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연회의 꽃은 춤 (2)
“듣기로는 힐데아 영애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아, 사교계의 소문에 어둡다고 해요.”
“그래서?”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를 잘 모를 수도 있지요. 벌써 황궁의 시녀들이 떠들고 있더라고요, 어마마마.”
“무엇이라고.”
“힐데아 폰 힐링턴은 동생의 것을 탐내는 욕심 많은 언니라고. 그리고 그런 시선은 점점 늘어날 거예요.”
가브리엘이 건네줬다는 붉은색의 목걸이를 보면서도 그런 소문이 흐르고 있는데.
그런데 정말 흔들리지 않을까?
“본인이 아무리 당당하더라도.”
그녀의 태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갈 것이다.
“힐링턴 공작은 딸을 눈에 띄게 차별 대우하던걸요. 주변 가신들은 어떠할까요?”
귀족들은 결국 로제리엘과 힐데아를 끊임없이 비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공작의 손을 잡고 나타났기 때문에.
꼭 그런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지 못해 흠결이 있다고 평가받는 황태자, 자신처럼.
‘그러니까 돕고 싶어.’
욕심이 피어올랐다.
벤자민은 항상 착한 아들로 남으려 했다. 항상 그녀가 바라는 대로 살아왔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데도 제 어머니가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을 먼저 두둔하고, 이렇게 탐을 내고, 바라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첫눈에 반한 것처럼 이끌렸고, 그녀와 직접 제대로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는 더 끌렸다.
힐데아의 깊은 호수 같은 눈동자는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이 황태자이든, 황후이든, 그 누구이든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게다가.
벤자민은 어느 한 순간을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속이 따끔하며 불유쾌한 감각이 현재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말 싫었지.’
원래 가브리엘에 대해 큰 감정은 없었다. 어머니가 견제하고 싫어했기에 그리 행동했지만, 제대로 말도 섞어보지 않은 사이였으니 더 그랬다.
하지만 이제 벤자민은 이 제국의 귀족들 중 가브리엘 그 자가 제일 싫었다.
‘당연한 자신의 자리라는 것처럼 쳐다봤지. 감히 나를.’
힐데아의 옆에서 오만하게 바라보던 가브리엘.
그자가 당연하다는 듯 힐데아의 손을 잡고 물러나는 뒷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처음으로 살기가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약혼자도 아닌 주제에.
가브리엘은 사내로서도 비겁했다.
‘두 영애 중 재볼 것이라면 빨리 로제리엘이나 선택할 것이지. 괜히 힐데아에게 희망 고문을 하는 것이잖아.’
고요했던 힐데아의 시선이 가브리엘에게 닿았을 때를 떠올리며 벤자민은 더욱 턱관절에 힘을 주었다.
차갑고 고요한 그녀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 앞에 있던 힐데아는 자신에게 시선을 떼고 가브리엘을 응시했다.
눈앞의 벤자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리고 결국 잡았다.
그 손을.
‘혹여 힐데아가 그 자에게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둘이 이루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벤자민은 다들 떠들고 있는 붉은색 목걸이에 대해서도 의심스러웠다. 감추어진 진실이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간혹 가브리엘과 로제리엘이 눈빛을 교환했다고 떠들어대는 귀족들도 있었다.
자매가 한 남자를 두고 벌이는 치정. 귀족들이 딱 좋아할 만한 요소다.
‘앞으로 힐데아는 더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거야.’
힐데아 옆에서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드는 가브리엘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어떤 짓을 해서든.
‘힐데아가 모욕당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어.’
벤자민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관찰하고 있는 어미를 향해 유순하게 웃어 보였다.
“왜 그리 보세요?”
“황태자.”
“네, 어마마마.”
“그 애는 이미 내 뜻을 들었다. 듣지 않은 것으로 한다고 하여 그게 제 마음대로 될까.”
그건 안타까웠지만, 힐데아가 쉽게 넘어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이끌리지도 않았겠지.
“황태자, 너는 어떤 방향을 원하느냐? 그 되바라진 아이를 아직도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것이야, 아니면 감히 이쪽의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야?”
“으음.”
벤자민은 생각했다.
그녀가 달이라면, 저는 달빛이 비추는 호수가 되고 싶어요.
그녀와 저는 너무 닮았잖아요.
그러니까 힐데아를 제 편으로, 나를 위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요.
하지만.
“글쎄요. 어마마마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저는 어마마마를 가장 사랑하잖아요.”
이런 탐욕을 있는 그대로 내보였다가는 그의 어미는 바로 힐데아를 치워버릴 수 있었다.
‘착한 아들이 갑자기 반항이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는 열의 없이 웃었고 그의 어머니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톱을 튕겼다.
“어미는 네 의견을 듣고 싶구나.”
“그럼 말씀드려봐도 될까요?”
벤자민은 손을 뻗는 황후의 곁에 가 그녀에게 머리를 대주었다.
“그래.”
“저는.”
차가운 손끝이 소름끼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꼭 착한 개를 칭찬하듯이.
벤자민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사랑했지만. 간혹…….
이렇게 속이 비틀릴 때가 있었다.
자신에게 효용가치가 없었다면, 그의 어미는 이렇게 저를 아꼈을까?
“힐데아 영애는 곧 흔들릴 거예요. 주변이 그렇게 만들겠죠.”
“그래서?”
“아주 괴롭고 외로울 때 이쪽에서 손을 내밀면 좋지 않을까요? 그 괴로운 때는 언젠가 오겠지만, 더 앞당겨 고의적으로 상황을 만들 수도 있겠지요.”
이를테면 어마마마 같은 분께서.
눈을 휘며 바라보자, 황후는 탄식하며 웃었다.
“이런……. 내 아들은 어찌 이렇게 똑똑할까.”
어머니가 힐데아를 결국 이용하기 위해 붙들려 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벤자민은 생각했다.
가브리엘이나 힐링턴의 곁에 이대로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힐데아는 꼿꼿하고 우아한 태도로 괜찮다고 했지만, 분명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니 낫다. 자신의 옆이.
누구보다 잘해줄 것이니까.
그 남자의 약혼녀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훨씬 더 행복할 거야.
“좋구나. 내미는 손은 네가 맡거라, 황태자.”
벤자민은 활짝 웃었다.
“네, 어마마마.”
*
첫째 날 에스코트한 파트너가 둘째 날에 첫 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수줍은 마음을 안고 한껏 화려하게 꾸민 뒤, 힐데아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일찍 움직이고 있었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힐링턴 공작이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제가 갈 겁니다. 팔불출 아버지는 빠지시죠.’
‘내 딸이 그쪽과 있을 때 얼마나 불편한 얼굴을 했는지는 보이지도 않았나?’
‘다가와 살가운 말 한마디 못 꺼낸 아버지 주제에 뭘 잘났다고 떠드시는 겁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가겠다는 것이다. 그쪽은 로제리엘의 손이나 잡고 들어오도록 해.’
‘첫날은 언니 쪽, 둘째 날은 동생 쪽이라니. 저더러 희대의 난봉꾼이 되라는 소리입니까?’
전기처럼 따가운 시선이 얽혔다.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힐데아가 담담하게 아버지, 라고 부르면 잔뜩 풀이 죽어 중얼거리는 꼴이 얼마나 꼴사나운지.
가브리엘은 힐데아가 차갑게 바라보면 저도 만만치 않는 꼬락서니가 된다는 것을 모른 채 힐링턴 공작을 비웃었다.
만약 그때 끼어든 로제리엘이 상황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한참 그 대치가 이어졌을 것이다.
‘언니한테 압박 주지 말고 가브리엘은 얼른 연회장으로 가죠? 그리고 아빠는 음, 언니가 아빠한테 좀 섭섭한 거 같으니까 제대로 사과하고 오세요!’
‘이게 로제 다 너 때문이 아니냐.’
‘으응? 저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가브리엘은 초조하게 닫힌 문을 살폈다.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이지. 왜 오지 않지?
힐데아의 성실한 성격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늦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다면 황궁 시녀로부터 연락이 왔을 텐데.’
이 궁에서 황후나 황제나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그는 일찍 사람을 매수해서 힐데아를 지킬 수 있도록 붙여 놓았다.
그러니 만약 일이 생겼다면 연락을 해오거나, 혹은 황궁 시녀 스스로 할 수 있는 선에서 움직여 힐데아를 지켰을 것이다.
가브리엘은 짜증 가득한 시선을 던지다가, 열흘은 굶은 다람쥐처럼 열심히 볼 안쪽에 작은 핑거 푸드들을 옮겨 담고 있던 로제리엘과 눈이 딱 마주쳤다.
‘하.’
가브리엘은 눈으로 욕을 했다.
‘당신 아버지는 대체 뭐를 하고 온 겁니까? 이럴 거면 나를 왜 쫓았지?’
힐링턴 공작은 눈에 띄게 어두운 낯으로 왜 그러느냐 주변에서 말을 거는 귀족들도 쌩무시한 채 와인만 축이고 있었다.
로제리엘은 제 아빠 쪽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뭐라 눈짓을 전하려던 순간, 깜짝 놀란 듯 무언가를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뭐지?’
그때야 알았다.
누군가가 제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을 향해 느릿한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는 것을.
가브리엘은 그 손을 한 번, 그 손을 내민 자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게 뭐하자는 수작이지?
그때, 여자가 붉게 칠한 입술을 휘며 입을 열었다.
“벨키우스 공작. 날 계속 무안하게 만들 셈인가요?”
“황녀 전하.”
“그래요, 공작. 내가 보이기는 하는가 보군요?”
예를 갖췄으나, 가브리엘은 냉담한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