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꿈속에서는 말할 수 있어 (2)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그냥, 그냥 나는 나를 똑바로 봐주는 아빠가 보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울고 계신 것은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꿈속의 아빠는 내 손을 소중한 듯 꼭 잡고 있었고, 로제에게 향하듯 웃고 계셨다.
‘울다가 웃다가 반복하셔서 좀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좋긴 좋았다.
뚜렷한 걱정이 눈에 보여서.
어쩐지 자연스럽게 웃었던 것도 같았다.
그 이후로도 익숙한 사람들이 나와 나를 걱정해주었다.
리라도 있었고, 시엔도 있었고, 나만 보면 머리 꽁지만 보이며 쏙 도망가는 정원사 아저씨도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람이 나왔다.
가브리엘.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내가 사랑해버리게 된 남자주인공. 하지만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
‘힐데아, 제가 늦었습니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퍽 다정다감해서 이게 완전히 꿈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빨리 오고 싶었는데 방해하는 이들이 많아서.’
현실의 가브리엘은 행동은 무뚝뚝한 기사처럼 예의 바를지라도, 얼굴만큼은 숨기지 못했으니까.
‘힐데아.’
저렇게 애틋하게 바라보지도 않고, 저렇게 부드럽게 웃지도 않고, 또 저렇게 내게 닿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이 손을 움츠러뜨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대신 아프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꿈이잖아. 꿈속에서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면, 그건 정말 너무한 거잖아?
그러니까 나도.
나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눈을 뜨면 가루처럼 사라져버릴 신기루라고 해도 친절한 아빠, 진지한 로제, 상냥한 힐링턴 가문 사람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가브리엘.
사라질 꿈이니까.
어차피 져버려야 할 이 마음을 한 번쯤은 고백해 봐도 좋지 않을까.
*
빌어먹을 힐링턴 인간들.
물론 그 힐링턴에 소중한 힐데아도 끼어 있다는 것이 가끔 서글프긴 했지만, 어쨌든 성가신 인간들이었다.
처음에는 힐데아가 쓰러지고, 며칠이나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이라 그들도 경황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로제리엘이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 순간부터 견제가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둘만 숲에 있었던 거네요? 하룻밤을 같이 새워버렸……. 하룻밤을 보냈네?’
‘!’
정말 말하기 싫지만 그래도 딸을 구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도 한 번은 해주겠다는 이상한 문장을 말하던 시어스 폰 힐링턴 공작.
무표정하긴 했지만 제법 부드러운 시선으로 차를 내어주던 힐데아의 전속시녀, 리라와 시엔.
그밖의 수많은 힐링턴 인간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늘해졌다.
그리고 그를 쏘아보았다.
‘가브리엘.’
특히 로제리엘이.
그는 자신을 뭘로 보고 저딴 시선을 보내는가 싶어서 짜증이 났고, 억울해졌고, 로제리엘이 두꺼비처럼 여태까지 꿀꺽꿀꺽 삼켜온 수많은 보석을 토해내라 쪼잔하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언니가 저렇게 감기에 걸려서 앓고 있는 것도 옷이 흠뻑 젖어서 그런 거라고 했잖아요!’
‘호숫가에서 야영했다면서. 설마, 설마 가브리엘, 네놈이 우리 힐데아를 호숫가로 밀어버린 것이냐!’
‘정말 대꾸하고 싶지도 않군.’
싸늘하게 말했지만, 어쩐지 과도할 정도로 휘청인 시엔이라는 시녀가 무시무시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꼭 제 남자친구가 다른 사람과 바람났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의 표정이어서 떨떠름해졌다.
왜 이 인간들은 날이 갈수록 미쳐가는 것 같지.
‘손, 손!’
시엔이 파들파들 떨며 말했다.
‘아가씨가 잠꼬대로 손을 잡으시면서, 흑, 가브리엘, 이라고 말하셨어요…….’
그 말을 끝으로 인간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우리 힐데아의 손을 잡았어!
“진짜 미친 인간들.”
손을 잡을 수도 있지, 항상 허락을 구했었는데. 허락을…….
가브리엘은 잠시 제 품에 안기다시피 하며 잠들었던 힐데아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모든 접촉을 허락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제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으셨습니까?”
괜히 그는 잠들어있는 힐데아를 바라보며 헛기침을 하며 속삭였다.
“하지만 제가 무례한 짓을 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힐. 저는 그저 당신을 더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서……. 솔직히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은 좋았지만, 못된 의도는 없었습니다.”
어쩐지 감긴 힐데아의 눈꺼풀이 파르륵 흔들린 것 같았지만, 아닐 것이다.
워낙 몸이 안 좋아 먹인 약 기운이 독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은 계속 이렇게 잠들 것이라고.
치유의 이능을 지닌 자를 당장 먹이 채듯 잡아와 치유하고 싶어도, 본래 무의식이 가장 강한 법.
정말 안심하는 상대가 아니고서야 힐데아는 무의식적으로 그 상대의 이능을 거부할 것이다.
정말 마음 속 깊이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치유의 이능을 가졌더라도.’
지금 저렇게 아픈 힐데아를 치유할 순 없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려고 했을 때였다.
아까 본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처럼, 파르륵 하고 힐데아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멍해진 붉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깜짝 놀랐다.
“히, 힐데아. 정신이 드십니까.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이 순간에도 이따위 정 없는 말투밖에 나오지 않는 것은 참담했지만, 가브리엘은 기뻤다.
만약, 그 순간.
힐데아가 그의 손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당장 로제리엘과 다른 사람들을 부르려 움직였을 것이다.
“힐……?”
무척 힘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가지 말라는 것처럼.
그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여기에, 있으라는 건가요?”
“응.”
힐데아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윽.’
그리고 그를 보며, 웃었다.
아이처럼 해맑게.
“가브리엘.”
화사하게 피어난 것 같은 그 미소에 가브리엘은 이곳이 어디이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힐데아가 나를 보며 웃었어.
그 생각만 폭풍처럼 몰아쳤다.
결국 가브리엘은 시끄럽게 방해할 인간들을 나중에 부르자고 생각하며, 일단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힐데아의 시선이 자신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따라왔다.
그 모습이 어미를 따르는 아기새 같아 웃음이 터졌다.
귀엽다.
“네, 가브리엘입니다.”
“응…….”
약기운 때문인지 힐데아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였지만, 그는 용기 내어 말을 이었다.
“힐데아. 제 말 알아들으시는 겁니까? 지금 약 기운 때문에 기억을 못하시는 건 아니십니까.”
“가브, 리엘. 미소, 예뻐요.”
목이 잠겨 있었지만 분명 힐데아는 잠에서 깬 것 같았다.
그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반드시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날, 테라스에서.”
“응…….”
그날은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으니.
“용기를 내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허락해주셨고, 그리고 저는 당신께 말했습니다.”
그는 차마 그녀를 보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좀 더 근사한 상황에서 다시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또 힐데아가 자신을 차갑게 보며 멀어질까 봐 두려웠다.
지금이 아니면 애초에 말할 기회도 없을지 모른다.
“저는, 힐데아 당신과.”
만약 그녀가 냉정하게 내친다면.
그런 기억은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결국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끔찍하게 두려웠지만 그대로 돌아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들었던 답이 꿈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싶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
“당신의 마음이 제 것과 완전히 같지 않더라도, 선택해주신다면 잘하겠습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말을 더럽게 못하는군.
온갖 달콤한 말들을 놔두고 뭘 잘해주겠다는 건지.
한심했으나 지금 당장 숨이 터져나갈 것 같은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들어 올렸을 때, 그는 바로 코앞에 다가와 앉아있는 힐데아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히, 힐데아?”
그는 홀린 듯이 제게 다가와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
언제나 우아한 예절을 벗어나지 않던 힐데아가 처음 짓는 표정.
“나도 좋아.”
“!”
힐데아가 평소와는 말투가 달랐다는 것, 이전과는 지나치게 태도가 달랐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알아챌 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그저 포로가 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아요…….”
그의 뺨을 무척 소중한 선물을 쓰다듬듯이 매만지다가 이제 힘에 겹다는 듯 다시 누워 눈을 감는 힐데아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느새 가브리엘의 눈가가 발긋해 있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또 한낮의 꿈으로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도록.
“모른 척하시면 안 됩니다, 힐.”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그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심장 가득 기쁨으로 충만했다.
*
멀어지고 흐려지고 모든 기억들이 뒤섞였다. 뭐가 현실이고 꿈이었는지 모르겠다.
마침내 깔끔한 느낌과 함께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헉.’
불어 터진 어묵처럼 된 우리 로제였다.
눈이 저게 뭐야.
“로, 로제?”
“으아아앙 언니야아아!”
와락 달려드는 것은 감동이었지만, 억, 하고 명치를 들이받쳐 신음을 터뜨려야 했다.
로제, 로제. 네가 힘이 얼마나 센 지 알아!
“로, 로제, 언니, 숨, 숨 막혀.”
“으악! 언니, 언니 괜찮아? 지금 겨우 흐엉, 나은 언니를 내가 터뜨려버릴 뻔한 거야? 흐엉!”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가정은 하지 말자. 근데 이게 어떻게 된…….”
“아, 몰라. 모른다고. 언니 열이 얼마나 났는지 알아? 아픈 언니 얼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흐엉!”
잠시 로제의 말에 의아함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아픈 적이 있었던가?
아, 어렸을 때 그랬긴 하지만 그건 심리적인 아픔이었는데.
어쨌든 모처럼 엉엉 우는 로제의 등을 토닥여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불현 듯 떠오른 선명한 기억에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 침대, 이 공간, 여기에서.
어떤 꿈을 꾸었었는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