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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67화 (67/155)

67화. 도망치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3)

갑자기 힐데아가 웃었다.

‘……!’

아주 희미한 것이었지만 또렷한 웃음이었다.

크라이스는 목이 마른 사람이 우물을 발견한 것처럼 집요하게 그 미소를 탐하듯 바라보았다.

‘신이 내린 선물.’

신전의 보물. 선대 최고 신관이 힐데아의 축언과 이능에 집착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궁금증이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이 이 까닭 없는 호의를 보이는 것은 저 여자의 이능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해를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돕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황후의 명령대로 저 여자의 축언은 불길하다 말하며, <정해진 운명이 없다>가 아니라 변질된 축언, <운명이 없다>라고 발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역시 오길 잘한 것 같아요. 마음이 정말 복잡했었는데.”

“왜 복잡하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쓸쓸한 눈을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모자라서요.”

“당신은 모자라지 않아요, 영애.”

“크라이스, 제가 간혹 찾아 와도 될까요?”

아니.

‘이곳에 자주 오겠다고?’

크라이스는 눈앞의 저 여인이 자신의 어릴 적에 있었던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곳에 자주 오고 싶다는 말 따위 내뱉지 않을 텐데.

말해주는 것이 상대를 위한 것일지도 모르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네, 힐데아 영애. 자주 찾아오셔도…… 됩니다.”

적극 권장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렇다면 힐데아 영애를 자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평범한 인간 같은 욕심이었다.

‘드디어 내가 완전히 미쳐버린 모양이로군.’

크라이스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황후와의 협력 관계를 들키면 안 되는 대상을 고른다면, 힐링턴의 쌍둥이도 높은 순위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또 입이 사고를 쳤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힐데아가 손을 내밀었다.

“무엇인가요, 영애?”

“최고 신관님은 손을 잡으며 축언이 읽힌다고 하지요?”

“보통은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능도 바로 확인할 수 있나요?”

크라이스는 힐데아의 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 고귀한 손은 다른 사람의 피 한 방울 묻혀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 손을 영원히 저대로 두고 싶기도 했고, 오히려 반대로 자신처럼 물들여버리고 싶기도 했다.

이미 타인의 피로 절어버린 자신처럼.

“어떤 것이 궁금하신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영애. 그리고 조언하자면 함부로 타인에게 자신의 축언을 가늠하라 내보이지 않는 것이 좋답니다.”

힐데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요? 크라이스는 최고 신관이시잖아요.”

“그렇다 할지라도 조심하시는 것이 좋아요.”

욱신 하고 심장이 쑤셨다.

“음, 그렇다면. 크라이스. 이능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죠?”

“그런 편입니다. 다양하게 살피니까요.”

저 여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뿐인데, 미친 심장이 꼭 그 이야기에 기뻐하기라도 하듯 뛰었다.

이게 다 저 눈 때문이다. 차가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은 고요한 눈동자.

그때 힐데아가 물었다.

“혹시 치유의 이능에 대해서도 자세히 아는 편이실까요?”

치유의 이능이라고?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어떤 이능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자신이 그 이능을 발현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정해진 운명이 없다>라는 축언에 치유의 이능이라고?

‘그건 이상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미치광이 같았던 그 이전 최고 신관이 고작 치유의 이능을 위해 그 난리를 피웠다는 것이 이상하다.

아마 당신은 치유의 이능력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려는 것을 참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했다가 저렇게 밝은 눈을 하고 있는 상대를 좌절하게 할 수도 있으니.

힐데아는 자신의 이능이 치유라고 믿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확신하고 계시는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알아가는 중이라서요.”

크라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방 어딘가에 황후가 있었거나, 혹은 자신이 그러고자 한다면 힐데아의 이능에 대한 정보가 밖으로 벌써 새어나갔을 것이다.

뭘 믿고 저렇게 술술 분단 말인가.

자신의 무엇을 믿고.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힐데아.’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불쑥 들었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그럼 크라이스, 오늘은 갑자기 나온 것이라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미련 하나도 없다는 듯 일어서는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미를 간절히 바라보는 새끼 짐승의 심정처럼.

“혹시라도.”

“네?”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해서는 안 될 말.

그것이 또 흘러나갔다.

“언제든지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 신전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내뱉고 나서 후회하고, 또 내뱉지 않았다면 더 후회했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힐데아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참 이상하죠. 저는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쉽게 털어내지 못하는 성격인데.”

그건 크라이스, 그가 할 말이었다.

당신은 날 이상하게 만들어, 힐데아. 나는 누구에게도…….

황후에게도 내 속을 보인 적이 없는데.

“당신을 볼 때는 이상하게 편해요. 이곳도 좋고, 꼭 익숙한 장소처럼 마음이 편해지네요.”

“저도.”

“응? 뭐라고 하셨어요?”

졌다.

멀뚱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크라이스는 오로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저도 영애가 친근합니다.”

그 말을 내뱉으며 크라이스는 자신이 힐데아에게 왜 감정으로부터 도망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를 위해서 한 말?

아니었다.

그건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선명한 욕심과 탐욕 때문에.

‘당신이 벨키우스 공작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을 보았지.’

그리고 깨달았다.

제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을.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싶다는 기이할 정도로 강력한 욕망을.

그때 느꼈던 선명한 박탈감.

분노.

그리고 슬픔.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온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당신은 모든 게 예외야.’

그는 오래전, 복수만을 생각하며 쓸데없는 감정들은 다 잘라내겠다고 결심했다.

곁에서 아무리 친근하게 느껴지며 애틋하게 호의를 보였던 상대라도 필요하다면 가차 없이 치워버리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살아왔다.

아주 오랫동안.

크라이스는 일어서는 힐데아를 보며 다시 한번 약속하듯 말했다.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아시겠지요, 영애?”

“……알겠어요, 크라이스. 오늘 보여주신 호의는 잊지 않을게요.”

당장은 복수라는 대의에 방해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만 힐데아에 대한 감정을 버리지 않고 관조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껏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 결국 이 감정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

신전에서 집으로 막 도착한 나는 내 눈치를 보듯 다가오는 로제리엘을 보았다.

내 귀여운 동생.

웃지 않을 수가 없잖아.

“로제, 뭐하고 있었어?”

먼저 말을 걸자, 반색하며 환히 웃는 얼굴이 얼마나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운지.

“으응, 언니 기다리고 있었지!”

발랄하게 뛰어온 아가씨가 내 옆구리에 팔짱을 끼었다.

“언니야, 기분 풀렸어?”

“화난 게 아니야.”

“응응, 알아. 그래도 신전에는 잘 다녀왔고? 최고 신관을 만나서 뭐라고 했어? 나는 그 최고 신관님은 좀 차가운 것 같아서 별로였는데, 언니는 그 신관님 첫인상이 좋았던 거야?”

“로제. 천천히 말해도 돼.”

줄줄 이어지는 질문에 결국 바람 빠진 것처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입꼬리가 잠깐 들썩였다.

나는 로제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로제는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게 언니, 사실 아빠 술 진탕 마시고 잠드셨어. 술 잘 못 하시잖아. 그런데 아주 여러 가지 다 말아드셨, 흠흠, 많이 드셨더라고.”

“……응. 나 때문에 많이 화나셨구나.”

로제는 두 손을 휘저으며 어쩐지 쩔쩔맸다.

“언니야, 아빠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아니다. 일단 언니 우리 방에 올라가서 얘기 좀 하자. 궁금한 게 너무 많아!”

“그래. 올라가자.”

괜히 우리 착한 로제만 눈치보게 만들었다. 미안해, 로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열심히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로제에게 상냥한 언니로 돌아가리라. 내 감정은, 일단 묻어두고.

“아니다, 우리 오늘 아예 같이 잘까, 로제?”

“진짜?”

“그럼.”

“응, 좋아! 흐흐, 오늘 언니 늦게 잘 각오하는 게 좋을걸!”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사랑하는 나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

이후로도 내 일상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단지 하나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브리엘 앞에서 유독 말이 적어지게 되었다는 것?

“저어, 언니?”

“…….”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 힐?”

“아니요. 괜찮아요.”

“그렇다면 왜…….”

로제와 가브리엘, 그리고 내가 함께 있게 되었을 때는 로제가 쩔쩔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입을 열어 친근하게 대할 순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자각을 마친 상태라 터질 것 같았고, 입 밖으로 그를 소리 내어 불렀다가는 감정이 전달될 것 같았으니까.

가면처럼 굳어지는 무표정을 방패로 그를 피했다.

‘미안해요, 가브리엘.’

가브리엘도 눈치가 있는 것인지 점점 내게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가 더 많아졌다.

그로서는 의아할 것이다.

친절을 베풀었더니 그 상대가 갑자기 모른 척 냉담하게 구는 것일 테니까.

*(12.06_행인_토끼)

“아가씨, 힐데아 아가씨!”

“리라? 무슨 일이야?”

“황태자 전하께서 아가씨께 서신을 보내셨어요.”

“뭐?”

아슬아슬하게 지내던 어느 날.

황궁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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