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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65화 (65/155)

65화. 도망치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1)

요즘 내 마음은 지옥이었다.

가브리엘과 마주칠 때는 화들짝 놀라 안 그런 척하면서 도망치기 일쑤였고.

그건 언제나 반기던 내 동생, 로제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니, 언니, 언니야!”

결국 로제가 이렇게 쳐들어왔다.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야무진 표정으로 불만을 표하는 모습은 아주 귀여웠지만.

“언니, 요즘 왜 나 피해? 응?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혹시 연회장에서 내가 가브리엘한테 에스코트하게끔 장난쳐서 화났던 거야?”

마음이 지끈했다.

“아니야. 절대 그런 게 아니야, 로제. 그냥 언니가 마음이 복잡해서 그래.”

“연회장에서 있던 일들 때문에 그런 거야? 그 영애들이 언니한테 시비를 걸어서?”

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사랑스러운 붉은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로제는 퍽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물거리는 입술이 꼭 아기 같다.

“나한테 말 안 해줄 거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조금 전에도 로제와 가브리엘이 함께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그들을 보며 웃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땅히 같이 기뻐해 주어야 하는 광경을 보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자신을 깨달았는데.

우울한 낯의 로제를 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답싹 손을 잡고 방긋 웃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원작이기 때문에 원작 여주와 가브리엘이 이어져야 한다는 바보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저 애가 내 동생이니까.

내 동생이 사랑하는 남자이고, 그도 내 동생을 사랑하니까 응원하고 싶은 것이었다.

방해물이 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럼 언니야.”

“응?”

“나한테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누구든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자. 언니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 예를 들어 오, 편지 같은 것도 좋겠다! 어때?”

반짝거리는 로제의 눈을 보면서도 단박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내가 편지를 오갔던 대상이라고 해봐야.

‘가브리엘밖에 없는데.’

무참히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을 좋아해서 동생도 질투할까 봐, 못난 사람이 될까봐 무서워서 마음을 죽일 방법을 고민 중이에요.

그런 상담을 가브리엘에게 하라고?

로제는 전혀 모르고 한 말이겠지만, 상상하니 어이가 너무 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면 그는 뭐라고 할까.

힐데아, 당신이 포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모두를 위하는 길이니까.

이런 냉담한 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그가 내게 잠시 잠깐이나마 형식적인 호의를 보여주는 것은 내가 다 로제의 언니이기 때문…….

‘아니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생각은 좋지 않아.’

감정을 깨닫고, 자꾸 이런 생각들이 불쑥 치밀었다.

나는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로제에게 좋은 언니가 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마음의 빚이 생기기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울한 생각은 그만하자.

로제리엘의 말대로 마음을 내보일 누군가라도 찾아보지 않는 이상 속이 답답…….

‘잠깐.’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로제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내 두 손을 꽉 잡고 외쳤다.

“오, 역시 언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 편지하면 당연히 가…….”

“신전!”

“……엘……엥? 언니, 지금 뭐라고?”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처음으로 내게 우호적인 시선을 아무 조건 없이 내보여주었던 사람.

그리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온화한 사람.

그런 사람이 있었다. 어쩐지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이상하게 안도가 되는 그런 이가.

바로 최고 신관, 크라이스 말이다.

*

“뭐라고 하였느냐, 힐데아?”

하지만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신전을…….”

“안 돼.”

“네?”

“안 된다, 힐데아. 다른 건 다 허락해도 그것만은 허락할 수 없다. 이참에 말하마. 신전과 관련된 것에는 귀도 기울이지 말거라.”

“하지만 아버지……?”

나는 아빠가 당연히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줄 줄 알았다. 그래서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부드럽게 넘어가던 수프가 목구멍이 턱 걸리는 기분이었다.

‘왜 저렇게.’

화를 내시지?

“아버지, 저는.”

“신전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듣고 싶지 않구나. 신전이든, 신관이든, 그와 관련된 무엇이든.”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얼음처럼 냉담한 말이었다.

내 말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겠다는 것처럼 잘라내는 말이기도 했다.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다.

‘억울해.’

얼마나 고민하고 또 얼마나 아파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는데. 신전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여서 더 억울했다.

아니면 뭐, 아빠는 신전에 나를 내보이기 싫은 것일까?

내가 당신께서 생각하기에 불길한 축언의 소유자라서?

그렇게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어졌다.

순간 황궁에서 봤던 아빠의 신전에 대한 예민한 반응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제 축언이 나쁜 게 아닌데, 다른 사람들 말처럼 그런 게 아닌데, 왜 신전에 가면 안 되는 거지요? 왜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으시고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세요?”

아빠는 아마 내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항상 예, 하고 차분하게 응수하곤 했으니까.

흔들리는 눈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마음이 아파왔지만, 그래도 입을 꾹 다물었다.

“힐! 이 아비가 언제…….”

“설마 아버지도 제 축언이 불길하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건가요?”

벌떡 일어난 바람에 아빠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시선이 마주쳤다.

“힐, 아가, 이 아빠는.”

“아버지.”

“……아, 빠는.”

“아버지.”

흔들리는 눈이 선명했다.

하지만 결국 아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가 왜 신관과 신전에 대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는 대충 유추가 가능했다.

막 빙의했을 때라 기억이 선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전과 아빠와 엄마 사이에 안 좋은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게 아마도 나와 관련된 일일 것이라고.

“저는 문제를 일으키는 다섯 살짜리가 아니에요. 이런 질책을 들을 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습니다.”

“히, 힐. 그건 이 아비가 감정이 격해져서, 그러니까.”

그때의 이야기는 물은 적도 없고, 자세히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어서 정확히 알지는 못 했지만 괜히 저러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래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어.’

적어도 물어봐라도 주셨으면.

왜 그렇게 신전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인지 물어봐라도 주셨다면.

지켜보던 로제가 포크를 내려놓고 외쳤다.

“언니야? 아빠! 왜들 그래요. 둘 다 차분히 대화를…….”

아니, 로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전에 가겠어요.”

통보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힐!”

“가겠어요.”

아빠의 얼굴은 더없이 경직되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빠에게 내보인 최초의 반항이었다.

“아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니까, 신전은, 신전은 좋지 않다. 애초에 네 축언을.”

또 그 축언.

축언!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네, 그 축언이요. 그런데 아세요, 아버지? 크라이스님이요. 그분은 마음먹기 달려 있다고, 제 축언이 불길하지 않다고 가장 처음 말해준 사람이었어요.”

아버지, 당신이 아니라요.

“분명히 말해주었죠. 세상에 나쁜 축언은 없다고요.”

“힐, 그게 아니라.”

“그런데 아버지는 왜 제 말을 들어보지도 않으시고.”

울컥하고 뭔가 치밀었다.

“대체 왜.”

어쩐지 로제나 아빠가 큰 충격에 빠진 것처럼 날 응시하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아이처럼 울 수는 없다는 일념 하나로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눈물은 안 돼, 차라리 콧물을 흘리겠어.

심호흡을 내뱉은 뒤 다시 한번 말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하도 눈에 힘을 주어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핏발도 터진 것 같아.

“아버지. 언제나요. 말을.”

“히, 힐. 이, 이 아비가 미-”

“말을 제대로 해주시지 않으면 몰라요.”

주먹을 꽉 쥐었다.

“신전에는 다녀올 수 있게 해주세요, 아버지. 둘러보고 싶어요.”

그런데 참 왜 그런 것인지, 감정에 휩싸여 마구 내뱉고 나서야 후회가 드는 것이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는데, 나도 아빠한테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거 아닌가 하고.

하지만.

또 실망한 듯 일그러지는 아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그 얼굴을 보며 담담해질 수 있는 나중에 봐야지.

“먼저 일어나는 것을 용서해주세요. 입맛이 없어서 여기까지 먹을게요.”

“……신전은, 그래. 신전은 알았다. 하지만 힐, 먼저-”

“일어날게요. 마저 식사하세요. 아버지. 그리고 로제, 미안해.”

뒤에서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때 왜인지 내 신발이 뺘라락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을 때 땀투성이가 되어 달려왔던 아빠의 모습도 떠올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작 신전에 들르는 일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닌 것 같았다.

섭섭한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 터져버렸다는 것을 이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똑바로 보면 보이는 것들이 눈앞에 있었다는 것도.

이를테면 눈가를 축축이 적시고 있던 나와 비슷한 표정이던 아버지.

그리고 당혹스럽게 바라보던 로제의 슬픈 눈동자.

그러나 그걸 알게 되는 것은 먼 나중의 일이었다.

*

이왕 반항하기로 한 것.

‘가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바로 움직였다.

마차를 불러온 리라가 나를 돌아봤다.

“같이 따라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아가씨?”

“응. 리라는 할 일이 많잖아. 그리고 신전은 그리 멀지 않아. 바로 가문의 마차를 대기시켜 놓을 거니까 볼일 마치면 바로 돌아올 거야.”

“하지만 아가씨.”

“아. 리라가 말려도 소용없어.”

리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다가, 가만히 손을 뻗었다. 나는 흠칫했지만 리라는 내 잔 머리카락을 정리해준 것뿐이었다.

“아가씨가 하고 싶으시다면 해야지요.”

“……리라?”

“무사히 다녀만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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