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오직 둘, 숲 속에서 (3)
눈밑이 그늘진 듯도 했다.
“많이…… 놀랐겠지.”
이런 일을 또 언제 그녀가 겪어보았겠는가.
대낮에 납치 시도에 죽을 뻔했고, 발이 이렇게 될 정도로.
그는 따왔던 약초를 짓이겨서 그녀의 발에 조심스럽게 펴 발랐다.
그러자 힐데아가 움찔했다.
“으…….”
잠들었을 때도 아팠는지 움찔거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 상처들을 모두 자신에게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차라리 그의 이능이 치유였다면.
살아 있는 그 어떤 것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으나, 낫게 할 수는 없는 이 이능 대신.
“힐.”
작게 불러보며 그녀가 깊이 잠들었는지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저 자세는 너무 불안해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때였다. 스르륵-하고 웅크린 채 기대 앉아 있던 힐데아의 몸이 무너진 것이.
“!”
그는 구르다시피 하여 가까스로 손을 뻗어 그녀를 지탱했다.
어쩌다 보니 그녀를 제품에 기대게 하는 자세를 취하고 말았지만.
‘하.’
그는 돌덩이처럼 굳었다.
바로 제 가슴팍에 힐데아가 있었다. 쌕쌕-고른 숨을 내쉬면서.
그러다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만약 그녀가 깨어 있었다면, 기대고 있는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정말, 미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로제리엘이나 누군가가 이 광경을 봤다면.
‘힐링턴의 인간들이 보면 날 잡아먹으려 들겠군.’
힐데아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그의 어깨 쪽으로 고개를 기대게 하며, 가브리엘은 생각했다.
“당신을 잃는다고 생각했을 때.”
아까 전, 사냥 대회의 일을.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그때 당시, 가브리엘은 옆에 일부러 끈덕지게 달라붙는 라피이아를 향해 짜증을 내고 있었다.
‘좀 떨어지시지요, 황녀 전하.’
‘그렇게 질색하는 모습을 보면 더 괴롭히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랍니다, 공작.’
‘속이 꼬인 사람들이나 할 법한 생각 같습니다만.’
‘왜요, 그대도 보여줘 봐요. 지금 그대가 사랑하는 상대가 다른 이와 저리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대는 지고지순 저 영애만 기다리려고요?’
계속 무시하던 황녀를 본 것은 그때였다.
‘지금 뭐라고.’
라피이아는 그를 조롱했다.
탁, 손톱을 튕기면서.
‘그대가 사랑하는 상대. 그런데 저 영애는 그대를 싫어하지. 아닌가? 세상에, 전쟁 영웅인 공작이 고작 짝사랑에 이렇게 괴로워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
‘가엾기도 하지. 아무래도 힐링턴 영애는 그쪽보다 순해빠진 내 오라비를 선택하려 하는 것 같은데.’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눈치채고, 조롱한다 하더라도, 황녀에게만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턱관절에 힘이 들어갔다.
이 여자는 왜 자꾸 그를 이렇게 쑤시는 것일까.
더는 참을 수 없었고, 자신과 힐데아의 일을 조롱하며 관찰하려 들지 말라 일갈하려 했을 때였다.
먼저 느낀 것은 기운.
살기.
바로 반응했으나, 눈앞에서 누군가 힐데아를 채어가고 말았다.
‘-엘.’
그녀의 달싹이는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았다.
눈앞이 벌겋게 물들었고, 만약 전쟁터였다면, 아니, 상대가 힐데아가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방법을 취했다.
‘공작! 지금 무슨!’
‘공작 각하, 너무 무모합니다!’
그것을 눈치챈 몇의 이능력자들이 만류하려는 것을 무시하고 움직였다. 달렸다.
뒤를 따라 붙어 상대의 축언과 이능을 잡아 뽑듯이 짓이겼다.
중간에 끊어지게 되면 공간이동이 실패해 그대로 신체의 어느 부위가 훼손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아주 강압적인 방법이었고, 어디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방식이었으니 디안이 있었다면 미친 듯이 소리를 쳤을 것이다.
곧 시야가 뒤틀렸다.
“크윽!”
“으아악!”
“여긴…….”
숲이었다.
앞을 보니 제게 붙잡혀 이능을 뽑히다시피 한 공간이능의 능력자는 커억, 숨을 들이켜며 자빠져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고 휘둘렀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는 늑대처럼 재빠르게 달려나갔다.
상대는 여럿.
퍼진 기운은 아직 선명했다.
‘어디에. 힐데아,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애석히도 그녀와의 거리가 꽤 되었고, 공포에 질려 그녀가 몰이사냥을 당하고 있을 때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힐데아의 모습을 봤을 때 눈앞이 시뻘겋게 변했다. 미쳐 날뛰었다.
그렇게 한참 뒤.
모두 처리한 것에는 후회가 없었으나, 아쉬운 것은 하나.
자세히 증거를 남기지 못한 것.
“그렇다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건 아니지.”
가브리엘의 눈이 스산해졌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는 하나, 그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제국을 떠나진 않았다.
언제든 돌아와서, 또 언제든 흔들림 없는 벨키우스의 공작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정보 수집은 가장 우선 순위였다.
그래서 수도에 있는 가장 큰 집단 몇을 알고 있었고, 그 중 적으로 분류될 만한 이들은 더 자세히 조사했다.
그들의 문장을 스치듯 보아도 한 번에 알아볼 정도로.
‘광신도.’
그는 이를 갈았다.
그러다 제게서 뻗어나간 살기에 기대고 있는 이가 불편해하는 것을 느끼고 얼른 기운을 누그러뜨렸지만.
어쨌든.
“내가 증인이다.”
돌아가면 반드시 광신도들의 씨를 말릴 것이다.
“쥐새끼 한 마리도 살아나가지 못하도록.”
관련된 자가 누구든 솎아내고, 뿌리 뽑을 생각이었다.
광신도는 황태자와 황후를 찬양하는 이들로 황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 무리를 눈감아 주었다.
어떤 반발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어떤 뜻인지는 이해가 간다. 제국의 인구 대부분은 축언과 이능을 지니지 않은 이들이었으니.
“하지만 혹시라도.”
만약 황태자가 처음부터 힐데아를 위험에 빠뜨리려 초대를 했던 것이라면.
가브리엘은 낮게 웃었다.
살기 어린 웃음이었다.
장담컨대 어떤 후폭풍이 몰아치더라도 황후와 황태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선을 내려 자신을 온화하게 만드는 사람을 보았다.
찌르르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와 숲의 내음, 그리고 힐데아의 숨소리만 감각을 건드렸다.
“힐데아.”
그 이름은 소중했다.
“힐데아. 힐.”
아주 조심스럽게 불러볼 수 있는 이름.
“힐데아 폰 힐링턴…….”
부르고 싶었던 만큼 그녀를 두고 마음껏 불러보았다.
가브리엘은 천천히, 수줍게 웃었다.
요 며칠은 정말 지옥 같았는데 그게 지금, 이 순간은 다 잊히는 것 같았다.
테라스에서 용기를 내고 싶다고 했을 때 긍정했던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던 것일까.
묻고 싶고 알고 싶었다.
“당신이…….”
당신도 조금이라도 내게 호감이 있었는지를.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를.
“너무 좋습니다.”
노력한다면, 봐줄 수 있는지를.
“가끔은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처럼 좋습니다.”
같은 시선과 마음으로.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청혼을 한다면.
“어떻게 전해야 당신이 겁먹지 않고, 싫어하지 않을까.”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로제리엘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가브리엘, 진짜 생일 연회 때 언니한테 청혼할 생각이에요?’
‘네. 청혼. 반드시.’
‘무슨 확신을 하고?’
‘……대답만 듣는다면 반드시.’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힐데아의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조용한 호숫가에 달빛이 비쳐 아름답게 빛났다. 꼭 힐데아의 머리카락 색깔처럼.
편안하고 고요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게 무척이나 긴 밤이었다.
*
‘어?’
나는 화들짝 놀라 경련하듯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내가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잠들기 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떠올렸다.
‘맙소사. 어떻게 이렇게 푹 잘 수가 있어?’
하지만 깜짝 놀라 움직이기도 전에 누군가가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왔다.
“발에 약초를 붙여 두었습니다. 갑자기 움직이시면-”
“가, 가, 가브리엘?”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내 소스라치는 격렬한 반응에 가브리엘은 깜짝 놀란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차분하게 상황을 볼 수도 없이 나는 펄쩍 뛰듯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내가, 내가 지금, 가브리엘에게 안기다시피 하고 있었잖아!
“그…….”
그는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렸듯 말을 삼켰다.
“왜, 왜 우리가-”
가까스로 뱉은 목소리는 꽤 거칠어져 있었다.
“웅크리고 주무시길래 기대실 수 있게 했습니다. 너무 지척이라 무례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니 방금 전에 그냥 어깨에 머리만 기댄 자세가 아니었잖아요.
내 손이-그 당신 허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어색하게 눈을 굴렸고, 나는 이어진 말에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그, 추우셨던 듯합니다.”
그 짧은 말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내가 달라붙었구나!
억울하고, 당혹스럽고, 부끄러웠다.
내가 춥다고 끌어안고 잔 모양이었다. 가브리엘을!
당혹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을 그의 모습이 상상되어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아, 힐데아.
사라지자. 사라지는 게 맞아.
어떻게 이런 추태를.
“어깨는…… 저리지 않으셨나요.”
“아니요, 따뜻했……. 괜찮았습니다.”
망했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쌀쌀한 아침 날씨에도 불구하고 얼굴이고 손이고 다 뜨거웠다.
특히 손은 방금까지 누군가의 체온으로 인해 따뜻한 것을 알아 심장이 정말.
‘이러다 심정지 오겠어.’
나는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움직이면 위험하다 만류하려는 가브리엘을 못 본 척하며, 일단 걸었다. 발은 조금 다쳤지만, 내가 걷지 못하는 아기도 아니고.
“힐데아,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
“손이라도 닦으려고요.”
그래야 미친 짓을 안 하고 이성을 찾지.
나는 당당하게 호수로 걸어갔다.
그리고 몸을 숙이고 그래도 맑아 보이는 호수에 손을 담그려 했다.
뒤에서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주변에 이끼가 있으니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시는 것이 좋…….”
……그런 건 미리 말해줄래요.
나는 그대로 기울어졌다. 엇, 하는 순간 그래도 살겠다고 몸을 틀었는데 황급히 손을 내민 가브리엘과 마주쳤다.
짧은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저 손을 잡으면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