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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63화 (63/155)

<63화> 깨닫고 싶지 않았다 (3)

혼란한 순간, 가브리엘이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꼭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주 살짝 눈에 미소를 그리며.

“재밌군요. 이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주고 받은 적이 있었는데.”

“……!”

“기억하십니까?”

그가 웃었다. 날 보고.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하필 저렇게 웃어?’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깨달았다.

이 감정의 시작은 아주 오래전이었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순간마다 스며들고 있었다는 것을.

‘당신은 가랑비같이 내게 다가왔던 거야.’

이미 오래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편지들이 소중해지고야 말았던 시점이 바로 그 순간이었던가 싶었다.

바보같이 그걸 몰랐어.

그래서 날 위해주는 로제를 보면서도 가슴이 따끔거리고, 둘의 행복을 생각하면 속이 불편했구나.

선명한 깨달음이 가슴을 후볐다.

나는.

‘어떡해.’

나는 가브리엘을.

‘어떡하면 좋아?’

나는 그를 사랑한다.

*

힐데아는 말이 없었다.

차분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공기는 시원했고, 가끔 들이쬐는 등불빛으로 반사되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그저 좋고, 행복하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이 익히 보던 약초라는 것을 깨달았다.

“라밀라 꽃은 효용성이 많지요.”

이게 아닌가? 하지만 힐데아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다시 봐도 라밀라 꽃이 맞았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조마조마하게 보는 순간이었다.

“라밀라 꽃의 효능을 알고 계세요?”

“네, 잘 압니다. 헤델 로제르사 황녀가 저술한 <식물대백과사전>의 1233페이지의 세 번째 줄에 나오는 약초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잎과 뿌리는 갈아 마시면 간을 건강하게 하고, 눈을 보호합니다. 하지만 차가운 성질을 지니고 있어 위가 좋지 않은 사람은 주의를 해야 하고, 솔레테 검은 씨앗과 함께 복용하게 되면 장을 상하게 하는 독약이 된다는 것까지…….”

그는 열심히 약초와 꽃들에 대해 익힌 지식들을 줄줄 내뱉었다.

고삐 풀린 입이 또 미친 사고를 저지른 것이었다.

내뱉고 나서야 얼마나 미친놈 같았을지 생각하며, 수줍어졌다.

걱정이 앞섰다. 차마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겠다.

오로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니 그녀가 보는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서 공부한 것들일 뿐인데 괴짜로 보면 어떡하지.

당신이 좋아한 것이니까 알고 싶었어.

떨리는 목소리가 바보처럼 들리지 않을까.

“가브리엘.”

“네, 힐데아.”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얼른 바라보니, 그녀는 고요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라면 눈이 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건 저도 모르는 지식이네요.”

아, 이게 아닌데.

“무척 해박하세요, 가브리엘. 감탄했을 정도로요. 누가 보면…… 몇 개월이나 그 책만 계속 외운 사람 같아요.”

그건 정답이라 경악했다.

몇 개월이 뭔가, 일 년 넘게 붙들고 있었다.

사진만 보고도 정확히 약초의 이름과 성분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덕분에 전쟁터에서도 그러한 지식이 본의 아니게 유용하게 쓰인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자라는 신비하고 희귀한 약초들을 따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알아볼 눈이 필요했다. 다치지 않게 그것을 채취하는 기술도.

“일 년까지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독 얼굴에 와닿는 것 같은 힐데아의 시선에 그는 뺨이 불타버릴 것 같았다.

이 시선도 착각이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뇌면서도 그는 힐끗 힐데아를 봤고, 눈이 다시 마주쳐 잡은 힐데아의 손을 압박할 뻔했다.

‘힐데아는.’

달빛이 내리는 그림자 때문에 힐데아의 속눈썹이 더욱 길게 보였다.

‘왜 저렇게 빛나는 거지?’

만지면 부드러울까.

“그건.”

솟아오른 욕심을 억누르며, 가브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곱고 풍성한 속눈썹을, 솜털이 보일 듯한 투명한 흰 뺨을 만지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불현듯, 멍한 목소리의 힐데아가 말했다.

“저는 당신이 보낸 편지가 아닌 줄 알았어요.”

아, 무슨 말인지 이해를 했다.

가브리엘은 치밀어 오르는 수줍음을 감추려 노력했다.

편지의 말투가 자신의 것과 퍽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녀의 앞에서는 바보처럼 긴장해 매번 어색해지는 것과는 달리 문장은 그런 장애물이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유려하고 부드럽고 나긋한 말씨를 쓰려 노력했다.

“많이, 부족하고 어색해서 이상하셨습니까.”

“……아뇨. 부족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왜, 왜 저한테도 보내셨어요?”

왜냐니.

처음부터 힐데아에게 보내려던 것인데.

전쟁터에 도착한 첫날부터, 그녀에게 보낼 첫 번째 편지를 쓰는 순간만 기다렸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왜 편지를 많이도 보냈냐는 뜻인가 싶어서 슬퍼졌다.

그래도 힐데아, 그건 제 일과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쓸 말이 없어서,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요.”

“전쟁터의 일은 삭막하고 재미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편지를 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런데 왜…….”

로제리엘에게 가는 것이야 다른 이들에게 대충 시키는 정보를 모은 것들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직접 쓰더라도 서로 온갖 것들에 대한 증빙, 거래, 요구사항들이었다.

“좋았습니다.”

“네?”

가끔 그 서신 속에 함께 날아오는 힐데아의 그림을 보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졌지만.

어쨌든, 하나 하나 고심하며 써내려간 힐데아에게 보내는 편지와는 천지 차이였다.

그것을 힐데아도 알고 있을까?

그래도 그만큼 노력하고 정성을 들였다는 걸 알아주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

“편지를 쓰는 순간이 좋았습니다.”

그는 조심스레 용기를 냈다.

“힐데아, 당신에게 제 편지는 어땠습니까?”

당신에게도 좋았나요?

*

더는. 더는 착각하게 될 것 같았다.

왜 저런 얼굴로, 진지하게 염원하는 것 같은 시선으로 저런 오해할 말을 한단 말인가.

“손을.”

“예?”

“손을 놓아주세요.”

단호하게 말하자 따뜻한 체온이 물러갔다.

그리고 곧바로 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가렸다.

“……힐? 그렇게 싫으셨…….”

“그 편지.”

손가락 사이로 어쩐지 일그러지는 가브리엘을 본 것 같았지만 내 감정만으로도 너무 폭풍 같아 살필 수가 없었다.

욱신거리는 심장이 과부화에 걸린 듯 고통을 호소했다.

착각을 멈춰.

인정해.

짝사랑에 흠뻑 빠져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있는 중이라는 걸!

“저도.”

하지만 이 말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도 좋았어요.”

그 편지는 정말 나의 구원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위로이자, 유일한 소통구였기 때문에.

“정말, 이십니까?”

“네, 좋았어요.”

“…….”

흔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꼭 내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 착각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달콤한 착각.

나는 더 깊이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의 말을 차분히 들어준 사람은 편지 속의 당신밖에 없었기 때문에.

속마음을 솔직하게 용기를 내어 말할 수 있었던 순간도 그때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유일했어, 가브리엘.

그게 나는 지금 절망스러워.

‘내 사랑은 꺼내지도 못하고 지게 생겼구나.’

나는 그에게 고백할 생각이 없었다. 파도처럼 일어난 내 감정들을 입 밖에 꺼내 풍랑을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특히 내 로제가.

우리 로제가.

상냥하게 눈을 휘며 언니야! 를 외치는 그 밝은 아이가 눈물짓게 될 것이다.

난 그런 꼴은 절대 못 봐.

“그럼, 제가 용기를 내도 되겠습니까?”

가브리엘이 무어라 하는 말이 귓가에 닿진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좋아합니다.’

정원에서 몰래 만나던 로제와 가브리엘.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나.

밤늦게 만난 로제를 향해 그렇게 말하던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나 화살처럼 꿰뚫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우리 로제를 두고 이래.’

굉장히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마음이 호수라면 지금 내 호수의 물결은 당장 터질 듯이 일렁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 그는 말했다.

로제에게 사랑을 고했어. 청혼을 이야기하기도 했지. 내 동생과 결혼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야.

‘정신 차리자.’

원래 모두가 양방향의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힐,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난 추하게 사랑하는 로제리엘까지 질투하고 싶지 않았다.

더 커지기 전에 자르면 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져야 하는 내 사랑이 제법 쓸쓸하고 가여웠지만, 그래도.

난 현재가 소중했다.

“제가 ……일로 당신에게, 용기를 내도 괜찮겠습니까?”

날 거북해하는 남자에게 감정을 내비치며 더 어색해질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제일 슬픈 건.’

이렇게 단호하게 결심을 하면서도, 감정이라는 것을 가위로 오려내듯 단호히 잘라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왜 하필 당신일까.

왜 로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지?

왜.

그런 속상한 감정을 삼키며, 겨우 대답을 했다.

“네.”

그 전의 그의 말이 무엇인지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해요, 가브리엘.”

당신과 로제의 결혼을 응원할게.

“저는 다 좋으니까.”

어째서 그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지도 모르면서 내 감정 속에서만 허우적거렸다.

그것이 그와 나 사이에 벌어진 오해들 중, 가장 큰 첫 번째 비틀림이었다.

*

황녀 라피이아는 조용히 기둥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 야릇하게 입술을 휘었다.

지금까지 본 것이 맞다면, 아주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제일 잘난 듯 오만하게 굴던 네놈도 못 보는 것이 있었구나.’

같은 공간에, 분명 서로를 보며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대화는 엇나갔다.

가브리엘은 자신의 감정에만 취해있었고, 그건 힐데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제 아비로 인해 여러 눈치를 살피며 살아왔던 황녀는 그 감정의 불일치를 정확히 읽었다.

저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도.

‘기대하렴, 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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