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완벽한 한 쌍이었다
미친 듯이 눈을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보려는 순간이었다.
짝짝-
주변에서 박수 소리가 울렸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 순간이었다.
‘뭐야.’
모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음악이 끊겨 있었다.
그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춤이 벌써 끝났어?’
그와 대화하는 동안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는 것을.
*(NEW_TOKI_지나가던_행인)
2층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던 황제 디트로이아는 그의 옆에서 떠드는 귀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긴 하네요.”
힐데아 폰 힐링턴과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의 춤을 보며 한 말이다.
황제도 그건 인정했다.
영상구로 남겨두어 후대에게 이것이 완벽한 춤의 교본이라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특히 힐데아 폰 힐링턴은 백조처럼 우아했다.
그나마 단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하지만 좀, 이상하지 않았나요? 두 사람의 표정이요.”
그래, 표정이었다.
황제는 주책없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어느새 2층으로 들어온 황후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황후 역시 기민한 눈빛으로 아래를 살피고 있었다. 특히, 힐데아 폰 힐링턴을.
설마 힐링턴이 늦게 들어온 것이 황후의 수작이었나.
황제는 심드렁하게 턱을 매만지며 귀족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어색하고 차가웠죠.”
“원수를 데려다 춤을 추게 해도 그 표정보다는 애틋하겠어요.”
“음, 목걸이 때문에 언니 쪽이 벨키우스 공작의 약혼녀인 게 아니냐는 말이 많았는데, 지금 저들의 모습을 보면 영…….”
“맞아요. 서로를 쳐다도 보지 않는 것 같더군요. 시선이 맞는 순간도 별로 없고, 대화를 나누긴 했는지 모르겠어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벨키우스 공작이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춤을 출 것 같지도 않고……. 대체 뭐가 맞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그때 어떤 귀부인이 속살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들은 것이 하나 있는데…….”
“어머, 뭔데요?”
황제는 한껏 더 몸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황후가 혀를 찼지만, 알게 뭔가.
“시녀들에게 들었는데요.”
“시녀들의 이야기라면 믿을 만하지요.”
“로제리엘 영애와 공작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해요.”
“어머?”
귀부인들의 부채 속도가 한껏 빨라졌다.
“힐링턴의 로제 영애와 벨키우스 공작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친근했다고 해요. 지금 저 모습을 보면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요. 그 말은 로제영애가 공작에게 특별하다는 뜻 아닐까요?”
호오. 이야기가 아주 흥미진진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는지 듣고 있던 귀부인들이 경악하면서도 몸을 앞으로 더 수그렸다.
“어머, 어머, 무슨 일이야. 그럼 자매가 한 남자를 두고 다투고 있는 건가요? 정말 소문대로 치정이라는 거예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힐데아 영애가 불길한 축언 값을 하는 것 같네요. 쯧. 열의도 없으면서 동생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할 짓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디트로이아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비죽 웃었다.
불길한 축언?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해진 운명이 없다>
그게 마냥 불길한 축언이었다면 선대 최고 신관이 미친 사람처럼 굴며 애를 뺏으려 힐링턴 공작을 들이받았을까.
‘숨겨진 뭔가가 있는 거겠지.’
힐링턴 공작이 얼마나 공처가였는지 생각해보면, 그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는지 생각해보면 대놓고 힐링턴과 적대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신전은 그렇게 했다.
로제리엘 그 아이의 축언과 이능 역시 막강한 것은 마찬가지였는데도 오로지 힐데아만 콕 집어서 원했고.
‘그리고.’
가브리엘은 또 어떤가.
<그 어느 것도 뚫지 못하리라>
그야말로 기가 막힌 축언과 그에 따른 이능을 타고난 벨키우스의 아이는 어릴 적부터 무척이나 비범했다.
그리고 그만큼 부작용도 컸다.
얼어붙은 심장,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게 냉정한 가주로서는 좋게 들릴 것도 같았지만, 단점도 많았다.
열망하지 않으니 바라는 것이 없다.
올려다보지 않으니 곁에 두고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 힐링턴과 벨키우스라.’
황제는 서먹하게 멀어지는 것 같은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뜻이 없는 관계가 맞나?’
방금까지 완벽한 춤을 춘 이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어색해 보이는 둘을.
“벨키우스 공작님의 표정은 내내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어요. 시선도 가끔 로제리엘 영애 쪽으로 향했었고요. 눈치를 보는 것처럼요. 이대로라면 어쩌면 두 가문간의 혼사가 깨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쯧. 거기까지 들은 황제는 귀족들의 대화에 흥미를 잃었다.
다시 아래를 살피며 푹신한 의자에 등을 묻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제 딸, 라피이아의 모습도 보였다.
‘라피이아, 그 아이의 꼴이 우습게 되었어.’
솔직히 마음 같아선 불호령을 내리고 싶었다.
가브리엘이 그 상황에서 당연히 라피이아의 손을 잡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은 돌려 말하면 주변의 시선도 상관없을 정도로 힐데아 폰 힐링턴에게 가야 했다는 뜻이 되는 건가.’
차라리 로제리엘이었다면 어쩔 수 없이 가브리엘의 혼담을 허락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이 없다>는 신전에서 탐을 내는 축언을 갖고 있는 힐데아와의 혼담이라면.
‘불길하구나.’
그건 허락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황제는 우선 먹구름같이 속을 알 수 없는 가브리엘의 마음부터 확인하고자 했다.
그래야 움직이고, 잘라낼 것을 정해 쳐낼 수 있으리라.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킨 황제는 곁의 시종에게 무언가를 전했고, 재빠르게 움직인 시종은 1층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어떤 이에게 눈짓했다.
자아.
이제 기다리면 된다.
미끼를 흔들어 어떤 것이 걸리게 될지를.
*
내가 첫 춤을 추고 들어온 뒤로 다수의 영애와 영식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까보다는 더 발랄하고 빠른 템포의 음악이 울리자, 화려하게 펼쳐지는 영애들의 드레스가 꼭 활짝 핀 꽃처럼 보였다.
예쁘긴 예뻤다.
비록 황녀 라피이아의 시선이 이따금씩 날카롭게 꽂히고,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황태자 벤자민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 쪽으로 다가오려는 움직임을 해보였을지라도.
‘이크.’
어디 도망칠 곳 없나.
이대로 여기 있다가는 다시 아까의 2차전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브리엘, 황녀, 황태자의 위치를 모두 파악한 뒤에 나는 로제에게 돌아갈까 아니면 조용한 곳을 찾아 움직일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피하자.
어제와 오늘, 내 운수가 최하점을 찍은 듯하니 로제와 같이 있다가 둘이 함께 휘말리면 그건 더 최악이었다.
우리 로제는.
‘주먹을 써.’
게다가 내 동생은 내 일이라면 앞다투어 나서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안 된다.
바로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빼곡히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밀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술이 사람을 먹는 지경이 되도록 만취한 모습 같았다.
저건 개지, 개야.
술에 취해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지극히 경멸하는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얽히지 않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만약, 그 무례한 자가 내 손목을 덥석 잡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
기가 막혀 눈을 크게 뜨는데, 딸꾹질한 영식은 히죽 이를 드러내며 웃기까지 했다.
“혼자 외롭게 딸꾹, 있는데, 딸꾹, 내가 한번 어울려 드릴까, 영애? 자아, 우리도 춤을 추러 나가자구.”
입으로 똥을 싸는 인간이 있었구나 싶었다.
“좋게 말할 때 놓는 게 좋을 거예요.”
“아아 진짜 더럽게 까탈스럽게 구네, 어, 어어 이게 누구야, 이제 보니까 그, 딸꾹! 그 힐링턴 아니야!”
남자의 목소리가 컸기 때문에 점차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나는 잡힌 손목을 한번, 돕기는커녕 사람을 구경거리 취급하고 있는 귀족들을 응시했다.
“이봐요. 내가 누군지 알아요?”
차분히 물었으나 상대는 이미 이성이란 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흐흐, 그걸 어떻게 알아! 널린 것이 귀족 자제들인데, 크으. 그래애, 너보다 네 예쁜 동생에게 가자아, 내가 같이-”
아, 여기까지였다.
내가 참을 수 있는 것은.
감히 그 더러운 입에 우리 로제를 올려?
“왜 말이 없, 아아악!”
드레스의 좋은 점은 구두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는 방심하기 마련이지.
퍼억 소리가 울렸고, 남자는 제 정강이를 잡고 비명을 지른 뒤 쓰러진 뒤였다.
“지, 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그건 내가 할 말인데요.”
쓰러져서 끙끙 앓던 남자는 멍한 눈으로 내게 외쳤고, 나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여주었다.
“창피한 줄 알면 여인의 구두에 맞아 눈물까지 흘렸다는 말을 떠들고 다니진 않겠지요. 그리고 이따위 시비를 걸었다는 것 역시 떠들고 다니진 않을 거예요.”
“뭐, 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술에 잔뜩 취한 주제에 내게 곧장 걸어오는 것이 이상하긴 했었는데 역시.
“그런데 당신, 술 냄새가 옷에서만 나네요? 꼭…… 옷에 일부러 뿌린 것처럼.”
“헉.”
“이게 무슨 일일까. 내가 힐링턴인 줄 뻔히 알면서 다가와 이렇게 조롱을 하고.”
“허, 허억.”
남자는 술에 취한 척하며 다가와 정확히 내게 시비를 걸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한미하긴 했지만, 어쨌든 분명 귀족이었다.
누가. 누구지?
내 표정은 더 싸늘해졌을 것이다. 이곳이 연회장이 아니었다면, 바로 멱살을 잡고 물었을 것이다.
당신, 누가 보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