (53/155)

53화. 엿듣고 싶지 않았어요 (2)

“그래서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제리엘 영애.”

“뭐긴요, 하나밖에 더 있어요, 우리 사이에?”

가브리엘과 로제리엘이었다.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그리고 이런 조용한 시간에 왜 이런 곳에서 만나야 하는 것인지는 떠올려 보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 속이 서늘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날 수가 없어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귀를 막았다.

엿듣지 않기라도 바랐기 때문에.

제발 로제, 네 약혼자 데리고 저리 좀 가줘. 응?

내 간절한 소원과는 달리 야속하게도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인지 드문드문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렇…… 좋아요?”

로제의 목소리.

“네, 좋습니다.”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화답하는 가브리엘의 음성.

그 안에 담겨 있는 녹을 듯한 애정에 다시 한번 심장이 지끈하고 울렸다.

‘그냥 나가버려?’

나도 알고 있었다. 둘이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나도 들키면 안 될 곳에 있던 것도 아니다. 바로 나갔으면 한순간의 해프닝으로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다.

조용히 손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죽이고 조각처럼 들려오는 단어들을 흘려보냈다.

고백, 첫 춤, 좋아서, 심장이, 손, 목걸이, 그리고 청혼…….

아, 청혼.

가브리엘이 혹시 로제에게 드디어 청혼을 하려는 건가?

‘원작보다 진행이 빠르네.’

그야 <영애는 달콤하다>보다 훨씬 빨리 만났고, 더 많은 교류를 했으니 당연한 일일까.

생각이 빠르게 흘렀다. 이 시원섭섭한 것 같은 감정은 누구에게 느끼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깨물며 저릿해지는 다리를 꾹 찔렀을 때였다.

“됐네요.”

“알겠습니다.”

갑자기 둘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귀를 쫑긋 세웠는데, 누가 봐도 둘의 대화는 순식간에 끝난 것 같은 모양새였다.

‘벌써?’

연인이잖아.

‘그런데 이게 다라고?’

누가 보면 이제 호감을 주고받는 연인이 아니라, 몰래 무언가를 거래하는 사람들처럼 보일 정도였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눈가가 뜨끈한 와중에도 영 이상해서 고개를 조심히 들어 올려 바라봤다.

“?”

그런데 정말이었다.

어느새 둘은 무언가를 주고받은 뒤 깔끔하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둘 다 걸음이 얼마나 재빠른 것인지 한참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뭐야, 진짜?’

어쨌든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를 풀러 왔는데 스트레스만 더 얹어서 가게 생겼다는 것이다.

동시에 연회장에서 내내 느꼈던 내 감정에 대한 불안도 함께 돌덩이처럼 얹혔다.

나답지 않았다.

로제를 순수하게 웃으면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가브리엘과 로제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

연회 이틀째.

“흠흠,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영애.”

“저어, 괜찮으시다면…….”

“저도 좋습니다!”

“어, 어머나.”

곳곳에서 비슷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수줍은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고, 그것을 맞잡는 풍경.

조용하고 격식 있게 지나갔던 연회의 첫 번째 날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한껏 꾸미고 나온 갓 데뷔한 영애와 영식들은 뺨에 발긋한 홍조를 드리우고 있었고, 자신과 첫 춤을 추길 바라는 상대에게 눈빛을 은밀히 보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달아올라 있는 공기를 느끼면서 귀부인과 신사들은 어리고 풋풋한 이들의 귀여운 춤곡이 펼쳐지도록 홀을 비워주었다.

그리하여 2층과 3층은 부모 세대들이나 기혼자들이 자리를 잡았고, 넓은 홀에는 갓 데뷔한 이들답게 밝고 화사한, 리본과 보석이 돋보이는 옷들을 입은 영애와 빳빳한 자세를 한 영식들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은근한 춤곡이 흐른 것도 그 순간이었다.

첫날처럼 웅장하게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외침은 없었기에 황족들의 입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누가 누구인지는 서로 간의 간략한 인사와 함께 마음이 맞으면 손을 잡고 홀로 나가 춤을 추면 그만이었다.

단, 이 홀의 첫 번째를 장식할 첫 춤은 예외로.

모두가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이 자리를 빛낼 수 있는 누군가가 나서 첫 춤을 장식해주기를.

아마도 대부분은 둘 중 하나를 예상했다.

황족이거나, 아니면 사교계를 한껏 달아오르게 만든 전쟁 영웅 가브리엘이거나.

동시에 황제파나 황후파의 귀족들 모두 첫 춤의 끈을 가브리엘이 시작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 때문일까.

색색의 드레스들 사이로도 홀연히 눈에 띄는 백금발의 남자.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트너 없이 입장한 그,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를.

“왜 힐링턴의 영애들과 함께하지 않으신 걸까요?”

“혹시 정말 어쩔 수 없이 형식만 갖추기 위해 같이 입장하셨던 것일지도 모르죠! 어제는 의례적인 날이었고, 오늘이 진짜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힐데아 폰 힐링턴의 목걸이가…….”

“그건 겨우 고리타분한 옛 관습이잖아요. 아아, 날 선택해주셨으면.”

넓은 어깨와 대조되듯 잘록한 허리, 길쭉한 팔다리와 몸에 달라붙듯 유려한 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연회복이 아름다운 뒷모습.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영애들은 전쟁 영웅이 자신을 첫 춤곡의 파트너로 선택하지 않을까 몽롱한 시선을 하며 잠시간 환상과도 같은 꿈을 꾸었다.

바로 그 순간.

빛나는 황금 조각상 같았던 전쟁 영웅의 곁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우아하게 다가갔다.

길게 늘어지는 드레스의 끝자락이 꼭 인어의 꼬리 같았다.

다가선 여인은 우아하게 입술에 호선을 걸며 말했다.

“벨키우스 공작.”

사람들은 생각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 두고도 참 끔찍하게 냉정한 얼굴이라고.

그 이목구비가 앞에 선 여인 못지않게 화려하여 더 서늘해서 유독 돋보였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이 어떤 신분인지 생각한다면 대단히 오만할 수 있는 태도였다.

그 여인은, 황녀 라피이아였으니까.

그녀가 천천히 가브리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꼭…….

제 기사에게 손등의 입맞춤을 하라 허락하는 고귀한 레이디 같은 모습이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가브리엘이 저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냉정하게 내칠 것인가?

*

아악, 늦었다!

어제 잠옷 끝이 이슬에 젖을 정도로 정원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잠을 설친 덕분이었다.

난감한 얼굴로 나를 깨우던 황궁 시녀들의 낯을 보고 얼마나 당황했던지!

‘주책이야, 정말.’

그래도 황궁의 시녀 언니들은 프로의 정신으로 탓하는 기색 하나 없이 친절하게 나를 도와주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장식할 차례에 빗질하고 있던 시녀 언니가 어제의 헤어핀을 꺼내며 물었다.

“이것을 착용하실 건가요, 영애?”

가브리엘이 준 것이었다.

심장이 싸해졌다.

나는 생각보다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 아니.

“아뇨.”

“어, 하지만 영애. 듣기로는 이것은…….”

“그것 말고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하죠.”

당분간 심장의 안정과 심신의 평화를 위해 가브리엘과 로제의 사이를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아, 그 목걸이도 치워주세요.”

“네?”

어째서인지 시녀 언니들이 놀란 듯한 표정을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시 한번 정중히 부탁했다.

“그것은 할 생각이 없어요.”

“정말, 괜찮으신가요?”

“……?”

“그.”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무는 모습들이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다른 보석함을 가리켰다.

“목걸이를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은 드레스이니, 귀걸이만 할게요. 그 보석함을 열어주세요. 네, 드레스의 색이 분홍색이니, 거기 있는 다이아몬드 귀걸이로 하는 게 좋겠어요.”

“……아, 네. 네. 죄송합니다. 얼른 도와드릴게요, 영애.”

대체 뭐지?

내 목걸이가 뭐.

어쩐지 충격받아 보이는 것 같은 그녀들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저, 영애?”

어제 내게 방 안내를 해주었던, 아마도 이들 중에 가장 상급 시녀로 보이는 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밖에 힐링턴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데 어떻게 할까요?”

나는 깜짝 놀라 시선을 던졌고, 문틈으로 경직된 아빠의 옆모습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진짜잖아.

“아버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먼저 가셨을 줄 알았는데.’

가족들에게는 완벽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어제도 로제에게 도움만 받고.

아, 속상해.

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 날 바라보려는 아빠의 시선을 이번에는 내 쪽에서 피했다.

어쩐지 뒤에서 누군가의 다급해진 숨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저기엔 아빠밖에 없으니 잘못 들은 소리일 것이다.

난 되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시녀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버지께 먼저 출발하시라 전해주겠어요? 저는 아직 준비할 것이 있다고요.”

비록 내가 듣기에도 냉담한 목소리로 들려 퍽 서글펐지만.

아마 아빠는 그렇게 불편해했으면서도 날 에스코트하러 온 터였다.

내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로제는 원래대로 가브리엘과 함께 입장했을 테니까.

아직도 어제 연회장에서 내 시선을 피하던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가시처럼 따갑게 떠올랐다.

‘지금은 좀 그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불편한 티를 낼 바엔 잠시 피하는 것이 더 낫다.

아빠한테도, 나한테도.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황궁 시녀가 무어라 전하는 모습을 보며 차마 아빠의 얼굴을 마주하진 못했다.

잠시 뒤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닫혔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제는 지금 연회장이겠지?’

벌써 가브리엘과 같이 들어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첫 춤에 대해 뭐라고 둘이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

‘내가 눈치가 없었지.’

더 강하게 거절했어야 했는데.

얼굴로 열이 몰렸다.

그것도 모르게 어제 그렇게 손을 잡고 돌아다녔으니, 가브리엘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랬다면 로제가 제 언니 위한답시고 어제 그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굳이 가브리엘과 그렇게 가깝게 서서, 그렇게.

‘손을 잡은 일도 없었을 거야.’

불청객이 되어 둘 사이에 낀 것이라 이렇게 기분이 찝찝했던 게 분명해.

쿡쿡 쑤시던 통증은 사실 양심의 가책이었던 거야.

아무렴.

그렇게 정신없이 옷을 갖춰 입고, 치장을 맞춰 시녀를 따라 연회장으로 향하려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영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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