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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55화 (55/155)

55화. 연회의 꽃은 춤 (1)

나는 호흡을 멈췄다. 왜 축언이 나와.

“그때 바뀌었답니다.”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그 순간이었다.

붉게 칠한 황후의 입술이 어지러울 정도로 선명했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머리채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

놀라서 호흡을 멈추었다. 하지만 할퀼 듯이 다가온 손톱은 내 흐트러진 머리카락 하나를 정리하며 내려갔다.

“가엾은 힐데아 영애.”

심장이 쿵 떨어진 것도 그 순간이다. 손가락이 탁 튀었다.

지금.

“하아,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나요?”

지금 황후가 나한테 뭐라고 했지? 가엾다고? 누가. 내가?

“폐하.”

한껏 낮아진 내 목소리에도 황후는 내 어깨를 인자하게 토닥거리기까지 했다. 하아?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요, 힐데아 영애. 어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답니다. 당신이 힐링턴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요. 가엾기도 하지.”

취급? 내가 무슨 취급을 당했다고.

“아비의 시선이 두 딸에게 그리도 다를 줄이야.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역시 당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

“듣기로는 로제리엘과 그리도 애틋한 사이라고 하던걸. 12년 동안 끊이지 않고 선물과 편지를 보냈다죠? 사람을 기만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저 바들바들 떨기만 했던 상대에 대해 뜨거운 반발이 일어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욕해도.

내 가족은 욕하지 말았어야지.

내가 왜 버티고 있는데.

마음이 서늘해졌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턱관절에 힘도 꽈악 들어갔다.

“만약 그렇다면 제게 무엇을 제안하시려 하는 것인가요?”

“오, 그래요. 그게 중요하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황후가 제 마음대로 떠들었다.

“내 쪽은 다를 거예요. 축언과 이능 따위, 걱정하지 말아요. 공작가의 영애라는 위치보다, 근사한 축언의 소유자보다 더 근사한 것들이 세상엔 많으니까. 후후, 가문에 얽매일 필요 없어요. 영애는 그저, 작은 것 하나만 해주면 돼.”

“…….”

순간 입술이 비틀릴 뻔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저 여자의 말은 지금 너를 차별하는 것 같은 공작가의 손을 놓고, 널 위해줄 수 있는 내 손을 잡으라. 이 뜻이 아닌가.

왜. 힐링턴이 어쨌든 황제에게 충성하는 가문이기 때문에?

‘날 얻어서.’

힐링턴을 무너뜨리려고?

내 동생 로제가, 아빠가 있는 가문을?

자그마했던 분노가 활화산처럼 커진 것은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바들바들 떨며 웅크리고 있던 마음이 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하면 굳어버리는 얼굴 탓에 본의 아니게 오만하고 도도한 척하는 것은 내 특기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내 의지로, 내가 끊임없이 배워왔던 모든 예절을 닮아 황후를 차갑게 응시했다.

“죄송하지만 황후 폐하, 무언가를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뭐?”

데자이아의 얼굴이 설핏 굳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저는 가문을 배신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교육을 잘 받아 그렇게 막돼먹진 않았습니다.”

“……뭐라?”

황후의 눈썹이 사정없이 씰룩였다. 당장 버럭 화를 내도 모자랄 것처럼 보였다.

“제게 무엇을 바라시고 이곳까지 부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작은 일을 제가 할 일이 없을뿐더러.”

그래도 무례하다는 이유로 따귀를 맞기는 싫었고, 황후를 상대로 맞따귀를 때릴 수도 없으니 한걸음 안전하게 더 물러났다.

“언급하신 이유 중에 그 어떤 것도 제가 가문을 등지는 일이 되지는 않을 거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깊게 심호흡을 한 황후가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

“힐데아, 폰, 힐링턴 영애.”

“예, 폐하.”

“내가 지금 어떤 호의를 갖고 그대를 불렀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아니요, 압니다. 너무 잘 알지요. 황후 폐하께서 은밀히 공작 영애를 이렇게 불러 뜻을 비추신다는 일이 쉽게 올 기회가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만, 폐하.”

내 뺨은 소중해.

“절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나, 저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제 축언도 이능도, 그리고 가문에서의 제 위치도 전혀.”

나는 턱을 치켜들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힐데아 폰 힐링턴!”

아프고 상처 입고 괴로워지는 것은 내가 내 가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정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 무표정이 상처 받고, 어려워하고, 멀어지면 슬픈 이유는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녀나, 다른 귀족들이 날 무시하는 것은 알 바 아니었다. 상처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도 저들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같이 개무시하면 그만.

“오늘 말씀하신 은밀한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고귀하신 황후 폐하.”

부들부들 떠는 황후를 바라보다가 냉큼 인사를 마친 뒤, 물러났다.

붙잡는 손은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크게 심호흡했다. 망할. 이게 범의 아가리에 머리 들이밀었다가 살아난 게 아니고 뭐냐고.

“여기에 계셨군요, 영애!”

그녀는 날 전담하고 있는 황궁 시녀였다.

황궁의 예법에 정통한 것인지 잘 뛰지도 않았던 그녀는 헐떡이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내가 나온 곳을 향해 날카롭게 움직였다. 그리고 서슬 퍼렇게 변하는 눈빛도.

‘황후 쪽 사람이 아니었군.’

아마 이 시녀는 황제파 쪽의 귀족들이 붙인 사람들일 것이다.

아니면 황제 본인이 직접 붙인 사람일지도.

황궁은 보이지 않는 싸움이 정말 치열한 곳이구나.

한숨을 내쉬는데, 시녀가 침착하게 내게 말했다.

“어서 가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바로 뒤따르려다 걱정이 들었다. 황후와 대면하느라 시간이 꽤 지체된 것 같았기 때문에.

“너무 늦었어요. 중간에 들어가기보다는 첫 춤이 끝난 뒤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중간에 들어가면 누구도 날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동시에 첫 춤을 떠올리니 해사하게 웃는 우리 로제의 얼굴이 떠올라 우울해졌다.

‘우리 로제는 춤 연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는데.’

물론 귀족 영애의 기본 소양이었으니 가르치긴 가르쳤다.

그러나 로제를 가르쳤던 춤 선생은 위통과 고통을 호소했고, 몇 번의 반복된 수업 끝에 아빠와 나, 그리고 리라는 두 손을 들었다.

‘그랬었는데 로제가 가브리엘과 춤을 추겠다고 했지.’

정원에서 엿듣게 되었던 대화를 떠올리니 이상하게 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서 봐야 하는데.

로제가 그렇게 추고 싶은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붙여놓고 춤 연습을 시켰을 텐데.

‘왜 로제는 내게는 말을 안 해주고 숨겼을까. 혹시 로제는 내가, 내가 가브리엘을…….’

욱신욱신 울리는 심장의 고통을 무시하며 애써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을 때 시녀가 말했다.

“영애, 괜찮습니다.”

“네?”

이해할 수 없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니, 이제야 황궁 시녀의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차분했던 그녀는 지금 지나치게 하얗게 질려 있었다.

꼭 큰일이 난 것을 목도한 사람처럼.

뭐지?

“아직 귀족분들의 춤은 시작되지 않았어요.”

“네? 어째서요?”

벌써 누구든 첫 춤의 스타트를 끊고도 남았어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크게 뛰었다.

설마.

‘설마 우리 로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아무리 로제가 사랑스러운 축언을 지니고 있어 웬만한 사람들이 해를 못 끼친다고 하더라도.

황녀 라피이아는 원작에서도 계속 우리 로제를 괴롭혔잖아.

이를 꽉 깨무는데, 시녀가 말했다.

“그러니 안심하고 가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좋아요.”

황궁 시녀의 뒤를 따라 나도 잰걸음으로 연회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로제가 나 없는 사이, 어떤 사고도 치지 않았기를 바라며.

*

방에 홀로 남은 데자이아는 그 와중에도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 힐데아 폰 힐링턴의 자취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그녀는 입술을 사납게 비틀었다.

“맹랑한 것.”

대놓고 그리 거절할 줄은 몰랐지. 조금이라도 흔들릴 줄 알았건만, 생각과는 달랐던 것인가.

‘동생이 제 언니를 끔찍하게 아낀다고 하더니, 그것 때문인가?’

아비의 관심과 주변의 사랑을 모두 빼앗아 간 것이 그 화려한 축언을 지닌 동생 때문인데도 좋다는 것일까.

무려 황후의 앞에서도 또박또박 말하며 차갑게 응시하는 그 태도는 제법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아쉬웠다.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게 가만히 앉아 있던 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쇼파에 감춰져 힐데아 폰 힐링턴은 누군가 이 방 안에 한 명 더 있었다는 것을 몰랐으리라.

데자이아의 눈이 휘어졌다.

그리고 말했다.

“네 부탁에도 불구하고 저것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에는 실패했구나, 아들아.”

제법 상심한 표정으로 일어난 상대는 바로 그녀의 아들, 벤자민이었다.

벤자민은 조금 전의 당당하게 말하고 나간 여자를 떠올렸다.

어떤 말로 흔들어도 이쪽으로 넘어오지는 않겠다는 단호했던 목소리.

“이제 어찌할 셈이냐, 황태자. 저 아이가 이리도 어미에게 무안을 주고 나갔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보아라.”

그는 어미가 만족하는 착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애교 있는 살가운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맞잡는다.

“어마마마, 화를 푸세요.”

“흥, 화를 풀라? 그 되바라진 것이 이 어미를 무시하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그런 말이 나와?”

“하지만요, 저는 그런 생각도 들었는걸요, 어마마마. 힐데아 영애가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요.”

“흠? 그건 또 무슨 소리지?”

귀족의 표본 같았던 힐데아.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주변의 그런 점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사람들은 힐데아의 노력 따위는 상관없이 모두 축언부터 보게 될 것이다.

밝은 로제리엘과 비교하게 될 것이고 의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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