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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57화 (57/155)

57화. 당신과 닿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1)

살짝 비틀린 입술이나 표정이 황제를 알현하러 갔을 때 마주쳤던 얼굴과 비슷했다.

시선은 그를 조롱하는 듯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도 황녀를 그때처럼 무시할 수 있겠냐는 듯.

내민 제 손을 당연히 잡을 것이라 믿는 오만한 황녀의 눈은 욕심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황족의 눈이다.

‘정말 웃기지도 않지.’

눈앞에 파리라도 있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려던 가브리엘은 황제의 시선이 이쪽으로 날아와 꽂히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정말 귀찮았다.

치졸한 노인네는 이 손을 무안하게 거절한다면 힐링턴에 화풀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브리엘은 입매를 우그러뜨렸다. 시간이 길어지자 황녀의 얼굴 역시 변화가 생겼다.

‘차라리 전쟁터가 더 낫겠군.’

이곳에 힐데아와 단둘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끄러운 귀족들의 시선도 다 치워버리고 둘만 조용한 테라스 같은 곳에서 있었다면.

그러면 마음껏 용기 내 청할 텐데.

힐데아, 부디 저와 첫 춤을.

그렇게.

‘저 여자가 아니라.’

가브리엘은 황녀 라피이아의 손을 바라보았다.

‘힐데아가 보고 싶은데.’

황녀의 뒤에서 압박하듯 노려보고 있는 여자들의 시선이 우스웠다.

그 눈빛들이 말하는 바가 명백했다.

어서 우리 황녀 전하를 선택하지 못할까!

‘하, 빌어먹을.’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손을 잡지 않으면 분명 황제파와 척지게 될 것이고, 손을 잡는다면 황후파와 척지게 될 것이다.

물론 그는 둘 모두와 틀어지든 말든 일말의 관심도 없었지만.

그때였다.

‘……로제리엘?’

저 멀리 냅킨을 흔들고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

대체 펜을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니 냅킨에 글씨를 휘갈겨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냅킨에 써 있는 글씨는.

-야, 너 우리 언니 두고 뭐 하자는 수작이야! 당장 그 여자 거절하지 못해?

‘…….’

뛰어난 시력으로 그걸 읽어낸 가브리엘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다른 의미로 짜증이 확 치솟았다.

지금 그가 원해서 이 황녀와 어울리는 것으로 보이나?

지난밤, 그를 정원으로까지 불러내는 위험을 무릅쓰며 힐데아와 첫 춤을 출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한 것은 로제리엘이 아니었나.

그런데 에스코트도 못 하게 방해를 했으면서.

처음부터 힐링턴 공작이 아닌 자신이 갔다면 힐데아와 같이 들어와 이따위 일도 겪지 않았을 것 아닌가.

로제리엘, 저 원수. 연회가 끝나면 그 죗값을 톡톡히…….

‘그래. 차라리.’

그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로제리엘을 확 바라봤다.

어이없을 만큼 무례한 문장보다도 그는 로제리엘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황녀와 춤을 추느니 차라리 로제리엘과 춤을 추는 게 낫…….

‘……지 않지.’

가브리엘의 얼굴이 한껏 침울해졌다.

황녀나 로제나 둘 다 그에게는 만만치 않은 똥이었다.

그때 황녀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공작. 그대는 한결같이 무례하지만, 특별한 날이니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어요. 신의가 깊다는 것은 흠결이 아니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퍽 친밀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질겁한 그가 물러나려 하자 황녀가 은밀히 미소하며 재빨리 속삭였다. 그만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그렇게 질겁하며 도망칠 필요는 없지 않아, 가브리엘?”

“…….”

“어차피 너도 네 파트너에게 바람맞은 처지인 것 같은데 뭘 그리 가련히도 기다리지? 자존심은 전쟁터에 구르면서 버리고 왔나?”

“……말투가 지나치게 친근하십니다, 황녀 전하. 예의를 좀 갖춰 주시면 좋겠는데?”

살벌한 시선이 오갔다.

누가 보면 춤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칼을 박아 넣으려고 하는 줄 알 시선이었다.

라피이아의 눈이 가브리엘의 옷소매에 달린 보라색의 커프스 버튼으로 향했다. 휙 휘어지는 눈이 기분이 더러웠다. 왜 웃지?

“뭘 재고 그러시나. 기회를 주는 거예요, 벨키우스 공작.”

“어떤 기회든 필요 없습니다.”

“아니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닌데.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듯 이 자리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과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를.”

“필요 없습니다.”

“아니면 설마 그쪽 볼 때마다 세상 차가워지던 그 여자를 기다리는 거라고? 정말? 그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가?”

“…….”

“그럴 리는 없겠지. 잘 따져 봐, 힐링턴보다는 황녀의 약혼자가 되는 것이 더 이득일 테니까.”

그만 보면 차가워진다는 얼굴.

심장이 꿰뚫린 듯 욱신거렸다.

분하게도 잘 안다. 저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심지어 그 황태자 벤자민을 향할 때의 눈도 자신에게 향할 때보다는 온화했다.

그것을 보며 심장이 문드러지게 아팠고, 괴로웠고, 서글펐다.

‘하지만 어쩌라는 건가.’

자신이 좋다는데.

무표정하든, 차갑든, 냉정하든, 힐데아의 얼굴을 바라만 봐도 자신이 좋다는데.

가브리엘은 사납게 비웃었다. 지켜보던 귀족들이 움찔할 정도로.

“기다린다면.”

“뭐?”

“제가 그 파트너를 기다린다면 어쩌실 겁니까, 황녀 전하.”

가브리엘은 라피이아를 향해 짜증을 숨기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당장 저 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이 강압적인 상황을 알아서 포기하실 겁니까?”

도발이었다.

라피이아의 입술이 분노로 푸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어릴 때였다면 당장 이 상태에서 가브리엘의 따귀라도 올려붙이려 들거나, 귀를 물어뜯으려 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황녀도 제 더러운 성질머리를 가라앉히는 법을 배운 모양인지, 그를 살벌하게 노려볼지언정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어찌나 간곡할 정도의 헌신인지, 그대의 약혼녀가 더욱 되고 싶군요. 좋아요, 벨키우스 공작. 만약 당장 저 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온다면 첫 춤의 영광을 기꺼이 양보하도록 하죠.”

황녀가 짓씹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갈하며 문을 가리키는 순간.

끼익-

기적처럼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두의 화살 같은 시선을 맞으며 등장한 여인은, 힐데아 폰 힐링턴이었다.

*

‘뭐, 뭐야.’

춤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을 때 무슨 일이 났어도 났겠다 생각은 했겠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보고 있는 광경은 좀 공포스러웠다.

그리고 그 시선의 중심에 있는 남녀 한 쌍을 보는 순간 심장까지 쿵 떨어진 기분이었다.

백금발의 아름다운 남자, 가브리엘.

그리고 그의 가슴에 안길 듯 바싹 붙어 서 있는 황녀, 라피이아.

‘왜 둘이?’

상황이 가늠이 오지 않았다.

우리 로제는 어쩌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연회홀을 전체적으로 훑었다. 로제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 싸늘한 분위기의 원인이 저 둘에게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왜 나를 저렇게 봐.’

황녀의 시녀처럼 극성스럽게 굴던 영애들이 숫제 내 머리를 볶아 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설마.’

혹시 황녀가 첫 춤을 신청했는데, 가브리엘이 거절하고 있는 상황인 걸까?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제까지 파트너였던 내가 등장한 것이고?

간이 서늘해졌다. 망할, 타이밍 한번 굉장하잖아?

그냥 문 열고 다시 나갈까……?

고민하는 순간, 다시 한번 문이 끼익 열렸다. 이번에 사람들의 시선은 내 뒤에 있는 이에게 쏟아졌다.

경악스러운 눈빛들과 함께 번지는 웅성거리는 소리.

‘진짜 타이밍이 거지 같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가브리엘의 눈 역시 만만치 않게 싸늘해져 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뿐인가.

전체를 살피다 2층에 서 있던 아빠를 발견했을 때는 너무 억울해서 코끝이 찡하기까지 했다.

“힐데아 영애.”

뒤에서 들려온 미성에 내 바로 뒤에 들어온 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아, 슬프다.

이 사람이 왜 지금 등장하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지각한 나 다음에 이렇게 바로 들어와버리면.’

내가 그와 다른 만남을 가지다 늦게 들어온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내 옆으로 와서 웃는 것이 보였다.

푸들같이 부들부들한 갈색의 머리카락과 온화한 눈빛.

내게 저런 시선을 보내는 몇 안 되는 사람.

“……황태자 전하.”

황태자 벤자민.

그는 맛있는 개껌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나는 서글퍼졌다.

“마침 영애를 찾아가려 했었는데요.”

나는 천천히 눈만 돌렸다.

역시 경악한 사람들이 보였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라고!

“영애, 나를 좀 봐줘요.”

악의는 없지만, 나는 그에게 특별한 호감도 없었기 때문에 곤란하기만 했다.

특히, 그가 지금 보내는 눈빛을 통해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눈치챘을 때에는.

“힐데아 영애, 영애만 괜찮다면 오늘 나와 데뷔탕트의 첫 춤을…….”

그 순간이었다.

날 뚫어지게 보고 있던 가브리엘과 눈이 마주쳤고, 전기라도 찌릿하게 통한 것처럼 뜻이 통했던 것은 기적일까.

그가 눈을 깜빡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가브리엘은 동시에 각자의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한 것도 그 직후였다.

“죄송하지만, 전하.”

완벽한 거절의 명분.

“저와 첫 춤을 약속한 사람이 저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가리켰다.

황녀와 황태자의 입이 동시에 다물리기에 완벽한 핑계였다.

*

그리고 그 결과.

그 결과가 이것이다.

‘아아, 진짜 어제부터 오늘까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이 이따위로 진행될 수가 있어.’

날 바라보며 또렷하게 마주치는 상대의 눈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생각했다.

이 상황만큼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는데.

바로 가브리엘, 그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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