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깨닫고 싶지 않았다 (1)
내가 무슨 환상이라도 봤나?
허벅지까지 길게 내려오는 긴 은발의 남자, 흰색의 사제복을 입고 있는 이가 또 있을 것 같진 않았는데.
‘여기에 비밀 통로가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꽤 한참동안 테라스를 구석구석 살폈는데도 크라이스는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실망하기도 했고, 돌아갈 생각도 없고. 그 인파를 뚫고 로제를 찾아가도 힘들 것 같았다.
“그냥 쉬자.”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으로 빈 테라스 공간을 찾아 들어갔다.
“우와.”
역시 황궁. 테라스 하나도 방치되어 있지 않고 엄청나게 예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화분들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능을 발휘하고픈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괜히 여기서 능력을 쓰다가 꼬투리 잡히면 곤란하니 참아야겠지.
무거운 커튼을 내리자 공간이 갈라진 듯 편안해졌다. 보는 눈이 없으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푸욱 내쉬어졌다.
“아아,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귀족들은 해사하게 웃고 있지만, 속에는 다른 생각을 숱하게 하고 있었다.
‘단체로 이중인격자들도 아니고.’
아까까지 헐뜯으며 노려보던 자들이 공동의 목표가 생기니 어찌나 협력을 잘하는지.
그런 이들보다야 차라리 무표정한 힐링턴의 시녀 언니들이 백배는 더 낫다.
아무도 안 보니 신발이라도 벗고 주무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힐링턴? 정말 웃기지도 않아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를 찌른 것은.
앙칼지고 쩌렁한 목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었다.
그리고.
‘응? 우리 가문?’
뭐야. 대체 누가 이렇게 예의 없게 다 들리는 곳에서.
힐끗 바라보니 옆 테라스에서 커튼을 훤히 쳐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알록달록한 화려한 옷이 보였고.
아.
난 오만상을 찌푸렸다.
왜 하필 내 옆의 테라스에서.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있나.
다른 데 가줘요, 다른 데! 모른 척할 테니까!
들리지 않는 소원을 속으로 마구 부르짖었지만, 그녀들은 내가 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떠들었다.
“흥, 벨키우스 공작 각하를 어떻게 꼬신 것인지는 몰라도, 좋은 방식은 아니었겠죠. 공작도 그래요. 감히 황녀 전하를 앞에 두고 그리 행동하신 건 좋게 볼 수가 없네요.”
“그 자리에서 가장 빛났어야 할 분이 바로 황녀 전하이신데 말이에요. 그렇지요, 전하? 황제 폐하께서도 오늘 일을 어떻게 보실지.”
연회장에서 언제 옮겨온 것인지 모를 황녀 라피이아와 그런 그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아가씨들이었다.
전형적인 황제의 지지 세력들.
나는 그녀들의 얼굴을 하나둘 눈에 담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 권력 구도에는 관심 없으니까, 힐링턴이나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 중 빨간 머리가 무척 독특했던 통통한 인상의 영애가 황녀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걱정 마셔요, 전하. 저희만 믿으세요. 그 가증스러운 영애가 더는 날뛰지 못하도록 저희가 본때를 보여주겠어요.”
그 가증스러운 영애가 누구일까.
“아무리 무,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대 다수는 이길 수가 없는 법이니까요.”
“맞아요. 여인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꼴이 제법 불쌍하기까지 했으니까요.”
“무대만 마련해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잘 해보겠어요, 전하.”
정작 라피이아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데 주변의 영애들이 날개를 파닥이는 참새처럼 여러 가지를 떠들고 있었다.
여기서 불행이 있다면 하나.
‘아무리 봐도 저들이 이야기하는 게 나인 것 같은데.’
힐링턴. 가증스럽게 공작을 꼬여낸 영애. 황녀를 모욕한 여자. 여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꼴…….
‘그래. 이런 상황 익숙해, 익숙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던지는 뒷담화를 듣는 것이 익숙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기분 좋진 않았다.
차라리 옆에 누가 있다는 표시라도 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멈칫, 커튼을 쥐고 있는 손이 움찔했다.
지금…….
‘나랑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분명히 라피이아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눈을 깜빡이며 바라본 그녀는 우아한 태도로 제게 떠드는 이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닌가?
갸웃거리는 순간 라피이아가 입을 열었다.
“크라이 남작 영식을 보아하면, 그대들이 떼로 몰려들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닌가. 그대들의 눈에는 달랐나요?”
“그, 그것은.”
“그 일은 정말…….”
영애들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는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크라이 남작 영식이면 내가 망신 주고 넘어지게 한 작자 아닌가.
“공작께서도 그리 행동하실 줄이야…….”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공작이라는 게 누굴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설마 내가 떠난 뒤에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로제에게 나중에 물어봐야겠네.’
아무튼 그 이후로도 간간이 내 험담을 섞어가며 재잘거리는 영애들은 내게 많은 정보를 주었다.
저들은 처음부터 가브리엘과 황녀의 첫 춤을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황제의 뜻이며, 가브리엘과 황녀의 혼담을 추진하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
‘좀 조심성이 없네요, 영애들.’
결국 로제의 앞날에 먹구름이 짙게 꼈다는 이야기나 다를 바 없어서, 탄식이 흘렀다.
어째서인지 원작보다 더한 흐름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근데 한편으로는 우리 로제가 저 영애들에게 질 것 같지도 않아서…… 기분이 오묘했다.
“그런데 힐링턴의 쌍둥이 자매 말이에요.”
왜 또 내 화제야.
그냥 커튼을 굳건히 치워버리고 모른 척 잠이라도 잘까 고민했을 때.
“너무 다르지 않아요?”
“역시 다들 느끼셨나요?”
“축언도 그렇잖아요.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때 소름이 돋았어요. <정해진 운명이 없다>라니. 그게 무슨…….”
응, 그럼 그렇지.
우려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주제가 튀어나왔다.
저럴 때 보면 주변에서 불씨에 부채질을 하는 기분이다.
동생이 저렇게 밝고 귀여운데, 너는 왜 이렇게 음침하니!
그러니 너는 얼른 너의 밝은 동생을 질투하려무나. 질투해서 악녀의 새싹이 되렴!
이따위로 말이다.
‘우리 로제리엘은 확실히 사랑스럽지.’
아까도 볼이 미어터져라 케이크를 냠냠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후작 부인이 보면 분명 삼일 내내 잔소리가 펼쳐질 거야.’
“그 목걸이요.”
나는 기어코 신발을 벗어던지려다 멈칫했다. 목걸이?
나는 허전한 목덜미를 반사적으로 매만지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목걸이가 여기서 또 왜 나와?
아아, 자매가 비슷하게 생긴 목걸이를 하고 나와서 이상하다는 소리인 걸까?
“그 목걸이도 동생의 것을 탐한 언니 쪽이 자신도 그리 해달라 욕심 부린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뭐요?!
나는 억울함에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저게 다 무슨 소리야.
이봐요, 언니들. 아무리 날조를 해도 정도가 있지 그건 아니잖아요……?
싫다는 내게 로제가 극구 목걸이를 걸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혈압이 치솟는 것 같다.
“증거도 있어요, 황녀 전하. 춤을 추는 내내 벨키우스 공작님의 표정이 어떠셨는지 보셨잖아요? 분명 끔찍한 상대를 보듯, 여기 미간에 힘을 주고요.”
남들이 보기에도 그랬구나.
가브리엘의 표정이, 그랬구나.
‘아파.’
아까 전까지는 꽤 흥미진진한 기분까지 섞어 들을 수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 화제는 심장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남겨져 피를 흘리는 기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연회장에 가브리엘과 지척에 있던 내내 들었던 이상한 기분이 또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더는 안 되겠다. 진짜 듣지 말자. 차라리 내가 다른 테라스 쪽으로 옮기는 게 낫겠어.
그렇게 결심하면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
테라스의 커튼이 천천히 걷히고, 누군가가 내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왔다.
그림자처럼 조용한 그 움직임에 옆에서 떠들던 영애들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들어온 이는 나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쳤다.
고요하고 조용한 보라색 눈동자.
내가 선물한 커프스 버튼과 꼭 같은 색.
아니, 그 커프스 버튼을 고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어째서일까. 그의 얼굴이 조금은 슬퍼 보이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잖아.
‘쉿.’
그가 손가락을 들어 뭐라고 말을 하려던 내게 침묵을 종용했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지?
의아하게 바라보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어딜 가나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꽤 큰 목소리였다.
보지 않아도 옆에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기겁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가브리엘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나만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또, 저런 시선으로.
*
그녀를 쫓아 테라스로 온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어떻게 뒤따라 들어갈 수 있을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 선명한 험담이 들려온 것은.
‘하, 감히.’
가브리엘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섰다. 당장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 윽박지르고 싶었다.
저 여자들을 힐데아 옆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너희들이 뭔데 나의 소중한 힐을 험담하는지 화를 내고 싶었다.
“…….”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걱정이 되어 결국 테라스 안을 살짝 들여다봤을 때.
보게 된 힐데아의 옆모습 때문이었다.
‘외롭다.’
힐데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웃음도, 울음도 없었다. 차갑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왜 그런 눈을 합니까, 힐데아 영애.’
저 여자들이 뭐라고.
‘대체 왜.’
자신을 험담하고 있는 이들을 체념하듯 바라보고 있는 텅 빈 눈동자를 보았을 때.
가브리엘은 자신의 심장이 터져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슬픔에 동조하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손을 잡고, 안아주고 싶었다. 위로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가브리엘은 마침내 결심한 뒤, 테라스 안으로 불쑥 몸을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