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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60화 (60/155)

60화. 그 머릿속에 똑똑히 넣어둬

가만히 응시하자 남자는 점점 졸도할 것처럼 얼굴색이 변해갔다. 확실히 켕기는 것이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황후는 직접 내게 경고하며 움직였으니까.’

황제일 가능성이 더 크겠다.

나는 이제 벌벌 떨기 시작하는 한심한 남자에게 냉담하게 경고했다.

“당신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무얼 알아보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을 자유자재로 했다면 좋았을 텐데. 원래 이런 경고는 소름끼치게 웃어주면서 해야 제맛이잖아.

“감히 그 더러운 입에 내 동생을 올리지 마세요.”

아, 이제야 생각났다.

내게 초대장을 보냈었던 사람들 중에 이 사람의 가문 사람이 있었다. 그 가문의 자식이 형제이며 내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 형이라고 했으니 이쪽은 동생일 것이다.

“내가 당신 가문의 사업 하나 망하지 못하게 할 거라고 자신하나요? 크라이 남작 영식. 사업이 요즘 힘들어 적자가 크다고 하던데……. 반면 치고 올라오는 경쟁자로 헤밀 백작가가 있다죠?”

“다, 당신이 어떻게 그걸.”

“나는 힐링턴이에요. 내게는 썩어나는 게 돈이랍니다.”

알겠다. 분한 듯 올려다보는 눈 속에는 분명 나를 향한 선명한 악의가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는.

‘어째서지?’

누가 보면 내가 크라이 남작가 사람에게 큰 해라도 끼친 것처럼 보이겠다.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터졌다.

악의를 가지려면 내 쪽에서 가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상한 핑계를 대며 파트너 신청을 거절한 건 그쪽 형이었다고.

“어쨌든, 당신 집안 형제들이 나나 로제와 춤을 추는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 같군요.”

눈빛이 걸리긴 했지만, 날 떠보려는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답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힐링턴을 함부로 건드리면 물어요, 라고.

바로 그때였다.

‘어?’

우연일까. 하지만 저런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귀족들의 화려한 연회장을 지나 조용하고 어두운 테라스 쪽으로 걷는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저건 분명.

‘최고 신관, 크라이스?’

내게 다정한 말을 해주었던 그 신관님인 것 같았다. 하지만 함께 초대되었던 신관들은 연회 둘째 날에는 참석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했었는데.

‘잘못 본 걸 수도 있지만.’

나는 이쪽을 보며 또 속살거리면서 눈치를 보고 있는 연회장의 귀족들을 한 번, 크라이스가 사라진 테라스 쪽을 한 번 바라본 뒤 결심했다.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이들의 눈이 지긋지긋했다. 저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크라이스는 한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던 상대이기도 하니까.’

테라스 쪽으로 움직이기로.

*

힐데아 폰 힐링턴에게 집적거렸던 남자가 그대로 기겁하며 쓰러진 것을 모두가 보았다.

대체 왜 쓰러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정강이를 부여잡고 있었다.

모두가 잠시 생각했다.

‘설마 구두로 정강이를 찼나?’

하지만 질릴 정도로 우아한 표정을 하며 냉담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힐링턴 영애의 옆모습을 보면 그녀가 그렇게 했을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귀족들은 궁금증이 목구멍까지 닿았다.

힐데아가 고개를 숙여 남자에게 무어라 속살거리는 것이 보였으나 말이 들리진 않았다.

그런데 남자가 점점 경련하듯이 부들부들 떠는 게 아닌가. 만취한 사내를 말 하나로 제압하다니?

더 무서운 것은 바로 그 뒤의 일이었다.

졸도라도 할 듯 파랗게 질린 남자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쥔 채 홀로 남겨진 순간.

힐데아 폰 힐링턴이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차가운 시선으로 연회장을 훑어보다가 테라스로 떠난 순간.

콰직-

‘지금 무슨 소리?’

2층에서 내려다보던 힐링턴 공작의 옆에 있던 사람들은 와인잔이 저렇게 종이짝처럼 찢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힐링턴 공작을 바라봤다.

“고, 공작 각하?”

“…….”

“왜 그러시는지…….”

여태까지 딸이 모욕당하는 것을 냉담하게 잘 지켜만 보고 있었으면서 이번에는 왜?

아. 혹시 저자가 힐링턴 가문에 모욕을 던졌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

주변의 사람들이 그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말을 얹었다.

“고정하세요, 공작 각하. 뭐, 아무래도 축언과 이능에 대해 좋은 평가가 따르지 못하면 저렇게 시비를 거는 이들이 간혹 생기고도 하니까요.”

“……지금 뭐라 했지?”

공작의 서늘한 시선이 말을 내뱉은 이에게로 향했다.

눈으로 쌍욕을 하는 것 같은 험악한 시선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그는 마음껏 떠들었다.

힐링턴 공작이 첫째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에 이 기회에 열심히 떠들어 고위 귀족인 힐링턴 공작의 눈에 들고 싶은 치기였다.

‘황제도 황태자의 모자란 점을 이야기하면 그리 즐거워하고, 황후도 황녀의 못된 점을 이야기하면 기꺼워하며 옆에 둔다고 했으니까.’

힐링턴 공작도 같겠지.

“로제리엘 영애와는 아무래도 비교되는 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찔러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으신 분이니 그건 참 다행…….”

“내 딸을.”

그제야 떠들던 이는 깨달았다.

주변에서 그와 몇 걸음이나 떨어지며 자신은 이 자와 같은 일행이 아닙니다, 라고 주장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단 걸.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힐링턴 공작의 눈은.

‘씨, 씹어먹을 것 같잖아.’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히, 히익!”

“누가 내 딸을 그따위로 평가질하라고 하였지? 그것도 내 앞에서?”

“고, 고, 공작 각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을 두고 그따위 망발을 지껄였다는 건, 내게 그대의 가문을 짓밟아 달라 청원하는 건가?”

살벌한 침묵과 함께 남자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철퍼덕 떨어뜨렸다.

비슷한 상황은 아래에서도 펼쳐지고 있었다.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그는 주변을 얼려버릴 것처럼 살벌한 기운을 풀풀 풍겼다.

어떻게든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춤을 추고 싶어 주변을 돌던 영애들이 꺄악 비명을 지르며 물러날 만큼.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멀끔한 신사처럼 보이는 저 젊은 청년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말이다.

‘귀신 공작.’

아까 전에 힐데아 폰 힐링턴의 손을 잡고 춤을 출 때의 공작은 꽃잎을 밟고 있는 듯이 신사적이었는데, 지금은 날 것 그대로의 짐승처럼 풍기는 살기가 소름 끼쳤다.

가브리엘이 성큼성큼 움직인 것도 그 순간이었다.

제게 쏟아지는 시선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크라이 남작가의 둘째 영식이 도망치려고 하는 그 순간.

콱-하고 달아나는 짐승의 목덜미를 낚아채듯이 가브리엘이 영식의 목덜미를 쥐었다.

*

크라이 남작 영식은 도망치던 자신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잡힌 목덜미에서 끄윽 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축이라도 된 기분이라 끔찍하게 수치스러웠다.

“누, 누, 누가!”

“시끄러워.”

그의 얼굴 옆으로 다가온 이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네놈이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런데 감히 힐데아에게 접근을 해? 염치도 없군.”

“……!”

크라이 남작 영식은 모든 버둥거림을 멈추었다. 심장이 얼어버릴 것 같아서.

“다, 당신이, 끄윽, 당신이 왜-”

악마의 속삭임처럼 작은 목소리가 오로지 그의 귓가에만 흘러들어왔다.

“주제도 모르고 제 형의 일에 앙심을 품고 황제가 내건 제안을 납작 받아들였겠지.”

“그, 그건!”

서늘하게 웃는 기척이 또렷했다.

하지만 벨키우스 공작이 웃을수록 그는 숨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제발. 제발 살려줘. 누가.

황제의 제안을 수락한 계기는 간단했다.

어느 날, 자신이 존경하던 형님의 다리가 부러졌다. 양다리가 다.

‘형님, 형님! 감히 누가!’

얼굴은 얼룩덜룩 멍자국이 가득했기 때문에, 누가 봐도 타인에게 큰일을 당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형님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억울하고 화가 나는 마음에 형님의 주변을 조사하다, 형님이 소속된 클럽의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꼴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것도 모두.

‘힐데아 폰 힐링턴에게 파트너 신청을 거절하고 난 다음에 말이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고위 귀족이라도 이렇게 핍박을 하다니?

억울한 형님을 위해, 황제가 그런 제안을 했을 때도 영광스럽게 여기며 덜컥 받아들였다.

-그대가 해줄 것은 간단하다. 힐데아 폰 힐링턴을 도발할 것.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 뒤로 황궁의 연회 일체 초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형님과 형님의 클럽 사람들을 다시 사교계에 복귀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을 대가로 황제에게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움직였을 뿐이다.

복수심도 담아.

‘커억!’

그랬는데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억울하다 외치는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목을 억죄는 벨키우스 공작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 클럽의 회원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몰랐나?”

심장이 쿵 떨어졌다.

“팔다리가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을 텐데.”

그걸, 그걸 이 남자가 어떻게 알고 있지?

“웃기는군. 고작 내 목소리에 그렇게 떠는 주제에, 힐데아는 쉽고 만만해 보였나?”

그리고 벨키우스 공작은 미련 하나 없다는 듯 그를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다시 한번 사람들의 시야 속에 나뒹군 크라이 영식의 얼굴은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보았다.

당장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가브리엘이 이곳에 저를 바라보고 있는 모두에게 경고하는 것을.

“바로 이게.”

벨키우스 공작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의 하체를 가리키는 것도.

“미엘르 제국 사교계에서, 감히, 힐데아 폰 힐링턴 영애를 모욕한 자의 최후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는 그제야 알았다.

제 아래에서 뜨뜻한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는 걸!

“맙소사, 지금 저 영식, 실례한 건가요?”

“으, 더러워……. 어쩜 저렇게 추태를 부릴 수가.”

경악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며 떠올렸다.

‘아.’

형에 이어 이제는 자신까지 다시는 사교계에 얼굴도 내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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