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오직 둘, 숲 속에서 (1)
“대체,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내 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황태자는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경비는 무엇을 한 것이며, 어떻게 저런 자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관리를 한 것입니까!”
“저, 전하. 진정하시옵-”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요? 당장, 당장 힐데아를 찾아오라고 몇 번을!”
“하지만 전하, 저희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 죄, 죄송합니다.”
“이렇게 무능한 자들이었습니까!”
언제나 온화한 낯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곤 했던 황태자였다.
그의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본 이들은 경악하며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좌절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숲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저 거대한 숲 안에서 하필이면 힐데아 폰 힐링턴을 목표로 잡은 듯 움직이던 그 날쌘 사람들을 어찌 잡을 수 있을까.
그는 결국 이를 갈며 심호흡 했다.
할 수 있는 것.
“이능을.”
지켜보던 시종이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예? 저, 전하. 지금 뭐라고 명하셨는지-”
벤자민의 눈은 유독 어두워져 있었다.
일평생 축언과 이능에 기대지 않고 살아오겠다 결심했다.
‘한번 무너뜨리면 다시 또 찾게 될 테니까.’
그를 낳은 어마마마가 그런 것들에 치를 떠는 분이기 때문에, 착한 아들로 남고 싶어서, 어머니를 사랑하니까.
그리고 동시에 그가 갖지 못한 것이니 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무시했었다.
항상 밝고 해맑게 지내며 결핍 따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됐다.
나는 황태자다. 그까짓 축언과 이능이 없더라도 누구도 무시할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오늘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금 당장 추적에 능한 이능을 지닌 자를 불러오세요.”
“……저, 전하!”
하지만 벤자민은 힐데아가 납치를 당한 순간에 비참할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련하게 소리만 지르며 그 뒤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어마마마가 견제하는 상대, 아바마마가 그렇게 끌어들이고자 노력하고 있는 이.
그리고 힐데아 폰 힐링턴의 약혼자가 될 수도 있는 자.
하지만 그 순간은.
‘전하! 뒤따르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저자는 가지 않았…….’
‘전하와 공작은 다르십니다! 전하께는-스스로를 지킬 축언이 없으십니다!’
‘!’
그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
기어코 지켜오던 자존심이, 그만의 유리성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랬다.
황태자는 그 순간 지독할 정도로 질투했다. 전혀 망설일 것 없이 힐데아의 뒤를 따른 남자를.
그의 찬란하다고 칭송 받는 축언과 그에 따라 피어난 이능을 질투했다.
축언을 귀신같이 잡아내고 재빠르게 행동해 같이 공간을 이동해버린 그 능력을.
긴 전쟁을 결국 승리로 이끌어간 그의 경험을.
그리고 거슬릴 것 하나 없이 훌쩍 움직일 수 있는 그의 용기를.
‘나는 할 수 없는 것.’
내게 없는 것.
“전하, 송구하게도……. 그들을 불러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합니다. 그러니 힐링턴 공작가에 먼저 기별을-”
벤자민은 빠르게 답했다.
“기별을 넣고, 그들도 데려오세요. 황궁에도 오늘 있었던 일을 알리도록 하시고요. 그리고 어마마마께도…… 아니. 이건 됐어요.”
벤자민은 치미는 많은 것들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어마마마가 저지르신 일일까. 내게는 말도 없이. 도대체 왜?’
그 짧은 순간, 하필 그 문양이 벤자민의 눈에 들었던 것은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면 그자가 자신에게 돋보이려고 일부러 보여주었던 것일까.
아니다. 어쩐지 그자는 자신을 보며 당황한 안색이기도 했다.
꼭 왜-뒤따르지 않는 것이냐는 듯이.
‘확실해. 그자들은 광신도였어.’
축언과 이능이 없는 자들.
그러나 그것을 누구보다 경배하며 그 힘이 고귀한 핏줄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자들.
그리하여 황족을, 정확히는…… 어마마마를 경외시하여 그녀를 따르고 자신에게도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미친 자들이었…….
‘잠깐만.’
벤자민은 그의 명령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들이 광신도라면.’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그것은 마법이 아닌, 축언이었다.
마법이었다면 벤자민 주변의 기사들은 그에 관해서도 유능하니 분명 어떤 대처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축언이었다.’
하지만 광신도는 누구도 축언을 쓸 수 없을 텐데?
‘어떻게 그들이 축언을 통한 이능을 쓸 수 있었지?’
*
황후는 나른한 눈길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조아린 이를 보았다.
꽤 호화스러운 축언을 타고나 평생을 돈을 벌어들이는 일에 부족한 점이 없던 이였다.
귀족이긴 했으나 상인에 가까웠고, 자신이 지닌 능력 덕분에 저보다 높은 귀족을 봐도 오만불손한 태도를 내보이기 일쑤였다.
특히, 황후와 황태자.
축언과 이능이 없는 그들 모자를 대놓고 무시했다.
황후는 여러 번 참았다.
그러나 그가 결국 황태자를 무시하는 발언을 제가 다니는 클럽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곳에 있는 자들이 와락 웃음을 터뜨리며 동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까스로 이어지던 황후의 인내심도 가차없이 끊어졌다.
‘그 자를 데리고 와.’
그리고 본때를 보여주겠다.
그렇게 지금.
삼일의 감금 끝에 얼굴이 바짝 상해버린 남자가 벌벌 기며 자신에게 조아렸다.
단순히 굶고, 갇혀 있기 때문에 생긴 굴종은 아니었다.
“제, 제, 제발 황후 폐하…….”
재미있다. 황후의 입술이 장난스럽게 휘었다.
정말 재미있다. 눈은 번뜩이며 열망으로 일렁였다.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왜 몰랐을까! 축언과 이능 따위가 다 뭐라고!
황후는 연신 짐승처럼 우는 남자를 비웃었다.
‘내가 축언을 받지 못한 아이를 낳았다고 했을 때, 쏟아지던 그 빌어먹을 시선들! 그런 자들이 이제는 내 발 아래 조아리겠구나!’
황후 데자이아는 하아, 한숨을 내쉰 뒤 발끝으로 그 자의 어깨를 밀었다.
“감히 더럽게, 누굴 잡으려고 해?”
“제, 제, 제발-제가 잘못했습니다. 소신이 미, 미쳤었나 봅니다. 고귀하신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 무례한 언행으로 심기를, 어, 어지럽혀-”
“그렇게 말만 한다 하여 무슨 보람이 있을까. 그대, 내게 더 좋은 것을 내놓아 봐. 그렇다면 관대한 이 황후께서 마음이 풀려 그대에게 빼앗은 것을 돌려줄지도 모르지 않나?”
사특하게 빛나는 데자이아의 눈빛에 남자는 잔뜩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벌벌 기며 두 손으로 연신 비볐다.
제발, 제발 황후 폐하.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부디.
부디 제게서 빼앗아간 것을 돌려주십시오!
퀭한 눈으로 황후를 올려다보던 남자의 입술이 벌벌 떨리며, 결국 황후가 원하던 정보가 흘러나오게 되었다.
황제파 놈들의 약점들이 하나, 둘.
황후의 입술이 더욱 그윽하게 짙어졌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남자의 턱을 콱 움켜쥐었다.
“폐, 폐흐-”
“잘했다. 상으로 너에게서 빼앗아간.”
그녀의 다른 손에는 어떤 물약이 들려 있었고, 황후는 그것을 남자의 입에 박아넣듯 흘려넣었다.
그리고 웃었다.
“축언을 돌려주마.”
가느다랗게 휘어진 눈은 자신이 살았다는 안도로 반색하는 남자를 비웃었다.
하지만 축언을 돌려준다고 하였지, 살려준다고 하진 않았지. 어리석고 멍청한 자신을 탓하는 게 좋을 거야.
잠시 뒤, 아무도 모르는 그 공간에 어떤 남자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앗.”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스친 고통에 소리를 내고 말았다.
끔찍하게 무거웠던 우리 둘 사이의 침묵이 더 무거워진 것 같아 보였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큰 상처가 아닌데……. 제가 엄살이 심한 편인지는 몰랐네요.”
정말 민망했다.
가브리엘은 전투를 하지 못하는 나를 최대한 감싸 보호했다.
상처 하나 없이. 이건 내가 혼자 다리가 풀려 넘어졌다가 바닥을 짚으며 난 상처였다.
가브리엘은 살짝 쓸려 피를 흘린 상처를 유독 길게 쳐다보았다.
이능을 써서 치료를 하면 되겠지만.
나는 망설였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혹시라도 나중에 내가 떠나게 되었을 때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그는 오로지 내 상처만 보고 있었던 것인지 그렇게 말했다.
“작은 상처라고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꼭 위로하는 것처럼.
얼떨떨하게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느새 가까이 내려앉은 석양을 목격했다.
그의 뒤로 물들어가는 주황빛이 황홀하게 번져, 가브리엘의 백금발을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사실 그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정신이 팔렸었지만,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신이라도 차리기 위해.
홀린 듯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기라도 할까봐서.
“이제, 어떻게 하죠?”
가브리엘의 얼굴에는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내가 긴장해서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꼭 자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 순전히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오늘 밤은.”
“어, 네?”
그때 집요하게 내 상처만 바라보던 그가 시선을 떼며, 내 얼굴을 마주봤다.
아. 나는 상황도 잊고 또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철없는 심장에 잔소리를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런 때에도 설레고, 미칠 것 같으면 안 되는 거 아니니, 내 심장아?
그렇게 애써 피했는데 왜 너는-
“힐데아.”
“……네.”
이렇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당신을 휘말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가 뭐라 하기 전에 말을 이으려 했다.
미안해요, 가브리엘.
그리고 고마워요.
“고…….”
“아무래도 오늘 밤, 이곳에서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뒤에 이은 가브리엘의 말에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려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지만.
“단, 둘이 여기서요?”
“예. 이곳에서, 저희 단둘이.”
저기요.
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