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당신과 닿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2)
‘연회의 꽃은 춤이죠.’
어느 날, 로제와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인 로제트 폰 멜로니 후작 부인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로제는 바로 반박했다.
‘꽃은 무슨, 시든 꽃이에요. 완전 불편하다고요 후작 부인!’
그 이야기를 들은 후작 부인은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했지만, 사실 그때 나도 후작 부인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춤. 그래,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울지 몰라도 내가 직접 추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댄스는 노동이었다.
‘그것도 심각한 노동이지.’
코르셋은 조였고, 드레스는 무겁다. 구두는 발바닥을 쿡쿡 쑤시게 했고, 춤곡은 길이가 몇십 분이나 된다.
동작은 섬세했고, 뭐 하나 틀려서 파트너의 춤까지 망치게 된다면 연회장 내내 입에 오르내리는 수치를 겪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제일 중요한 애로사항.
‘춤추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미엘르 제국의 대부분의 춤곡은 느릿하고 여유로웠다.
좋게 표현하면 춤을 추는 남녀가 꽤 달라붙게 되는 춤곡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끈적했다.
왜냐하면 연회장에서 남녀가 춤을 같이 추다가 연애 결혼에 골인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미엘르 제국 문화 자체가 그랬다.
문제는 그 끈적한 춤곡을 나와 가브리엘과 추고 있다는 것.
‘연인도 아닌 우리가.’
몸이 절로 뻣뻣해졌다.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했다. 나 지금 제대로 춤 추고 있는 거 맞나?
다시 상대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가 느리게 멀어진다.
‘또.’
나는 홀린 듯이 가브리엘의 보라색 눈을 보았다가 어지럽게 시선을 흐트러뜨렸다.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화사하게 반짝이는 그의 백금발이 며칠이나 꿈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간간이 걸리는 시선의 끝에는 다시금 그가 달고 있는 커프스 버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손끝이 오므라들었다. 맞잡고 있는 통에 내 손가락의 움직임은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긁듯이 손바닥 표면을 스쳤을 때, 놀란 듯 바라보는 가브리엘의 눈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안 돼. 정신 차리자.’
슬프게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꾸만 그가 의식이 되었다. 초조함에 입술을 물었다.
나만 의식하고 있는 이 상황이 비참했고, 상대가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템포가 빨라지는 부분에서는 허리에 친밀하게 손이 파고들어 와 숨이 가빠졌다.
그것이 티가 날까 봐 잔뜩 긴장하면 긴장할수록 몸은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망했어. 역대 최악의 춤이라고 평가 받겠네.’
그럭저럭 그의 발등을 밟진 않았지만, 다가온 가브리엘의 표정 또한 밀랍이라도 부은 듯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알아. 가브리엘은 지금, 이 순간이 싫은 거겠지.’
붉게 달아오른 것처럼 뛰던 심장은 다른 의미로 아찔하고 서늘해졌다.
아!
뼛속까지 외운 듯 움직이던 발의 템포가 꼬인 것도 그 순간이었다.
휘청이며 망신을 당할 뻔한 순간, 가브리엘이 원래의 춤과 다르게 움직였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그의 팔이 나를 지탱했다.
거리가 훅 가까워졌다. 그의 눈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꼭, 입맞춤을 할 듯이.
“힐.”
“…….”
이건 아니지 않나.
너무 가깝잖아.
경련을 하듯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멈추자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억울해졌다.
춤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멜로니 후작 부인이 끝없이 박수를 쳤을 만큼 내 춤 실력은 뛰어났단 말이야. 이게 다 당신이…….
‘가브리엘이 뭐?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지레 놀라 넘어질 뻔한 거면서.
“고, 마워요. 가브리엘.”
“……불편하십니까?”
얽혔던 시선을 가브리엘이 먼저 피했다.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나도 턴을 하며 그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뭘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날 쳐다보고 싶지 않아서 저러는 걸까?
“그런 게 아니에요.”
“하지만 힐데아.”
“네?”
“손이 차갑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가브리엘이 손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어, 여기에서 손 잡는 동작은 없는데.
화들짝 놀라 파드득 떨 듯이 반응하자 그가 부드럽게 스텝을 밟으며 가까워졌다.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바람 같은 목소리도.
“제 손은, 따뜻합니다.”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아찔해졌다.
동시에 그의 그윽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안 돼.’
춤은 길었고, 시간이 너무 느렸다.
애써 그에게 못 박히는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이성을 돌리려 노력했다.
‘주변의 평가는 어떻지?’
힐끗거리며 귀족들을 바라보니, 다들 의아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보통의 젊은 남녀가 아름다운 춤을 추었을 때의 반응과는 영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 역시 우리 춤은 망했구나.
그럼 내 동생, 로제는?
한숨이 흘렀다. 이제야 로제에 대해 떠올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와 꽉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죄책감이 쿡쿡 심장을 쑤셨다.
이 손을 잡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었는데.
쌉싸레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삭이며 남은 동작을 추고 있을 때였다.
‘어?’
어딜 가나 확 눈에 띄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걸렸다.
‘로제……?’
로제는, 우리 로제는, 가브리엘과 내 춤을 보며 서글픈 눈을 하고 있어야 맞을 우리 로제는.
‘로제, 너.’
그 애는 시무룩해지기는커녕 앞에 야무지게 접시들을 깔아 놓고 하나씩 음미하는 중이었다.
‘너, 너 여기 먹으러 왔니?’
저게 뭐야. 저게 말이 돼?
저럴 때 보면 로제가 정말 가브리엘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이상할 때가 있었다.
우리 로제가 너무 담백한 것 같다고. 가브리엘은 저 광경을 보면 얼마나 슬퍼할지.
나는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가브리엘에게 말을 걸었다.
“가브리엘?”
“예, 힐.”
우리의 제대로 된 첫 대화였다.
그가 바로 기다렸다는 듯 대꾸한 것은 의외였지만.
난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당신의 소중한 약혼녀가 이쪽에 관심은커녕 음식에 정신이 팔렸어요, 라고 부드럽게 돌려 말하기 위하여.
“사실은요, 로제가 저쪽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 애가 지금…….”
“아. 로제리엘 영애 말씀입니까?”
“어, 네?”
응? 이 미적지근한 반응은 뭐람.
“네! 지금 가브리엘도 봤, 아니. 이미 어디 있는지 이미 아셨어요?”
“예.”
가브리엘의 반응은 또 왜 이래.
“먹성이 좋더군요.”
“……네?”
너무 어이가 없어 빠르게 말하다가 다시 한번 그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으악. 그런데 더 참사가 일어났다. 이번에는 그가 날 이끌어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게 된 것이다.
‘사, 사라지고 싶다.’
민망함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영애에겐 지금 로제리엘 영애의 행방이 중요합니까?”
“당연, 하죠?”
어쩐지 가브리엘의 턱관절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가브리엘, 지금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는데.”
“아닙니다.”
이를 악물면서 말하는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자 헛기침을 한 그가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힐데아. 로제 영애는 어디에 있어도 잘 먹고 잘 지낼 겁니다.”
어, 네. 슬프게도 맞기는 맞는 말이지만요. 간절히 사랑하는 연인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 힐데아 영애.”
훅, 하고 거리가 당겨졌고.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무슨 이야기를요?”
나는 멀뚱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실은 숨 쉬는 것을 또 잊어서 그런 것이었다. 아, 가브리엘은 속눈썹이 무척 길고 아름답구나.
“이를테면.”
동시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왜 가브리엘의 속눈썹을 보며 감탄하고 있지? 염치를 챙겨야지, 힐데아 폰 힐링턴!
순간,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비의 날갯짓 같아 다시 또 멍해졌다. 예쁘다. 만져보고 싶어.
“목걸이.”
응?
“네?”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로 향했다는 것을 알았다.
턴을 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감듯 목을 스쳐 지나갔다.
“목이 비어서 알아보았습니다.”
홧홧하게 피부가 간지러운 것이 스쳐 지나간 머리카락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지금.
‘저렇게 보고 있는.’
가브리엘의 눈 때문일까.
그의 장담대로 꽉 손을 쥐는 그의 커다란 손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제가 드린 목걸이.”
그 열기가 피부를 따라 번지는 기분이 들만큼.
“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느릿느릿 이어지는 그의 말은 무척이나 신중하게 한 단어씩 골라 내뱉는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것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시끄러워, 진다고요.”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노력하다가 포기했다.
어색한 웃음 따위 지어봤자 이곳에서는 비웃음거리만 되겠지.
그래야 당신과 로제 사이에 내가 괜히 끼어들어 스캔들에 얽히지 않을 거 아니야.
애초에 처음부터 목걸이를 두 개 주지 않았다면 좋았으련만.
“로제와 같은 것이니까 귀족들에게 시비를 걸 수 있는 빌미를 주는 것 같아서요. 만약 불쾌하셨다면…….”
“아니, 제가 불쾌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그는 어쩐지 이쪽의 기색을 살피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난 눈을 가늘게 떴다.
가끔 그와 대화를 하다보면 무언가 어긋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목걸이요?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니면.”
그러나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가브리엘이 아까보다는 빨라진 어조로 말했다.
“혹시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까?”
그의 말을 곱씹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목걸이를 안 한 것은 맞으니까.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가브리엘의 눈은 꼭 누군가를 씹어먹고 싶다는 듯이 일렁거리는 거지.
어쨌든 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네. 보여주기 위해서죠.”
정확히는 귀족들에게 내가 당신 약혼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
그런데 그 말을 내뱉자마자 가브리엘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만. 왜 그런 표정을.’
내가 지금 본 게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