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설마가 사람 잡는 법 (1)
그래, 차라리 힐데아가 보내는 거부와 무시는 괜찮았다.
그가 신경 쓰이는 것은, 왜 갑자기 그렇게 태도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거절하고 있는 건 그녀였는데 왜 힐데아가 저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었다.
미치도록 신경이 쓰였다.
‘혹시 당신이 나도 모르게 상처받을 만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는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갈무리했다.
당장은 그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하나였다.
어떤 위협이 노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힐데아를 보호하는 것.
“알아보라 한 것은?”
“아, 네. 알아보니 단순했습니다.”
“무슨 뜻이지?”
“정말 순수하게 황태자가 연 대회라고 합니다. 원래도 소소한 다과회 정도의 느낌이었다고 하고요. 황후나 황제가 관여한 것 같진 않았습니다.”
가브리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대로 된 사냥 대회는 아니라는 소리인가.”
“예. 그런 듯합니다. 그냥 그 나이 또래 영식들의 소꿉장난 정도의 수준 같아요.”
이건 가브리엘이나 디안이 그렇게 오랜 시간 전쟁터에서 구른 이들이라 할 수 있는 말이긴 했지만.
‘그럼 신체의 위협은 없겠군.’
황궁 시녀를 불러 혹시 모를 독살 위협이나, 암살,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가 일부러 길을 잃게 하는 정도만 피하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너무 최악을 가정하는 것 같겠지만.
‘실제로 어렸을 때 내가 모두 당해본 일이니.’
그 황녀, 라피이아에게 말이다.
“하온데 주군. 그리고 듣기 싫으시겠지만…….”
“뭔가.”
심호흡을 한 디안이 빠르게 내뱉었다.
“황태자는 힐데아 영애께 진짜 이성의 호감을 평범하게 내보이고 있는 것 같, 흠흠.”
“…….”
“그런 것, 같습니다.”
이성의 호감.
사람 좋은 척 웃고 있던 황태자를 생각하니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그쪽이야 힐데아를 초대하면서 벨키우스 공작에게도 형식적으로 초대장을 갖춰 보냈을 것이다.
물론 그도 평소라면 개무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연회장에서 대놓고 경고를 했는데, 힐데아를 초대해? 그래놓고 자신에게도 조롱하듯 초대장을 보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개나 소나 다 모이게 생겼던데. 이용하기 딱 좋은 풍경이지.”
“혹시 모르니 사냥 대회에서 힐데아 영애에게 눈을 떼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럴 거다. 왜냐하면, 기분이…….”
묘하게 더러웠다.
“어쨌든 끝까지 경계하도록. 황후의 주변을 알아보는 것도 잊지 말도록 하고. 우리의 처음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예, 주군.”
가브리엘은 시선을 던져, 멀리 보이는 힐데아를 눈에 담았다.
로제리엘을 보며 눈빛을 누그러뜨리는 그녀의 옆모습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세상은 아직 총천연색이다.
가브리엘은 조용히 웃었다.
당신이 날 싫어하시더라도.
‘전 당신을 지키고 싶습니다.’
닿지 않을 고백을 삼켜보면서.
*
울창한 숲.
하지만 갑자기 끌려왔기 때문에,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거지?
가브리엘은?
“허억, 헉.”
왜 이렇게 됐을까?
나는 멍하니 생각하며, 흙탕물로 엉망이 된 맨발을 바라보았다.
구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생채기가 난 발을 얼른 치료하고 싶어도 이능이 발하는 빛으로 인해 시선을 끌 수도 있었다.
‘후욱.’
조용히 몸을 숨기고, 주변을 주시했다.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뛰었다. 가만히 있으니 발의 상처가 더 아프게 욱신거렸다. 달리다가 부딪혔는지 콧등이 찌릿했다.
“하아, 이제 어떡하지.”
나는 며칠 전에 그런 생각을 했던 날 때려주고 싶어졌다.
그래,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말걸.
‘왜 사냥 대회에서 목숨의 위협을 당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애석히도.
나는 정말 안전해 보였던 사냥 대회 날, 당장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찾았다!”
아.
누군가의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쐐액-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아. 안 돼.
몸을 돌리자 보이는 것은 뾰족한 화살.
그것이 독 오른 뱀처럼 정확히 내 심장 위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저것에 꿰뚫리면 바로 죽일지도 몰라. 아니, 죽을 거야.
나는.
나는…….
이렇게 될 바엔.
‘차라리 미친 척 고백이라도 한번 해볼 걸 그랬나 봐.’
로제, 아빠.
그리고 당신.
‘……가브리엘.’
나는 곧 닥쳐올 아픔을 예감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
사냥 대회에 참가했을 때부터였다.
*
“힐데아 영애, 왔군요! 여기예요. 이리 와요.”
친근하게 날 부르는 것은 황태자였다. 어째서인지 그는 그간 낯빛이 꽤 환해진 상태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하하, 그렇게 어색하게 굴 필요 없어요. 이곳은 퍽 자유로운 자리라서 연회장에서의 격식이나 예절 따위가 필요 없거든요.”
황태자는 허파에 바람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의아할 정도로 신나 보였다.
‘누가 보면 로또라도 맞은 줄 알겠어.’
근데 저 황태자, 왜 내 주변을 보고 웃지?
‘설마 내가 혼자라서 재밌나?’
가문의 사람들과 오지 않은 난 혼자였고, 뒤에 따르는 기사와 시녀들 몇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전속 시녀로 할 일이 많은 리라나 시엔은 아니었다.
어려 보이는 앳된 외모 위로 떠 오른 미소가 상큼하긴 했지만.
“햇빛이 들지 않은 좋은 자리를 마련해두었어요. 황궁 주방장들이 특별히 준비한 디저트들도 있구요.”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자리를 잡은 귀족 자제들이 보였다.
그러지 않은 척 황태자가 안내하는 나를 유심히 살피는 시선이 뚜렷했다.
‘여기서 소꿉놀이를 하는 것은 황태자뿐이구나.’
다들 속셈이 있어 이곳에 왔다.
파벌을 형성하지 않고 외따로이 떨어진 것은 아무래도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런 것들에 대해 드는 걱정을 어제 저녁 식사를 하며 로제리엘에게 말했을 때, 우리 가족들은 그렇게 반응했다.
로제는 ‘내가 언니의 파벌이야! 난 일당백이야 언니!’라고 외쳤고.
‘힐링턴이 곧 배경인데 쓸데없는 소리 하는 이들과 어울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라고 아빠는 느린 말투로 말했지.
난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친구가 놀러 와 제 장난감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얼굴의 황태자를 보았다.
다시 봐도 저 얼굴이 나보다 몇 살은 연상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 제가 사냥 대회에 제대로 참가하는 것이 처음이라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왜 또 황태자 전하예요, 벤자민이라고 편히 부르라니까요. 으음,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대중없어요.”
“예?”
황태자는 순진하게 웃었다. 어쩐지 오늘의 미소는 조금 악동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냥 편하게 놀고 마시고, 먹고, 대화를 나누고, 가끔 숲에 같이 들어가서 사냥도 하고 그런 식이에요. 복잡한 것은 질색이라서 말이에요.”
“……그렇군요.”
그러나 듣는 내 속은 편하지 않았다.
대중없다는 말은 곧 아무 계획이 없다는 뜻이잖아.
그런데 왜 사냥대회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여?
언제나 무언가를 꼼꼼히 계획하고, 그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마음이 편한 나에게 저런 태평한 소리는 위를 쿡 쑤시게 하는 말이었다.
이제 보니 황태자 벤자민이 우리 로제리엘 과였구나. 둘이 잘 놀 수 있겠다.
‘나랑은 안 맞고.’
난 미간을 찡그리며 황태자가 말했던 숲 쪽을 응시했다.
‘게다가 저 숲이라면 안전하지 않잖아.’
꽤 울창한 숲으로 황궁 야외터 외에 몬스터들이 종종 출몰하는 산맥까지 이어져 있었다.
간혹 사람이 실종되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너무 안일해.’
그런 데를 제대로 된 호위 병력도 없이 그냥 다 같이 몰려 들어가서 사냥을 한다고.
‘……속뜻이 따로 있는 함정은 아니겠지? 이를테면 황후가 제안을 거절한 날 이곳에서 작정하고 죽이려 한다거나.’
하하. 식은땀이 흘렀다.
어쩐지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바로 그때였다. 황태자가 시녀로부터 받아든 무언가를 들고 온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기만 해도 혀가 시릴 것처럼 상큼한 레몬 셔벗으로 보였다.
와, 사치.
이 많은 인원이 다 이런 디저트 류를 들고 있다니. 황궁의 재력 과시에 넌더리가 났다.
나는 진짜 황궁 생활은 절대 못하겠다.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찐 다이아몬드 수저인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게 나은 것일지도.
“왜 그렇게 봐요, 힐데아 영애? 또 궁금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해줄게요. 오늘 영애가 내 초대에 응해줘서 정말 너무 신난 상태거든요.”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기쁘다는 듯이 속삭이는 얼굴을 보니 더 어려 보였다.
무어라 대꾸하려고 했을 때였다.
“어라? 이게 누군가요.”
꼭 주변의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것처럼 황태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뒤의 누군가를 가리키듯이 외쳤다.
순간 주변이 서늘해지고, 공기가 묵직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 뒤에 있을 누군가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리고 난 그것만 가지고도 내 뒤에 선 것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뒤돌아보지 않았어도.
“힐.”
간혹, 나를 저렇게 부르는 남자.
심해에서 울리듯 낮은 음성.
가브리엘이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대로 앉은 자세로 굳은 내 꼴을 황태자는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그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는 것이다.
나와, 그리고 내 뒤의 가브리엘을 번갈아 보며.
“이런, 소문이 정말이었군요. 애석하게 되었어요, 벨키우스 공작.”
“……전하께 들을 필요는 없는 말인 것 같습니다만.”
나는 눈만 깜빡였다.
지금 둘이 말하고 있는 게 뭔지 모르겠다. 무슨 소문? 또 나를 두고 무슨 소문이 났다고?
그리고 발소리와 함께 가브리엘이 내게도 보일 거리로 다가왔다.
황태자와 둘의 대치가 이어지나 싶었지만, 가브리엘은 싱거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시종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보진 않았다.
‘내 태도에 그도 화가 났겠지.’
내가 만든 결과였는데도 어째서인지, 그 단호해 보이는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어떤 말을 꺼내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