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깨닫고 싶지 않았다 (2)
역시나 힐데아는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순간 깜짝 놀란 뒤 곧바로 차가워지는 얼굴을 목격하니 가슴이 더욱 욱신거리며 쑤셨지만.
‘오늘은 안 돼.’
그래도 평소처럼 물러날 수 없었다. 힐데아의 외로운 눈을 보고야 말았으니까.
‘혼자 두고 싶지 않아.’
혼자 그렇게 슬퍼하지 마십시오, 힐. 제가 옆에 있지 않습니까. 비록 당신이 날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당신도 너무 좋으니까.’
더는 편지로 보내는 말뿐인 위로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에 만족한다.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직접 위로할 수 있었다.
일단…….
‘저 거추장스러운 것들 좀 치워버리고 나서.’
가브리엘은 사납게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그쪽에만 전달되도록 은밀하게 서늘한 기운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어딜 가나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옆에서 보이지 않는 칼로 힐데아를 찌르고 있던 여자들을 향해서.
*
뭐야. 나는 눈을 깜빡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진저리 날 정도로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가브리엘이다.
응, 가브리엘이야.
근데 지금 날 도와준 건가?
저 사람이?
아니 왜 그가 여기에 있지?
‘이상해. 왜 로제의 곁에 있는 모습을 통 볼 수가 없는 것 같지…….’
그래, 어쨌든 그가 날 도와줄 순 있었다. 감사의 인사를 내뱉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고개를 숙이고 인사라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가브리엘은 나가지 않았다.
“저, 가브리엘?”
항상 눈을 마주치거나, 오래 곁에 있으면 불안해하는 사람이었으니 이런 테라스 공간에 나와 함께 있는 상황 자체를 피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까 전의 험담 때문이었을까.
가브리엘은 오히려 멀어지기는커녕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영애들에게 들리도록 말할 때와는 제법 차이가 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정말 이상하다. 뭘 저렇게 조심스럽게 묻지. 의자는 어차피 하나 더 있……긴 한데.
나는 떨떠름한 얼굴을 지우지 못하고 하나 남아 있는 의자를 보았고, 가브리엘도 의자를 보았다.
“…….”
“…….”
우리 둘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다른 테라스보다 공간이 작은 곳이라 그런지 구비되어 있는 의자도 많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앉은 것이 길고 커다란 의자였기 때문에, 남은 것은 체구가 작고 어린 소년, 소녀들이 앉을 법한 의자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저 의자는 딱 보기에도 가브리엘이 앉기에는 너무 작았다.
난 얼른 일어나려 했다.
“잠시만요. 가브리엘, 제가 앉아 있는 의자를 양보해 드리겠…….”
그가 바로 움직이지만 않았다면.
“아닙니다.”
“네?”
“가만히 앉아 계세요. 청한 것은 저이니 당신께 불편함을 드릴 순 없습니다.”
“…….”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순간 상황도 잊고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 어떡하지?’
내쫓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가 냉큼 의자 위에 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란.
‘귀엽잖아.’
그는 어떻게 보아도 유약한 덩치는 아니었다. 체구가 꽤 컸다.
보기 좋게 예쁜 근육을 갖고 있어서 정장핏이 근사했지만, 분명한 것은 굉장히 단련된 육체를 지닌 기사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깨가 무척 넓고.’
그런 자가 어린 귀족 자제가 사용하도록 놓인 의자 위에 앉은 것이 너무 재밌어서.
근엄한 얼굴 위로 떠오른 난감함이 선명하게 보여서.
그리고 그가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서.
난 헛기침을 하며 웃지 않기 위해 눈을 굴렸다.
“흠, 괜, 괜찮으세요? 많이 불편해보이시는데…….”
“괜찮습니다.”
하지만 난 봤다.
그의 목덜미가 하얀 얼굴와 대조적으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눈이 마주치자 그는 간곡하게 호소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러니 남겠습니다. 아직 주변에 누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나가라 하시더라도…….”
“어, 저도 내쫓을 생각은 없었는데…….”
“…….”
그래, 우리 사이가 이렇게 어색한 것은 그의 탓만은 아니다.
나도 좋은 표정을 하지 못하니까.
‘리라와 내가 서로 웃음을 전달하지 못하는 사이이듯, 아빠와 내가 서먹한 대화 외의 편안한 말을 주고받지 못하는 사이인 것처럼.’
그리고 절반의 책임은 내게도 있는 것이다. 꽤 서글퍼졌다.
앞으로도 가브리엘과 나의 거리는 딱 이 만큼일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 인지가 쓸쓸했다.
생각에 잠긴 그때였다.
“힐데아.”
“네?”
“손을.”
“아.”
그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헉.’
순간 당황했지만, 손을 휙 거둘 수가 없었다. 그도 어쩐지 놀란 것 같았다.
당황해 허둥지둥 말한 것은 나였다.
“추, 춤을 같이 추었을, 아니. 에스코트 때문에 익숙해졌나 봐요. 로제가 있으면 엄청, 엄청 웃었겠네요.”
어설프게 말하며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닿는 그의 손이 저번처럼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만큼 내 손은 차갑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손을 놓는 게 좋…….”
“아니요.”
“……네?”
물리려고 했을 때,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손을 감싸듯 움직였다.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의 시선에 내가 잡힌 기분이었다.
“지금도 손이, 차갑습니다.”
“아.”
“제 손은 뜨거우니 딱 맞습니다.”
가브리엘은 춤을 출 때의 대화를 떠올리게 하는 말을 내뱉었다.
또. 또다. 아득해지는 기분.
내가 누구이고, 앞으로 무엇을 하려 했고,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온갖 이성적인 것들을 다 깨부수는 느낌.
“힐데아. 혹시 오늘 같은 일이 자주, 있었습니까?”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온 정신이 그와 잡은 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꽤 시간이 소요되었다.
오늘 같은 일.
아, 황녀와 그 무리가 나를 헐뜯은 일?
“아니요, 자주는 아니에요. 힐링턴의 영애에게 대놓고 배짱 좋게 험담할 수 있는 자들은 많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분명, 편지에서는.”
어?
“편지에선 간혹 적으셨습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지금 편지라고 했어?
“그래서 그런 일이 자주 있었던 것 같아서……. 혹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이름은 또 왜?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요.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건 왜, 아니 자주 있던 것은 어찌 아시고.”
아, 대필했던 사람이 내용을 전해주었긴 했겠구나. 그렇게 납득하려고 할 때.
“압니다. 편지에 정확히 46번 적으셨습니다.”
“……네?”
물었는데 나온 답이 저거였다.
그는 혀를 깨문 것 같은 표정을 했고,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어서 숨만 내쉬었다.
뭐, 46번?
그건 쓴 나도 모르는 숫자인데?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금 가브리엘의 말뜻을 보면.’
편지를 쓴 게 그 자신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대필을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적은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사람의 느낌.
잡고 있는 손이 유독 의식되었다. 당장 놓고 싶은 기분도 들었고, 더 꽉 잡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울 것 같았다.
정말 그 편지가 가브리엘과 내가 주고 받은 것이라고.
그가 읽고, 쓴 거라고.
“믿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합니다. 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요하게 외운 것은 아니고……,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은 것도 아닙니다.”
“…….”
“정말, 입니다.”
그는 눈을 굴렸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이유를 다른 것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가슴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불씨가 화르륵 불타올라 피부를 타고 번져 나간다.
이성으로 무장한 머리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깊이깊이 담겨 있던 투명한 병의 코르크 마개를 꿰뚫고, 차곡차곡 쌓아왔던 감정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 아아.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영애의 하루는 어땠습니까? ……라고 말하기엔 같은 곳에 있었으니 알맞은 물음은 아니겠습니다.”
“그건, 편지에 항상 있던 말인데…….”
멍하니 중얼거리자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꾸했다.
“네. 제가 쓴 것이니까요.”
그가 쓴 것.
그 말은 나를 완전히 쓰러뜨렸다.
‘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총천연색의 감정들이 나를 휘감아 몰아쳤다.
12년. 무려 12년의 세월 동안 많은 것들이 오갔다.
편지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하며 쌓였던 감정들을 묻었고, 지웠고, 모른 척했다.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 편지를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계속 다시 읽어보게 될까 봐 굳게 닫은 서랍 안에 켜켜이 쌓아두게 되었다는 것을.
사실은 누구도 보지 않을 때 아주 조심스럽게 열어 읽으며 웃곤 했다는 것을.
대필이야.
가브리엘, 그가 아니야.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로제리엘을 배신한 것이 아니야.
그랬었는데.
“제 위로가 닿을지 모르겠지만, 저런 자들의 말은 영애에게 흠결을 낼 수 없습니다. 굳이 담아두지 마십시오.”
냉소적인 옆모습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대화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를 편지에서 나눈 적이 있다.
더는 그 싸늘한 옆모습을 보며 담담할 수가 없었다.
‘왜.’
편지에서 내가 서글플 때, 담담한 척 괴롭지 않은 척할 때, 그는 항상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위로했다.
당신을 흔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낫다고 해서 그것을 부끄러이 여기실 필요도, 분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는 곧 낫기 마련입니다.
좋은 사람, 좋은 시간, 좋은 생각들로.
그러니 되새기고 곱씹지 마세요.
저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기쁠 것 같습니다.
그 다정했던 위로.
그게 당신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