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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68화 (68/155)

68화. 당신을 초대합니다, 힐데아 영애

아무리 현 황태자가 축언을 타고나지 못한 반편이라고 하더라도, 황태자는 고귀하다.

그와 결혼하는 이는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미래의 황후가 될 것이 분명했다.

황녀 라피이아가 축언을 지닌 이였다면 어떤 변수가 생겼을 수도 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둘 다 축언과 이능을 타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벤자민이 어떤 영애에게 직접적인 호감을 대놓고 전했다!

누구에게도 직접적인 호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벤자민의 이번 행보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힐링턴의 힐데아.

그런데 더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그 영애가 황태자의 춤 신청을 거절하고 다른 남자와 첫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전쟁 영웅!

“기가 막힌 치정 소재로군.”

아직 벨키우스와 힐링턴의 혼담이 정확히 누구와 이루어지는 것인지 소문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더욱 화두가 뜨거웠다.

만약에 두 상대가 정말 소문 중 하나처럼 힐데아 폰 힐링턴 한 사람이라면, 무려 벨키우스 공작과 황태자가 한 여인을 두고 경쟁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벨키우스가 선택한 것은 사실 꽃처럼 해사하고 아름다운 로제리엘 영애일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 없기로 소문난 힐데아 영애겠습니까?”

“왜요? 공작 영애인데요.”

“로제리엘 영애는 무려 <화려하게 꽃피리라>라는 축언을 타고났다고 하던데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대요. 동화 속에 사랑 받는 공주님처럼요.”

“힐데아 영애도 축언은 있잖아요.”

“그 이상한 축언 말이에요? 없으니만 못하죠! 불길하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황태자와 힐데아가 결혼한다면 그건 제대로 된 축언을 지니지 못한 패배자들의 결합일 뿐이라고 비웃었다.

그런 와중, 황태자가 드디어 움직였다.

‘사냥 대회!’

황궁의 사냥 대회에 힐데아 폰 힐링턴을 초대한 것이다!

물론 황태자의 초대를 거절할 리 없는 공작가의 영애는 그 초대를 우아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물론 그 둘만 참석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아주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질 것은 다분했다.

그래서 사냥 따위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며 참여하지 않았던 귀족 영애와 영식들도 앞다투어 황태자의 초대장을 갈구하고 있는 상황.

그 참가하겠다고 한 귀족들 중에는 황궁 일에는 통 관심 없이 냉담하던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공작도 있었다.

그리고 황후 데자이아는 그런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온갖 것들이 다 모인다면, 일이 벌어졌을 때 배후로 지목하기도 쉬워진다.

“남녀 간의 애정에는 약간의 위기가 섞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위험에 처한 순간 극적으로 구원해주며 나타나는 상대에게 일말의 호감도 생기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주 좋은 그림이야.”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입술을 휘는 황후의 곁에는 냉담한 인상의 은발 사내가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 광신도들에게 이야기를 흘리신 겁니까, 폐하? 불길한 축언을 지닌 영애가 감히 고귀한 황족을 노리고 있다고요.”

황후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앙큼하게 구시나, 그대? 그 이야기를 전달한 것이 바로 고귀한 최고 신관님이신 것을.”

“황후 폐하께서 명령하셨으니 저는 이행했을 뿐입니다.”

진짜 광신도라는 것은 아니고, 그들은 그냥 축언에 미친 자들이었다.

더 웃긴 것은 그 광신도들 모두가 축언을 지니지 않은 자였다.

갖지 못하기에 탐한다.

열망한다. 신성시한다.

그렇게 따지면 축언을 지니지 않은 그녀의 아들이 더 못난 것이고, 불길하다 해도 축언을 지닌 힐데아가 더 고귀한 것일 터인데도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봤다.

황후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이용하긴 좋았다.

조금만 건드려줘도 팍 튀어오르는 이들이었으니까.

“열등감. 그 감정은 결국 세상엔 축언을 지닌 자보다 축언을 지니지 않은 자가 더 많기 때문이지.”

“…….”

“그러니 최고 신관, 그대도 조심하도록 해. 언제 그 눈먼 열등감이 신전으로 향할지도 모르지 않나?”

같은 편에게 하는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말에, 크라이스는 서늘하게 미소했다.

“예, 폐하. 부디 주의하도록 하지요.”

*

“언니, 정말 갈 거야?”

“가봐야지, 황태자의 초대장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너는 정말 안 갈 거니, 로제?”

“응. 난 사냥대회는 체질적으로 별로란 말이야. 음식이 맛있게 차려져 있는 것도 아니고.”

역시 우리 로제는 연회를 먹으러 가는 거였구나. 나는 잠시 침울해졌다.

그때였다. 은근히 이쪽에 시선을 주던 아빠가 넌지시 말을 얹었다.

“흠흠, 흠흠. 이 아비는 거절하였으면 좋겠다만…….”

며칠 만의 대화더라. 깜짝 놀라 바라본 것인데, 아빠의 어깨가 유독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역시 아직 화가 나신 거로군.

굳이 신전의 이야기를 또 꺼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나도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아버지.”

그나저나 다들 왜 이렇게 유난인 것인지 모르겠다.

얼마나 유난인지 그날 이후 더 서먹서먹해진 아빠가 저렇게 말을 한번 건넬 정도이지 않은가.

난 영 걱정 가득한 로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별일 없을 거야, 황태자의 초대로 방문한 것인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버지도요.”

“!”

어쩐지 내가 그리 말하자 아빠는 숨이 막힌 사람처럼 입을 틀어막은 것 같았다.

눈물이 좀 맺히신 것도 같은데. 하품 하느라 입을 막으셨나? 드디어, 뭐라고 하신 것 같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돌렸다.

“이미 간다고 해두기도 했으니 이제 와서 못 물린단다.”

“으으, 황녀 전하도 온대.”

“…….”

그건 좀 싫다.

“다들 지금 그게 파란의 중심이라고 말들 하더라고, 언니.”

나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황태자의 초대장을 보며 의미 없이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았다.

‘진짜 별일 없겠지?’

내가 진짜 가서 활로 토끼라도 잡을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 있다 적당히 맞장구친 뒤 돌아오면 그만이다.

‘스케일이 커져버리긴 했지만.’

내가 초대에 응할 때 만해도 말만 사냥 대회이지, 황태자와 그의 지인들 몇이 모여 시간을 보내는 것에 불과했는데.

가브리엘이 참가한다고 하면서부터……. 이렇게 됐다.

대체 가브리엘은 로제도 안 가는 곳에 왜 참가한다고 한 거지.

하아.

‘그럼 우리 로제 빼곤 원작 인물들이 죄다 온다는 소리잖아?’

자꾸 이상하게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내 기우이리라 생각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설마 뭐 죽기야 하겠어?

*

“가브리엘이 잘못한 게 틀림없어요.”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망할 파트너 로제리엘.

“네놈에게 줄 식사 따윈 없다!”라며 태세전환하며 찬밥 취급하는 힐링턴 공작.

역시 저 인간들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어째서입니까, 힐데아.”

덕분에 가브리엘은 지금 먼발치에서 힐데아의 옆모습만 훔쳐보아야 했다.

“대체 왜.”

분명히, 분명히 그녀도 웃었었는데.

분명 그래요, 라고 말했었는데.

‘설마 아니었나?’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내뱉었던 말에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을 때 얼마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혹시 눈 뜨고 꾼 꿈이었나?

아니면 워낙 작게 말해서 그녀가 잘못 알아들었었나?

분명 그날 그는 테라스에서 그녀에게 온 마음을 담아 청혼을 했고, 그녀는 분명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그때의 눈앞이 환해지는 기쁨이란.

‘그랬었는데.’

지금이 현실은 지독하게 암울했다.

“주군. 저어……. 너무 크게 상심하신 거 아닙니까? 혹시 와인을 많이 마신 상태이셨을 수도 있고요. 아, 주군이 아니라 영애께서.”

그럼 술기운에 잘못 말했다는 것인데 그건 더 절망이었다.

그리고 제일 무서운 것은 힐데아와 대화조차 나누기 힘들다는 것.

꼭 방문 한번 허락해주지 않았던 이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랬는데 황태자의 초대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허락했다.”

“아, 그, 그게 힐데아 영애께서 좀 너무하시긴 하셨습니다……. 그, 근데요 주군. 정말 무슨 잘못하신 건 아니시고요?”

“……아무것도. 물론 손을 잡긴 했지만.”

“소, 소, 손을요? 그거 로제리엘 영애께도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로제리엘 영애가 내 보모라도 되는 줄 아나. 그런 것을 시시콜콜 고해바칠 줄,”

“잘하셨습니다!”

디안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치미는 짜증을 삼키며 가브리엘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요즘 가브리엘은 힐데아 앞에서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보고 있어도 반응하지 않았다.

대꾸도 잘 하지 않았다.

이건 원래도 그렇지만 더욱 싸늘해졌고, 가브리엘은 정말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는 것이 이렇게 아픈 거였군.’

차라리 이전처럼 바라보면 인상을 찡그리고, 불편해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건 그래도 자신을 보기라도 했으니까.

그간 제법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는데, 힐데아는 귀찮게 구는 자신과 그냥 어울려주었던 것인가.

아니면 편지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싫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간혹 자신의 편지를 잘 읽지도 않고 서랍에 넣어둘 때도 많았다고 하니까.

어쨌든, 어느 순간 겨우 느슨하게 만들어놓았던 빌어먹을 힐링턴의 가드가 더 단단해졌다.

힐링턴의 사용인들은 자신이 큰 죄라도 지은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가 힐데아의 가까이에만 가면 눈을 부라리며 눈치를 줬다.

‘아가씨는 바쁘십니다.’

‘지금 힐데아 영애가 저기 보이는,’

‘아가씨는, 바쁘십니다!’

‘…….’

보통의 귀족이었다면 이만한 무안과 거절을 당했을 때, 화를 내며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어찌.’

가브리엘은 그럴 수 없었다.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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