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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66화 (66/155)

66화. 도망치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2)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신전에 온다고 해서 이 답답한 마음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까닭 없이 가족들에게 화풀이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어.’

완전히 이 마음을 삭힐 자신이 없었고, 혹시라도 들켰을 때 싸늘해질 분위기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해사하게 웃고 있던, 그 속에 나는 없어도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는데 그것도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난 들킬까 봐 무서운 거야. 로제에게. 아빠에게. 가브리엘에게. 그게 가장 무서워.’

터지기 직전에 토해내러 온 사람처럼 나는 이곳에 온 것일지도 모른다.

실례되지 않을까 싶어 사람을 시켜 미리 기별을 넣어두었기 때문에 마침 나를 안내하러 나온 신관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힐링턴 공작가의 힐데아 영애 맞으시지요?”

“네, 신관님.”

온화한 얼굴의 신관은 크라이스는 아니었다. 그는 부드럽게 고개를 숙인 뒤 그렇게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최고 신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그 여자는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와 기도하고 있는 크라이스의 앞에 섰다.

그리고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 제대로 설명을 못 들었어. 어째서 그날, 내가 명령한 대로 하지 않았지?”

크라이스는 고개를 들어 고압적인 표정의 여자를 보았다.

높게 뻗은 눈썹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씰룩였다.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는 것이 좋을 텐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황후 폐하.”

황후, 데자이아.

그녀는 자연스럽게 크라이스가 기도를 올리고 있는 신전의 제단 위로 올라 의자처럼 앉았다.

그 기함할 무례에도 불구하고 크라이스의 낯은 고요했다.

황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다리를 꼬고 발끝을 까닥거렸다.

그 모든 것은 꼭 미엘르 제국의 유일신, 연님을 부정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다름 아닌 제국의 황후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닐 텐데. 농을 하자는 건가? 그대가 내 명령을 무시했지 않아. 나는 그대에게 말했다. 힐링턴의 그 아이, 소문을 부풀려 제대로 망신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그렇지 않아?”

황후의 눈이 싸늘했다.

지금이라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겠다는 것처럼.

크라이스는 무릎 꿇고 있던 몸을 일으켜 그녀가 앉아 있느라 헝클어진 제단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왜, 그 여식이 제법 어여쁘긴 하니 새삼스럽게 반하기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크라이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크라이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상상만 해도 속이 거북해지고, 또 이상해지는 가정이다.

그냥.

정말 그냥.

황후의 말대로 할 셈이었다. 원래는 굳이 직접 찾아가지 않고 서신으로만 축언을 전달해도 충분했던 절차였다.

그러나 크라이스는 호기심에 힐링턴을 방문했고 힐데아를 보고 느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결국 거짓 축언을 전하지 못했다.

왜지? 왜 거짓을 말하지 못했지?

결국 그는,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험했다.

나는 황후의 명령에 따라 저 여자를 고통 속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하고.

그리고.

‘실패했지.’

연회장에 선 자신을 투명하게 올려다보는 그 맑은 붉은 눈을 보는 순간.

그는 그녀의 눈을 통해 잘 익은 석류의 빛깔을 보았고, 잘 익은 과육의 향을 맡았을 때의 충만함을 느꼈다.

곁에 서는 것으로도 신께 기도를 올릴 때의 기쁨을 느꼈고, 그녀의 축언을 읊을 때는 손의 떨림을 느꼈다.

얼마나 기이한가.

또 얼마나 무서운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황후 폐하. 다만 이미 힐링턴이 진짜 축언을 아는 상황이니 거짓 발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힐링턴 공작의 반발이 더 심해지면 앞으로의 일에 방해가,”

“그대가.”

황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가 이리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처음 보았는데?”

쓸데없이 짐승처럼 예민한 감, 크라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제가 황후 폐하께 충성을 바치며 돕고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제 신뢰성을 바칠 순 없었습니다. 저는 어쨌든 최고 신관이니까요.”

“…….”

조용히 내뱉은 말에 황후가 가만히 바라보니,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래, 순간적인 짜증에 가장 중요한 패인 그대를 잃을 뻔하였구나. 신뢰성을 잃은 최고 신관이라니, 그야말로 거리의 거렁뱅이보다 못하지 않은가!”

“예. 아직 저를 이용하셔야지요, 폐하.”

깔깔-카랑한 웃음소리가 기도실 안을 울렸다. 불쾌한 음악처럼 퍼졌다.

“그대는 이럴 때 보면 참으로 재미있구나. 요즘 웃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말이야. 그러면 본론으로나 들어갈까, 그대?”

“예, 황후 폐하.”

크라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툼한 서류를 내밀었고 그것을 짧게 살핀 황후는 만족스럽다는 기색으로 웃었다.

그리고 제 아들에게 대하듯, 크라이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잊지 말아라, 그대.”

“예, 폐하.”

“네 복수를 이루어줄 사람은 다름 아닌 나라는 것을. 그러니 이번 한 번은 용서해주겠다만.”

날카로운 손톱 끝이 크라이스의 목덜미를 쿡 찔렀다.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따끔했다.

“다음번은 아니 된다. 알았는가? 내가 하라면 그대는 생각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설령 황제의 축언일지라도 거짓으로 고해야 할 것이야.”

“……예, 폐하.”

“그래, 착하구나.”

인자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칭찬의 말을 남긴 황후는 미련 없다는 듯 드레스를 휘날리며 빠져나갔다.

곧 기도실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제단 앞에 멍하니 섰던 크라이스는 명확한 형체 없는 기이한 형태의 연님의 신상을 쓰다듬었다.

“존귀하신 연님이라.”

아름다운 최고 신관의 얼굴 위로 아까 전 황후 앞에 얌전히 고개를 조아리던 자의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향해 자애롭게 축언을 전하던 사제의 것도 아닌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 개소리인 것을. 그렇지 않습니까, 지고하신 신이시여.”

신이 그렇게 자애로웠다면, 내가 이렇게 복수를 품게 되지도 않았겠지요.

<너의 것처럼 다룰 수 있으리라>

“제 축언이 대체 조롱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소중한 이들 하나 지키지 못한 이 축언과 이능이.

바로 그때였다.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고 많이 들은 목소리가 손님의 방문을 고했다.

-힐링턴 영애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크라이스 님.

왔구나.

현재 그의 번뇌 중 하나.

크라이스의 눈이 아까와는 다른 빛으로 물들었다. 어둡게.

“들어오시라 전해주세요.”

곧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나는 처음 방문한 신전 내부의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긴 역사를 자랑하듯 화려한 내부의 장식들은 꼭 무슨 뜻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자, 내 앞에서 안내하며 움직이던 신관이 빙긋 웃었다.

‘미안해요, 신관님. 따라 웃어드리고 싶은데 웃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저 화난 거 아니에요.’

그런 말을 삼키며 바라보았는데 신관은 거북한 티도 내지 않았다.

“신전이 조용하고 밋밋하여 지루하시지요? 아무래도 공작가의 저택에 비하면 많이 차이가 나겠지요.”

“아니요, 그런 무례한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관님,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왜 점점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지.

이런 곳은 아무나 못 들어오지 않나?

그 의문을 알아챈 것처럼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 신관님의 개인 기도실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응?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신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기본적인 상식이 있었다.

그중에서 신전의 기도실은 원래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은 안다.

더구나 최고 신관의 개인 공간이라면 더더욱-아무나 못 들어가는 게 맞을 텐데.

‘왜 날 그런 곳에?’

자세한 사정을 묻기도 전이었다.

“다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어, 네.”

어느 방문 앞에 선 신관이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곧 신관이 평범한 나무문을 열자, 높다란 천정과 희미하게 빛나는 상아빛의 제안, 그리고 신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긴 은발의 사제까지.

크라이스.

“…….”

“안녕하세요, 최고 신관님.”

그가 반짝 눈을 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냥 보기에는 냉담해 보이는 녹색 눈동자는 어느 순간 다정한 녹음의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냥 크라이스라고 부르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라고.

*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연회에서 이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던 일들이 꽤 파란만장했으니 그에 관련되어 조언을 구하고자 온 것일까도 고민했었다.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었는데 물어온 답은.

“사랑하면 안 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어찌해야 할까요, 신관님?”

……이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일순간이나마 멍청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사제에게 사랑을 묻다니. 아니, 그보다 여기까지 와서 묻는 것이 정말 사랑이라고?

저 차갑고 담담한 얼굴로 묻는 것이 사랑.

목소리조차 고요해서 더 기이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사랑, 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바라봐서는 안 되고, 잡아서도 안 되는 사람이요.”

크라이스는 눈앞의 힐링턴 영애가 누구와 얽혀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화제의 대상은 황태자 벤자민이거나, 벨키우스의 가브리엘인가?

‘이상하군.’

크라이스는 가만히 희게 주먹 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잘못된 음식을 먹은 것처럼 불쾌한지 모르겠다.

길을 구하듯 바라보는 고요한 호수 같은 붉은 눈을 보면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말이 불쑥 튀어나온 것도 그 순간이었다.

“보지 않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럴, 까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아니. 이게 아니다.

원래는 더 그들 사이를 악화시켜야 했다. 힐링턴의 영애를 사이에 두고 황태자 벤자민과 가브리엘의 사이가 악화되고, 나아가 황후와 황제의 사이도 더 심화되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따위 말을.

그는 입안의 살을 아플 정도로 깨물었으나, 다시 한번 입과 심장은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마음이 술렁거릴 때 멀어지는 것, 그게 꼭 비겁한 것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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