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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64화 (64/155)

64화. 죄책감은 불꽃처럼 번졌다

긴 연회를 마치고 힐링턴의 사람들은 모두 저택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다른 풍경이 하나 있었다.

주인을 마중 나왔던 힐링턴의 사용인들도, 제 언니의 옆에 따라 내리던 로제리엘도, 눈치를 보며 따르던 힐링턴 공작도 모두 당황하고 있었으니까.

모두 한 사람을 보며.

멍한 표정의 힐데아를 보며!

“언니야?”

“……흠흠, 힐, 왜 그러느냐?”

“…….”

“어, 언니?”

언제나 똑부러진 힐데아 폰 힐링턴. 힐링턴의 자랑이자, 사랑스럽고 우아한 아가씨.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대꾸를 안 했다.

원래도 힐데아는 힐데아 앞에서만 우물거리며 말하는 공작 때문에 간혹 제 아비의 말을 못 듣고 무시할 때는 있었으나, 로제리엘의 말을 무시한 것은 처음이었다.

“언, 니……?”

당혹스러운 시선이 여러 번 교환되었다.

하지만 로제리엘이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힐데아는 걸어 올라갔다.

“먼저 들어갈게요.”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

뚜벅뚜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영혼이 가출이라도 한 사람처럼 흔들리는 발걸음.

그 모습을 보며 힐링턴 공작이 눈에 띄게 어두운 낯으로 중얼거렸다.

“이 아비에게 더 쌀쌀해졌구나. 이게 다 그놈의 에스코트 때문에 그런 것…….”

그리고 눈치 없는 그 말에 로제리엘에게 팔뚝을 맞았다. 찰싹!

섭섭한 표정을 가득 지은 힐링턴 공작은 맞은 곳을 문질렀으나, 로제리엘은 두 눈을 서슬 퍼렇게 떴다.

“언니가 왜 그러지? 짐작 가는 거 있는 분?”

“저요. 아마도 벨키우스 공작님과 마차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리라가 무뚝뚝하게 내놓은 의견에 사람들의 눈에 모두 벼락이 쳤다.

뭐라고?

가브리엘이 우리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우리 우아한 아가씨가 저렇게 넋이 나가실 정도면.”

공작이고 나발이고 당장 달려가서 머리털을 볶아버릴 것 같은 살벌한 시선에 주군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곳에 서 있던 벨키우스 공작의 부관, 디안만 부르르 떨었다.

‘무서워!’

그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노려보듯 꽂혔기 때문이다.

특히 로제리엘의 시선이 사나웠다.

“말하세요. 아시는 것 있으면.”

“저, 저,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디안은 가엾게 떨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무서워? 상대는 전쟁터의 귀신 공작이잖아……!

그 반응을 보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 시녀들이 파들파들 떨었다. 그리고 짹짹대는 참새들처럼 시끄럽게 소리쳤다.

“설마…… 파렴치하게!”

“아가씨의 손이라도 잡은 것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우리 아가씨의 손이 어떤 손인데!”

응?

디안은 이 대화를 들으며 뭐가 잘못된 것인지 한참 생각했다.

하지만 손? 손은, 손은 잡을 수 있잖아. 둘은 에스코트 파트너였는데? 당연히 손을 잡아야지. 손 안 잡고 춤은 어떻게 춰…….

하지만 디안이 혼란해 하든지 말든지 그들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우리 언니는 수줍음이 많아서 저런 표정을 쉽게 짓지 않아요. 그만큼 큰 충격이 있었다는 건데. 혹시라도 그게 가브리엘이 무례한 짓을 했기 때문이라면.”

로제리엘이 차갑게 말했다.

“장담컨대 가브리엘의 정강이 두 쪽은 똑 부러질 거예요.”

“……아, 아, 아닐 겁니다.”

“정말이겠죠?”

“네! 우리 주군은 그러실 분이 아닙, 아니 손은, 아니 어쨌든! 무슨 일이 있었다면 힐데아 영애께서 가만히 있으셨겠습니까?”

퍼렇게 질려 대꾸하면서 디안의 생각은 뚝 끊겼다.

평범한 영애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현실에 정신이 가출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래. 언니는 시비를 거는 사람을 두고 참는 성격은 아냐. 하지만.”

뭐지? 왜지?

여기 분위기, 나만 이상해?

“나 봤거든요.”

“무엇을 봤다는 것이냐, 로제리엘?”

“아빠. 분명히 봤다니까요. 가브리엘, 그 인간이 보는 사람이 기분 더러워질 정도로 혼자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고요.”

“하아?”

“그것도 언니랑 마차 타고 나서! 구름 위에 둥둥 뜬 것처럼. 맞죠? 시엔, 리라, 나만 본 거 아니지?”

“네. 정말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 계셨어요.”

리라라는 여자가 대꾸하는 말에 디안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우리 주군이 왜? 주군이 얼마나 잘생겼는데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 특히 로제리엘 영애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는지를.

이전까지는 힐데아가 이상한 성격이고 다른 사람들이 정상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모습을 보면.

‘이 사람들이 미친 것 같은데?’

*

탁, 하고 체스판 위에 검은 말이 올려졌다.

게임의 승리자가 된 황녀 라피이아는 자신이 이긴 상대, 그녀의 아버지를 보았다.

“흐음, 이번 판은 네가 이겼구나.”

“아바마마의 실력이 더 뛰어나세요. 이번에는 제가 운이 좋았나 보네요.”

“허허.”

황제도 라피이아도 알고 있었다.

라피이아의 체스 실력은 황제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으로, 언제나 황제가 이겼던 것은 딸이 아비에게 져준 것이었다는 것을.

“자아, 어쨌든 약속한 것은 약속한 것이니 들어주어야겠지.”

“네, 아바마마.”

그런데 오늘은 딸이 승리했다. 네가 이긴다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그리 말하면서 시작한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짓했고 다가온 시종이 얼른 체스판을 치웠다.

“그래, 말해보라. 황녀.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무엇이든 들어주시나요?”

“무엇인지에 따라서.”

황제의 시선은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말을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는 것처럼.

한 번 들으면 기껍게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소원이어야지,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은 안 된다는 것처럼.

라피이아는 속으로 냉소했다.

‘예를 들면 후계자의 자리라든가, 가브리엘과의 혼담 거부라든가. 그런 것들이겠지요, 아바마마?’

라피이아는 사람들이 냉담하다 지껄이던 힐링턴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힐링턴 공작이 자신의 첫째 딸을 그 불길한 축언 탓에 냉대한다고.

하지만 그 소문은 곧 찬물을 맞은 듯 사라졌다.

힐데아 폰 힐링턴을 모욕한 자에게 힐링턴 공작이 어떻게 대했는지는 대부분의 귀족이 보았으니까.

모두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아낀다면 왜 그런 쌀쌀맞은 표정을 했던 건데?

라피이아는 알았다. 힐링턴 공작이 지독하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힐데아 그 여자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부녀라더니 그런 것만 닮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우리 관계는 그들 부녀 보다 못 하지.’

서늘하게 생각한 라피이아는 입술을 휘었다.

“아바마마, 제가 소원은 가브리엘과의 혼담에 관한 것이랍니다.”

역시나 말을 내뱉자마자 황제의 얼굴은 냉랭해졌다.

“황녀, 애석히도 그 소원은…….”

“제가 관심이 생겼답니다, 아바마마.”

“뭐라?”

“제가 관심이 생겼어요. 그자를 갖고 싶어졌습니다. 제 남편으로서.”

황제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하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라피이아는 그 눈을 마주쳤고, 이윽고 황제가 기꺼운 듯 웃었다.

“어찌하여?”

“그자가 저를 그리 무시하지 않았나요? 자존심이 짓밟히니 더더욱 관심이 생겼습니다.”

“호오?”

“감히 황녀를 무시하다니.”

그래, 증오도 관심이라면 관심이다. 싫다는 꼴을 보아하니 더 괴롭혀주고 싶었다.

어쩌면 평생 자신의 남편으로 두고 조롱하는 것도 재밌을지 모르겠다.

라피이아는 가브리엘이 싫었다. 예전이나, 지금에나.

왜냐하면.

‘아바마마, 당신께선 저를 봐주지 않으시니까요. 그 자식만 끼고 도셨지요.’

축언과 이능의 소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핏줄도 아닌 그 녀석을 자식처럼 여기는 눈앞의 아버지 때문에.

그래서 그 녀석이 여전히 싫었다. 어떻게든 괴롭혀줄 건수가 생기면 그것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마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짜증나는 오라버니, 벤자민과 뜻이 같을 것이다.

황제는 지독히 냉정했다.

자식의 아비로서 최악이었다.

“아바마마. 제가.”

라피이아는 우아하게 가슴 앞으로 양손을 맞잡고 기도하듯 웃었다.

일단 지금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힐링턴과 벨키우스. 두 가문의 사이를 찢고, 망치고, 황족을 무시한 오만한 기사의 콧대를 짓밟고, 유능한 축언을 황족의 품으로 굽어 살피겠어요.”

만족스럽게 웃으며 바라보는 황제를 라피이아는 냉혹하게 응시했다.

“하하. 내 그리하여 모자란 벤자민 그것보다 너를 아끼는 것이란다. 아가.”

역시.

‘네가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네 행복을 찾아가려무나.’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지.’

‘너는 짐의 사랑하는 딸이니까.’

역시 그런 말을 하시진 않는군.

한때는 간절하게 떠올렸던 말들을 생각하며 라피이아는 사납게 웃었다.

“네, 아바마마. 최선을 다해볼게요.”

*

요즘 힐링턴 저택은 예전과는 달리 퍽 먹구름이 낀 분위기였다.

사용인들은 연신 먹구름의 원인, 힐데아의 눈치를 봤다.

우리가 아가씨께 뭘 잘못했나?

아니야, 연회에 다녀오신 후로 매일 저러셨어!

바지에 오줌 쌌다는 그 새끼 때문 아니야?

“다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결심한 듯 펜을 들어 올리자, 아무것도 없던 백지에서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야관찰자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띠링 소리와 함께 연이어 다른 소리들이 울렸다.

-은발이 최고야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발닦개가되겠어요 님이 대화에 초대되셨습니다.

그 중, 가장 먼저 올라온 글은 다음과 같았다.

-먹구름의 원인을 알았음. 아가씨가 그 편지를 보며 한숨 쉬는 모습을 3일 동안 32번 발견함.

오호?

-아가씨의 운동 코스 변화가 일어남. 별관 저택으로 향하는 길로 3번을 더 뛰셨음.

-식사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실 때마다 벨키우스 공작과 시선이 마주쳤음. 연회장에서 대실수한 것이 분명.

-운동 코스 설명이 안 됨!

-좀 더 알아봐야 할 필요 요망.

탁 하고 펫을 내려놓은 로제리엘은 침대에서 훌쩍 내려갔다.

며칠을 관찰했으면 이제 행동에 옮길 차례다.

머리를 묶으며 나서려던 로제리엘은 거울에 비추는 제 얼굴을 보았다. 아직도 가끔은 낯선.

로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으휴, 직접 말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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