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꿈속에서는 말할 수 있어 (1)
“힐데아!”
하지만 지금은 죽어도 저 손 못 잡아. 저 온기를 잡으면 큰일 날 것 같단 말이야.
미꾸라지처럼 그의 손을 피했고, 결국 몸이 완전히 기울어졌다.
곧 풍덩!
물에 빠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
“어마마마.”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던 황후는 평소와는 달리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들을 맞이해야 했다.
황후는 눈을 치떴다.
“어미의 손님도 있건만 노크도 없이 이렇게 들어오다니 이게 무슨 무례이지, 황태자?”
잠시 멈칫했던 벤자민은 황후의 앞에서 티타임을 갖고 있던 귀부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합니다, 부인들. 하지만 자리를 좀 비켜주시겠어요?”
모자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이들이 재빠르게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벤자민은 그것도 모자라는 듯 시녀들까지 물렸다. 결국 방에는 둘만 남았다.
“어마마마. 이게 어찌된 것이지요?”
“무슨 말을 하는지 설명을 자세히 해야지, 황태자. 다짜고짜 그리 어미를 몰아세울 것이 아니라.”
벤자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유로운 어머니의 태도가 그를 불안하게 했다.
“힐데아 영애가 납치당했습니다. 현재까지 날이 밝도록 수색 중이며 아직 찾지 못했어요.”
“…….”
“벨키우스 공작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아십니까?”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을 느낀 황후는 오히려 그림처럼 미소했다.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이.
오로지 중간에 한 번, 벨키우스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만 눈썹을 까닥했다.
벤자민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진 것도 그때였다.
“묻지 않으시는군요. 놀라지도 않으시고요. 그렇지요?”
황후는 한숨을 푸욱 내쉰 뒤, 놀랐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분히 의도적인 손짓이었다.
“아니. 황태자, 이 어미는 놀랐단다.”
“…….”
“하지만 황후가 되어 경거망동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그래서 수색대를 더 보내달라 요청하러 온 것이야?”
벤자민은 불쑥 이야기했다.
사실 그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마마마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왜 이렇게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것인지.
아무리 힐데아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호감보다는 아래여야 했다.
그런데 왜.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벤자민은 결국 말을 내보내고 말았다.
이것을 내뱉고 나면 어미가 어찌 반응할지를 예측하면서도.
“보았어요, 어마마마.”
“무엇을?”
“그들의 흔적을요.”
그들, 광신도 말이에요.
“그들은 방금 전 제가 뛰어들어 왔을 때, 어마마마가 저를 보듯이 바라보았어요. 왜 네가 여기에 있지? 그렇게요. 사실은 어마마마, 제가 뒤따랐어야 했나요?”
“…….”
“그걸 위해 연출하셨어요?”
웃는 그대로 멈췄던 황후가 다시 태엽이 감긴 인형처럼 움직였다.
“그것을 왜 이 어미에게 말하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구나. 그들이 어쨌다고?”
“왜냐하면 그들은 어마마마를!”
어머니 명령을 따르니까!
“벤자민! 거기까지!”
일갈하는 데자이아의 목소리에 분기가 서렸다.
챙강!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날아간 찻잔이 벽에 부딪혀 박살났다.
“거기까지.”
데자이아는 잡아먹을 듯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경고했다.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황태자. 그래, 네 유순한 성정이 걸려 항상 이를 드러내라 말했다 하여 그것을 이 어미에게 드러내면 어쩌자는 것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어마마마가 과하셨…….”
바로 그때였다.
다급한 소리와 함께 밖에서 인기척이 났고, 벤자민은 이를 갈 듯이 들어오라 외쳤다.
그러자 창백한 낯으로 들어온 이가 소식을 전했다.
“황태자 전하, 그들의 흔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벤자민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황태자, 네가 어찌하여 움직인단 말이야. 기사들을 시키면 될 것을!”
뒤에서 다급히, 이를 갈 듯이 외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제가 갈게요. 다녀오겠습니다, 어마마마.”
“벤자민!”
그는 미련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싸늘한 정적 끝에 깨진 찻잔을 정리하기 위해 들어왔던 시녀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다시 빠져나갔다.
황후는 천천히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 그것들이 시키지도 않은 것을.”
납치하는 시늉만 해도 좋았을 것을, 황태자와 힐링턴이 얽히기는커녕 이 따위 일로 만들어?
그것도 어이가 없는데 방금 전의 아들의 태도가 그녀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힐링턴. 힐링턴이라.”
좋게 봐주었더니.
그녀에게 힐데아는 굳이 품지 않아도 될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싸늘하게 변모했다.
“아무리 값어치가 괜찮아 보여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지.”
황후는 착한 아들 그대로 그녀의 말을 제일 잘 따를 황태자가 가장 필요했다.
누군가를 위해 그녀에게 이를 드러내는 아들이 아니라.
사랑 따위.
“힐데아 폰 힐링턴.”
황후는 음산하게 웃었다.
“내 아들이 내 손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 달갑지 않구나.”
*
푸하!
다행히 호수는 그렇게 깊지 않았고 드레스도 그렇게까지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헤엄쳐 물 찬 제비처럼 날아올라 수면 위로 솟구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으으, 에취!”
물이 엄청나게 차가웠다.
당황스러운 낯의 가브리엘을 보면서 나는 엉거주춤 위로 올라갔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렇게 민망할 수가.
순간 가브리엘이 얼굴을 일그러뜨려서 나는 움찔했다.
뭐라고 하지?
밤새 달라붙어 민폐를 끼쳤으면서 고작 손 한 번 잡는 게 싫어 이렇게 된 내 꼴을 어떻게 설명하지?
머리가 혼란한 순간이었다.
그가 움직였다. 정확히는 바닥에 깔아 두었었던 그의 망토를 들어 내게 씌웠다.
푹 젖은 옷 때문에 망토도 젖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가브리엘, 망토가 망가질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괜찮…….”
“힐데아.”
“…….”
끓는 것 같은 목소리가 생소해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멋대로 행동해서 화가 난 것일까. 눈을 굴리며 가까스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보았는데.
‘왜 저런 표정을.’
가브리엘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내게 항상 보여주던 것과도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선이 무척이나, 열꽃처럼 뜨거웠다.
“저를 싫어하셔도 괜찮습니다.”
망토를 더 단단히 여미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 닿았다가 떨어지는 손을 멍하니 보았다.
“하지만 이것마저 거절하진 마십시오.”
어쩐지 그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만 괴로운 게 아니라 그도.
그도?
혼란해졌을 때였다.
가브리엘의 뒤의 허공에 갑자기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무리 봐도 사람의 손…….
손인 것 같은데?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이미 가브리엘은 기척을 느낀 것처럼 움직였다. 나를 제 뒤로 감추고 사납게 경계했다.
설마 적?
또 나타난 거야?
와락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았을 때였다.
“힐데아 영애!”
나타난 이들 중 하나가 내 이름을 불렀다.
걱정 가득한 떨림, 그리고 그 목소리는 분명히 익숙한 것이었다.
가브리엘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자, 역시나.
“황, 황태자 전하?”
“아아, 신이시여. 무사했군요!”
그는 벤자민이었고, 그 주변에 같이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은 황실의 기사들처럼 보였다.
우리를 찾았구나.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겠다.
그렇게 안도하는 순간, 벤자민이 뛸 듯이 걸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얼굴이 굳었다.
“힐, 다, 쳤어요? 어디를요. 많이? 옷은 또 왜 그런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다른 손은 가브리엘의 망토를 더 꼭 여몄다.
모두 시선을 좀 치워주면 좋겠다.
저기요, 기사님들. 부담스러워서 쓰러지겠어요.
나는 어설프게 말했다.
“괜찮아요, 황태자 전하. 심한 것은 아니에요. 도망치다가 신발이 벗겨져서 이렇게…….”
그렇게 말을 이으려고 했지.
황태자가 생각보다 너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이게 뭐 당신 때문인가 하고 위로해주려고.
벤자민이 내 말에 따라 헐벗은 내 발을 향해 시선을 내리려고 했을 때, 가브리엘이 날 자신의 뒤로 완전히 감추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힐. 발을.”
“아!”
가브리엘의 넓은 등을 보고 정신이 확 들었다.
‘아, 그렇지.’
저 다수의 사람들 앞에 맨발에 젖은 꼴을 보이느니 그냥 이미 추태를 다 보인 가브리엘의 등에 숨어 있는 게 나았다.
“부, 부탁할게요. 죄송하지만 여기서 말씀드릴게요, 전하.”
나는 얌전히 숨을 죽였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분위기가 흐르는지는 보지 못했다.
왜 이렇게 조용해?
다시 고개를 내밀고 싶었지만, 이제 가브리엘은 손을 뒤로 뻗어 날 단단히 잡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라는 듯.
나는 속으로 웃었다. 체념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정말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긴 하는구나. 서글프게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구나.
따뜻한 손이 팔에 닿는 순간 나는 눈앞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모두 잊었다.
그저 그의 손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
“아가씨!”
정말 존경스럽다.
나는 가브리엘 앞에서 감정을 숨기려면 리라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분명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고, 목소리도 경악스러웠는데 리라의 표정은 강철 같은 무표정이었거든.
“아가씨, 정말!”
“어?”
그런데 의외였다.
다가온 리라가 나를 갑자기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에.
덕분에 걸치고 있던 가브리엘의 망토가 내려갈 뻔해서 황급히 붙잡았다.
“리, 리라?”
이게 설마 리라의 심장소리일까?
많이, 걱정했던 것일까?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는데 리라가 날 떼어놓고 위아래로 마구 살피기 시작했다.
“괜찮으신 건가요?”
“으, 응. 벨키우스 공작님이 지켜줬거든.”
“지켜? 지킬 만한 일이 있었던 건가요?”
뭐지.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나는 나도 모르게 팔뚝을 쓰다듬었고, 서늘한 눈빛으로 물었던 리라가 아차 싶었다는 듯 얼른 나를 이끌었다.
“마차 안은 따뜻해요, 아가씨. 어서 타세요. 그리고 같이 집으로 돌아가요.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