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죄송하지만, 그 시월드에 낄 생각 없는걸요?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자연스럽게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서늘한 안색으로 서 있는 한 남자.
‘모르는 사람인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려한 장식이 달린 의복.
현란할 정도의 문양이 저거 하나 만들려면 장인들이 죽어 나갔다 싶겠다 탄식했던 옷.
그러니까 어제 연회장에서 질리게 봤던 것. 바로…….
‘황궁 기사 정복이잖아?’
내 얼굴은 아마 희게 질렸을 것이다. 아니, 긴장할 때 특유의 버릇대로 살벌하게 굳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영애, 바쁘신 와중 불쾌하신 것은 알겠습니다만, 급한 용건입니다.”
그 영애가 다른 영애는 아니겠지.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기사는 날 똑바로 바라봤다.
그 당당한 태도를 보아하니 사람을 잘못 찾아온 건 아니라는 소리인데. 날 왜?
“누구시죠? 이렇게 가로막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해주시는 것이 먼저 아닌가 싶습니다.”
내뱉는 말은 절로 날카로웠다.
그제야 기사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건 실례했습니다. 저는 황궁의 기사입니다.”
“그것만으로 설명이 충분하진 않군요. 제가 황궁의 기사분과 이러고 있을 이유는 더더욱 없으니까요.”
“지금 당장 영애를 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 말인가요?”
이렇게 드레스를 쫙 빼입고 당장 연회장으로 뛰어가려는 나를?
그런 뜻으로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봤지만, 기사는 얼굴에 철판을 깐 모양이었다.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예. 기다리고 계시니 이대로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심각하게 불길했다.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뛰었다.
황궁의 기사를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연회에 앞서 공작가의 영애를 사람을 시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냐 되겠냐고.
그 무례한 명령을 전달하면서 이름 모를 황궁 기사가 공작 영애에게 당당할 정도의 높으신 분이라면.
‘제발. 이런 전개 사양이에요. 내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다고.’
나는 느리게 대꾸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조금 전에 아빠를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나? 아아, 내 발등을 내가 찍은 기분이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연회장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늦었거든요. 보시다시피 저도 데뷔탕트를 치르는…….”
“그건 괜찮으실 겁니다. 아직 제대로 연회는 시작하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내 항의는 먹히지 않았고, 기사를 뒤따라야 했다.
불행히도 알 것 같았다.
날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
‘역시.’
그래, 이럴 줄 알았어.
날 쏘아보듯 하는 눈을 보며 순식간에 서러워졌다.
어제 연회장에서 날 쏘아보는 눈빛이 레이저 빔 저리가라로 살벌했을 때부터 조심했어야 했는데.
참담한 심정을 삼키며 대꾸했다.
“……황후 폐하.”
“그래요, 힐데아 영애.”
황후, 데자이아는 우아한 태도로 손에 든 부채를 살랑이며 나를 향해 눈을 휘었다.
가시처럼 따가운 시선이라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줄행랑을 놓고 싶어지는 시선이었다.
왜 저를 그렇게 가자미 눈으로 노려보실까요, 황후 폐하. 저는 여주인공의 존재감 없는 언니일 뿐인데요…….
“어제에 이어 또 보는군요.”
그야 당연하죠.
당신이 불렀잖아.
속으로는 투덜거렸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못했다.
나는 뼛속에 남도록 연습한 궁정 예절 그대로 치맛자락을 잡고 몸을 살짝 숙였다.
“제국의 영원한 달을 뵙습니다, 황후 폐하. 인사가 늦은 것을 용서해주세요. 부르신 분이 황후 폐하인지 몰라, 놀라는 바람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당황하긴 했겠지.”
“네, 연회장에 늦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돌려보내 주세요.
“……후후. 어차피 일찍 가봐야 춤이나 출 텐데. 앞으로 영애는 질리게 춤을 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그 질리게 될 춤을 간절히 추고 싶었다.
정말로.
“하지만…… 좋아요. 길게 시간은 뺏지 않을게요.”
느리게 입술을 올린 황후는 상냥하지 않은 말투로 자기 멋대로 말했다.
“앉을 시간은 따로 없을 테니 그대로 서서 듣도록 해요, 힐링턴 공작 영애.”
원래 앉을 생각도 없었는데.
“……예, 폐하.”
어쨌든 곰 앞에서도 시선을 피하면 안 되는 것이랬다.
나는 야생 동물을 앞에 둔 마음가짐으로 황후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피하는 대로 뭐라고 할 것 같았으니까.
“그대를 부른 이유는 두 가지.”
두 가지나 된다고요?
지금 이 순간, 어디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것 같은 내 동생, 로제가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황후는 내가 아니라 로제가 상대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라.
원작이 순한 맛이었던 것은 누구나 사랑하는 로제가 여주인공이었기 때문일 테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황후의 앞에 서 있는 건 나였고, 아마도 내 앞의 황후는 <영애는 달콤하다> 속에 나오는 황후보다 몇백은 더 매운맛인 것 같았다.
‘설마 여기서 갑자기 물 싸대기를 때리진 않겠지.’
난 우울한 시선으로 황후 주변에 물컵이 없는지 살폈다.
응, 없고. 그건 다행이다.
“첫째는 영애를 칭찬하고 싶어서예요.”
네? 뭐라고요?
나는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눈을 깜빡였으나, 황후는 농담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정말 황후가 날 칭찬해? 왜?
그녀는 마음에 든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역시 차분하고 침착하네요.”
누가요. 제가요?
“쓸데없이 시끄럽게 구는 자들보다 훨씬 무게감 있고 좋군요.”
무게감이요……?
“그래서 유독 시선이 갔지요. 다른 이들은 다 그대의 쌍둥이 동생, 로제리엘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나는 달랐어요.”
설마 내 표정이 황후의 어그로를 끌었단 말인가?
나는 아까보다 백배는 우울해졌다. 어제부터 다들 나한테 왜 이러지?
“주변에서 제법 눈치를 주었을 텐데도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그 기고만장한 황녀를 상대할 때는 감탄했답니다. 그 배짱.”
와아……. 돌겠구나.
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지금 나라는 것을 도무지 믿기가 힘들었다.
어제 이해할 수 없는 괴로운 감정 속에서 허덕거릴 때, 누군가는 나를 저렇게 보고 있었다는 것이 꽤 충격이었다.
‘황녀와 뭘, 당당히 해.’
내 기억 속의 나는 황녀 라피이아의 살벌한 기세 앞에서 겁먹은 것을 숨기려고 필사적으로 얼굴에 힘을 준 기억밖에 없는데.
볼품없게 보이지 않았다면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하지만.
‘잠깐. 칭찬하는 이유가…….’
그 순간 헉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보통의 영애가 무려 황후 폐하가 불러 저런 칭찬을 내뱉는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섬뜩하기만 했지만, 작정하고 웃어 보이는 데자이아는 퍽 자애로워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영애라면 감동해서 황후 폐하를 위해 내가 뭐라도 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황후가 그런 것을 노리는 것이라면.
설마 내가, 황녀와 황제를 상대해주는 패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나는 소리 없이 절망했다.
어째서인지 내 동생을 괴롭힐 악역의 호의를 왕창 얻게 되어버린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대를 부른 두 번째 이유는.”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미친 척 문을 열고 확 도망가버릴까. 기사가 막으면 하이힐로 정강이를 때리는 거지.
내 치열한 속을 알 수 없는 황후는 자못 온화한 눈빛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 아들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결국 그 화제가 나왔구나.
당근을 던졌으니 뒤에는 채찍인 것일까?
나는 황후가 어떤 독한 말을 내뱉을지 모른다는 것을 각오했다.
그리고 역시 황후의 뒷말은 꽤 날카로웠다.
“그대를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하여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죠. 솔직히 거슬렸답니다. 나는 분명히 말했거든.”
“…….”
“벨키우스가 거슬리니 힐링턴의 두 아가씨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라고요. 그런데 내 착한 아들이 영애 때문에 이 어미의 명령을 거부한 거예요. 어떤 기분이었을까?”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이런 상황에서 대꾸할 말은…….
소중한 아드님을 손수건 하나로 유혹해서 죄송합니다?
아니면 아드님이 어떤 영애와 이야기만 나누면 다 반했다고 생각하려면 아드님에게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 같은데요, 어머님?
‘둘 다 입 밖으로 내뱉으면 난 여기 갇혀 죽을지도 몰라.’
너무 당황해서일까.
우리 로제가 떠올렸을 법한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릴 정도로 나는 순간 머리가 백지처럼 변한 상태였다.
“응? 말해 봐요, 영애.”
황후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니 그냥 입술만 파르르 떨렸다.
나는 잘 알았다.
아무리 내가 힐링턴 공작가의 공녀라도, 황후가 마음만 먹으면 홀로 고립된 상태인 날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폐하, 저는…….”
“아, 한 가지 더.”
“예?”
그런데 어떤 변명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황후가 갑자기 내 말을 끊어냈다.
“처음엔 호되게 모욕하려고 부르려던 것이 맞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어. 뭘까요?”
제법 온화해진 어조라, 나는 얼떨떨하게 우아한 얼굴의 여자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더 진해졌다.
“언제, 왜 내 생각이 바뀌었는지 맞혀봐요.”
아뇨, 아뇨, 아뇨.
저는 하나도 안 궁금한데요.
그리고 아무 생각 안 바뀌셔도 되는데.
저는 황태자 전하께 모래 알갱이만큼의 흑심도 품고 있지 않으니까요.
목구멍까지 그런 말이 튀어나오려 했다. 하나도 내뱉지 못했지만.
“죄송하나 제가 미흡하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
“그대의 축언을 들었을 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