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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75화 (75/155)

75화. 꿈속에서는 말할 수 있어 (2)

다들 기다리고 있다.

그 말에 심장이 뛰었다.

“아, 버지도 걱정하셨어?”

조심스럽게 물은 말에 리라는 이상하다는 듯이 날 봤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당연하지요! 두 분이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황궁으로 쳐들어가신다고 하는 걸 가까스로 말렸는걸요. 그리고 다른 이들……”

응? 하필 리라가 마차 위로 훌쩍 나를 밀어 넣다시피 하면서 말하는 바람에 뒷말을 제대로 못 들었다.

어쨌든 로제는 날 걱정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고.

아빠는…….

“어서 돌아가지요. 아가씨 감기 걸리시겠어요.”

하지만 리라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듯 굉장히 신속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벌써 마차에서 출발하기 직전인 상태였다.

“리, 리라. 잠깐만!”

“네? 왜요, 뭐 놓고 타셨나요? 제가 다 확인하였는데.”

“그게 아니라.”

뭘 놓고 탄 것은 아니지만 가브리엘을 저대로 두고,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가브리엘이 날 구해줬다고 했잖아. 근데 이렇게 먼저 떠나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 게다가 황태자 전하도 저기에 계신데.”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아가씨.”

어, 이상하다.

또 이런다. 왜 이렇게 춥지.

나는 호수에 빠져 흠뻑 젖은 탓에 감기 몸살 기운이라도 오는 건가 싶었다.

리라는 평소 같은, 아니 어쩐지 평소보다 더 싸늘한 무표정으로 아직 닫지 않은 마차 문 밖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가브리엘과 황태자를 보았다.

가브리엘이 말했다.

“먼저 출발하세요, 힐데아 영애.”

그렇지. 우리는 어차피 같은 저택 부지에 살고 있으니까, 또 볼 수 있겠구나.

내가 거절하지만 않으면, 그는 평소처럼 로제의 초대에 따라 저녁 식사에 함께할 것이다.

어쩐지 그 사실이 퍽 안심 됐다. 이대로 헤어져도 끝이 아니라는.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리라를 만류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황태자 쪽으로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마차에 몸을 기댔다.

“후우. 리라, 정말 아빠가 걱정 많이 하셨어?”

지금 리라가 숨을 들이켜며 아빠라고 한 것 같은데. 아빠가 뭐 어때서 저러는 걸까.

하지만 묻고 싶어도 물을 수가 없었다. 리라를 보고 안심했기 때문일까.

‘으.’

눈꺼풀이 엄청나게 무거워졌기 때문에.

꾸벅꾸벅 고개가 까닥이기 시작했다.

마차 안이 리라의 말대로 펄펄 끓을 듯이 따뜻했기 때문일지도.

뭘 했길래 이렇게 따뜻해. 꼭 한겨울에 전기 매트 뜨뜻하게 틀어놓고 잠들기 전에 느끼는 행복한 느낌이랑 비슷했다.

‘피곤하고 졸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하고 의식이 뚝 떨어졌다.

*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는 백금발 남자의 시선은 지켜보는 사람이 깜짝 놀랄 만큼 부드럽고 애틋했다.

하지만 그 마차가 점이 되어 사라질 정도가 되자, 순식간에 변모했다.

“황태자 전하.”

무슨 일이 있었느냐 추궁하듯 물으려던 황태자는 당장 자신의 목을 찌를 것 같은 서늘한 눈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눈이 어쩐지 그가 차마 이야기하지 못한 진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가브리엘은 눈을 휘었다.

꼭 연회장에서 힐데아를 욕했던 자의 사회적 체면을 잘근잘근 짓밟았을 때처럼.

“혹여라도 힐데아 영애에 관한 질문을 하려고 하시던 것이라면 그만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엔 벤자민의 눈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그걸 공작이 뭐라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한걸음. 벨키우스 공작이 황태자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제가 할 말이 아니라고?”

“그, 건.”

그 살벌한 기세에 멀리 지켜보던 황태자의 기사들이 움직이려 했으나,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그저 전설처럼 흘려 들었었던 벨키우스 공작의 무용담은 사실은 모두 진실이었던 것이라고.

<그 어느 것도 뚫지 못하리라>

단순히 사교계에 이름을 올릴 때, 그 축언을 공표하는 것과는 달랐다.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는 황제가 점찍은 사내아이였고, 벨키우스 사변이 일어나 황궁에 들어서게 되면서 그에 대한 것은 낱낱이 세상에 널리 퍼졌다.

이를 테면 그의 축언과 이능에 대해서도.

그 어느 것도 그를 뚫지 못하며, 그렇기에 그 어느 것도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리라.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이능.’

기사들이 파랗게 질려 혹시라도 공작이 황태자에게 검을 휘두를까 두렵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공작은 단순히 고개를 살짝 기울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엾을 정도로 바짝 굳은 벤자민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을 벌인 자가 그로 인해 다친 사람을 두고 그렇게 지껄이면 안 되지 않습니까. 가증스럽게.”

“!”

그 속삭임은 황태자에게만 닿았다.

그는 호흡조차 멈춘 듯, 공작이 제게 던진 무례에 아무런 말도 못했다.

벤자민은 그저 그것만 떠올렸다.

알고 있다.

공작이 알고 있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그가 힐데아에게 그 사실을 말할까 봐.

‘말해도 내가 그녀에게 직접 사죄해야 해.’

하지만 이글거리는 가브리엘의 눈동자는 단순한 살기 그 이상이었다.

힐데아의 선 안에 발끝을 들이미는 것조차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듯, 대체 저런 감정을 어찌 누르고 있었을까 싶을 만큼 적나라했다.

“전하. 혹여 이번 일이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분과의 합작이시라면.”

조각처럼 아름다운 미남의 웃음이었지만, 그 속에 서린 살기에 심장이 조각날 것처럼 아팠다.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

울컥, 하고 벤자민의 입술 사이로 한줄기 핏물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얼른 닦아내고 삼키는 모습을 보며, 가브리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은 그저 경고입니다, 전하. 제가 본디 못 볼 꼴을 많이 보고 자라 눈에 뵈는 것이 없는지라.”

“공, 작.”

“짐승 대신 인간 사냥을 당할 뻔한 소중한 이를 생각하면 혈압이 치솟습니다. 살기가 가라앉지를 않아요. 그러니 제가 미쳐 날뛰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

가브리엘은 자신을 기다리는 가문의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리고 걸어가기 전, 바람처럼 속삭였다.

“부디 이 일을 벌인 자들에게 전해주시지요, 전하. 다음에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고.”

사정없이 물어 뜯어버릴 겁니다.

당신과 당신의 어미까지.

아시겠습니까?

*

시어스 폰 힐링턴은 아내를 잃었을 때, 그때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렸었다.

그리고 지금. 아주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다.

“널 이렇게 만든 자들, 이 아비가 가만두지 않으마.”

힐데아의 상처 입은 발과 손을 보며, 시어스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잠든 힐데아를 마차에서 안고 방으로 걸어와 침대에 눕히기까지 온갖 살기가 흘러 넘쳤다.

“아빠.”

로제리엘의 얼굴 또한 납처럼 차가웠다.

“제가 따라갔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야.

“광신도들이 벌인 일이라고 하였지.”

시어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미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 보낸 시엔으로부터 힐데아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고스란히 전해 들은 뒤였다.

만약 가브리엘이 미친 짓을 저지르며 뒤따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시어스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잃을 뻔했다.

소중하디소중한 힐데아를.

“감히, 말 한번 건네기 어려울 정도로 소중한 내 딸에게.”

상처를 입힌 것도 모자라, 짐승처럼 몰이사냥을 해?

시어스는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좋았다.

누구의 발치에 매달린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시어스 폰 힐링턴은 광신도라면 개미 새끼 한 마리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설령 황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침묵했던 것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의 유언에 따라 딸들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침묵과 관조가 이런 일을 불러 일으켰다면.

‘더는 웅크릴 필요가 없겠지.’

힐링턴은 더는 황궁의 일을 방관할 생각이 없었다.

*

열이 들끓었다.

잠결에도 내가 아, 단단히 몸살이 났구나 하는 것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아파 무력하게 누워 있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틈틈이 체력을 길러왔던 것인데.

‘고작 호수에 한번 빠졌다고.’

이번에 나으면 운동을 두 배는 더 늘려야겠다. 점심 먹고도 뛰어야겠어.

그렇게 가물가물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꿈에서 도통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꿈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꿈에는 여러 사람이 나왔다.

‘우리 로제는 저런 얼굴 안 하는데. 꼭 다른 사람 같네.’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로제가 다른 사람 같다. 꿈이니까. 꿈이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언니, 미안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아득히 멀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어서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슬퍼하지 마, 로제.

꿈이라도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다 말해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로제가 중얼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로제?

하지만 곧 꿈이기 때문에 풍경이 아득히 멀어졌다.

곧바로 사람이 바뀌었다. 같은 풍경, 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아빠.’

이번 꿈의 주인공은 아빠였다.

아빠가 내 손을 잡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슬퍼 보이던지 나는 꿈은 욕망의 반영이라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있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이렇게 간단했다.

사랑하는 가족.

내가 아끼는 가족, 로제와 아빠.

‘사이 좋은 힐링턴.’

그들이 나를 더 편히 여겨주었으면. 내가 웃지 못해도,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지 못하더라도 상처 받지 않고 같이 위할 수 있기를.

그때였다.

확신할 수 없지만 어쩐지 아빠의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소리.

‘힐, 힐데아.’

잔뜩 흐느끼고 있는 아빠의 목소리였다.

나는 꿈속에서도 당황했다.

아빠의 저런 모습이라니.

설마.

설마 내가 우리 아빠를 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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