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77화 (77/155)

77화. 놓는 것도 시간이 필요해요 (1)

꿈이겠지. 분명 꿈 일거야.

하지만 그게 꿈이어도 문제였다.

참담한 심정에 가슴이 조각나는 것 같았다.

꿈속에서 가브리엘과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니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나도 좋아.’

아악!

“언니, 왜 그래? 또 아파?”

로제가 깜짝 놀라 날 살펴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힘을 주어 막았다.

제발 로제. 지금은 내 얼굴을 보지 말아줘. 어떤 낯으로 널 보아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기어코.’

감정이라는 것이 너무 무섭다.

‘이 균형을 깨버릴까 봐.’

내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어느 순간 툭 하고 튀어나와서 머리를 내밀면 어떡하지?

꿈이 내가 품었던 적나라한 욕심을 보여준 것 같아서 코끝이 시큰했다.

나는, 내가 로제를 밀어내고 가브리엘과 결혼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이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고삐를 놓쳐서, 끝도 없이 엇나가면 어떡하지?

“로제…….”

“응, 언니. 괜찮아, 괜찮아. 악몽일 뿐인 거야, 언니.”

로제가 상냥해서 눈물이 나왔다.

이 애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나도 못된 언니가 되고 싶지 않고.

정말 그랬다.

결국, 내가 여기서 더 사고를 치기 전에 준비해야겠구나.

나는 로제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

딸랑, 하고 문이 울리는 소리가 나고 잔뜩 구시렁거리면서 먼지를 쓸고 있던 조세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색했다.

며칠 동안 기다리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힐님, 약속한 날짜가 되어도 방문하지 않으셔서 무슨 일이 났는가 싶었습니다요.”

“오랜만이에요, 조세페. 그동안 잘 지냈죠?”

“저야 항상 비슷, 응? 그런데 오늘은 화분을 들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조세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텅 빈 힐의 손을 보았다.

그녀가 이곳을 방문하는 목적은 오로지 그림자 경매장의 판매였으니까.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판매하지 않을 거예요.”

조세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뺨을 긁었다.

“어어, 그렇다면 여기는 왜?”

잠시 말을 멈춘 힐이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꼭 말을 꺼내기 어려운 것을 내뱉으려는 모습이었다.

조세페는 은근히 불길해졌다.

“조세페, 제가 예전에 부탁했었던 것 기억하나요? 일전에 혹시나 싶으면 준비해달라고 한 것들이 있었죠.”

“아, 예, 예.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준비도, 해놨긴 한데……. 그것을 쓰신다는 건.”

조세페의 얼굴이 일순간 창백해졌다. 그걸 쓰겠다고?

“서, 설마. 그럼 여길…… 떠나시는 겁니까?”

그럼 우리의 거래도 이대로 끝?

“갑자기 통보해서 미안해요.”

물론 조세페도 따지려면 따질 수 있었다.

상대가 은근히 정에 약한 인물이라는 것을 겪어오며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오가며 정이 들었기 때문에 대체 저 차분한 여인이 왜 도망치려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도주보단 방해물에 침착하게 맞서서 대응할 것 같은 성격이었는데.

“혹시 말 못할 위험에 처해 계시다면,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후드에 가려져 있었지만 깜짝 놀란 모습이 역력해서, 조세페는 멋쩍은 얼굴을 했다.

“뭐, 우리가 그냥 거래를 주고받는 사이인 것은 맞지만……. 제가 힐님에게 큰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성장하고 돈도 두둑하게 번 것도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어쩐지 저 여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적당한 일이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말이다.

“제가 떠나고 나면.”

꿀꺽, 마른침을 삼키자 힐이 작게 웃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작은 웃음이긴 했지만 상대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고운 턱선과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저 후드 안의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완성하고 있을 것 같았다.

“제가 떠나고 나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 제 흔적을 찾을지 몰라요. 물론 바로 찾진 않을 거예요. 나도 힐이라는 이름으로 해왔던 것들은 열심히 흔적을 지워왔으니까요.”

조심스럽게 내뱉는 말을 그는 단박에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힐님.”

누구로부터 도망가는 것인지 모르지만, 지금 저 여인은 만만치 않은 힘을 지닌, 어쩌면 고위 귀족에 해당하는 자를 피해 도주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모처럼 정의감에 불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설령 황제가 와도 불지 않으리라!

그 무섭다는 귀신 공작만 아니면 됐지. 그는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을 쳤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한이 드는 것 같지?

조세페는 고맙다고 인사를 몇 번이나 남기고 떠나는 힐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부르르 떨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조세페는 자신의 축언, <길가의 잡초처럼 질기게 살아가리라>를 믿었다.

저 힐을 돕는 것은 정말 옳은 선택일 것이다.

*

“리라, 이게 다 뭐야?”

“음, 하나씩 다 풀어보시겠어요? 아니면 저희가 정리해서 귀중한 것들만 올릴까요?”

“이게 다 내 거라는 소리야?”

“네, 아가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태까지 들이지 못한 선물들이라고 했다.

황태자가 부른 사냥 대회에서 내가 당한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 같았다.

그 뒤의 일은 듣지 못했지만, 관련되어 있는 자의 신병이 결국 넘겨졌다고.

정신이 이상한 자들이었다는 말을 로제에게서 들었다.

그런데 고작 그것가지고 귀족들이 이렇게 선물을 보내다니. 설마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건.’

그 중 유독 화려한 포장을 하나 발견했다. 왜 화려하냐고 했느냐면.

“이건 대체 누가 보낸 거야, 리라?”

그건 파리지옥을 담은 화분이었기 때문이다.

윽, 정말 악취미가 아닌가 싶었다. 아팠다 일어난 사람에게 무슨 파리지옥 화분을…….

가까이 다가갔던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굳었다. 아.

딱 몇 초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러면 못 본 척하고 방으로 올라갔을 텐데!

“리라, 이것만 우선 가지고 올라갈게. 이 포장지들은 치워주고.”

“네, 그런데 그걸…… 키우시게요?”

난 떨떠름하게 파리지옥을 보았다. 저게 내 이능을 먹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역시 안 키울래.

“음, 아니. 그러면 이 화분은 정리해주고 난 이것만 가지고 갈게.”

내가 발견한 건 화분의 흙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편지였다.

열어보지 않아도 밀랍으로 찍은 도장 위의 문양이 너무 화려했다.

‘황궁의 인장.’

나는 그것을 품에 넣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앉자마자 심호흡을 한 뒤 편지 봉투를 열었다.

안에 있는 것은 빳빳한 종이 위에 그림이 그려진 엽서에 가까운 것이었다.

문장도 길지 않았으나, 그 삐침이 화려한 신경질적인 필체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 것 같았다.

「친애하는 힐링턴, 큰일을 겪었는데 참으로 안되었군요. 그대가 충격을 받을까 봐 미리 전해요. 그대가 은밀히 마음에 품은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사람이 청혼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대의 번민도 끝나겠네요. 애석하여라.」

나를 걱정하는 듯 교묘하게 썼지만 결국 악의가 가득한 이 편지의 주인공은 분명 황녀, 라피이아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게 왜 이런 것을 보냈는지는 의식의 저편으로 날아갔다.

청혼.

결국 황녀의 귀에 들어가게 될 정도로 가브리엘이 로제리엘에게 청혼하는 순간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아…….”

나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청혼을 받는 상대가 로제리엘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주변의 조롱이나, 소문은 두렵지 않았다.

그때였다. 똑똑 하는 명랑한 노크 소리가 장난스럽게 들리고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언, 니! 내가 오늘 무슨 소식을 들었…….”

“로제.”

“응? 그거 뭐야, 언니? 잠깐만, 그거 황궁 인장 아니야? 대체 누가 뭘 보냈길래 언니 표정이…….”

“로제!”

“어, 언니?”

미쳤나 봐.

내가 누구한테 소리를 질러.

하지만 편지를 로제가 보려고 했을 때, 초조하고 다급해져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움찔 굳은 로제가 흔들리는 눈으로 날 봤다.

나는 그 눈을 보며 편지를 손에서 구겼다. 이걸 불태워서라도 로제의 눈에 들어가게 하지 않을 것이다.

로제는 그냥 행복하게 곧 있을 청혼을 받아들이면 돼.

“로제, 아무것도 아니야.”

“하, 하지만 언니, 지금 손이 베여서 피가 너무 많이 나. 내가 좀 볼…….”

“아니! 아니야. 로제,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다가 오지마.”

심장이 베여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두려워하던 순간이 바로 이런 것이었는데.

날카롭게 나간 반응에 슬픈 듯, 혼란스러운 듯이 바라보는 로제리엘.

“언니…….”

“내가 오늘 좀 피곤한가 봐. 말해주려던 그 좋은 소식은 몇 시간 만 있다가 들을게. 미안해, 로제.”

“으응. 알았어. 언니 쉬어, 내가 나중에 올게.”

시무룩하게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가슴을 쳤다.

미쳤나봐, 힐데아 폰 힐링턴.

가브리엘에게도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놓고.

제 감정 하나 주체 못해 아무 잘못 없는 저 애를 슬프게 해?

상대의 행복을 완벽하게 축복해줄 수 없다면 보지 않고 멀어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죠, 크라이스?

나는 어느새 흥건하게 나온 피에 젖은 편지를 우울하게 내려다봤다.

피에 덮어 글자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 안심하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서.

“정말 여기까지인가 봐.”

*

셀데리아 백작 영애는 정말 잘할 자신이 있었다.

황녀 라피이아의 총애를 얻기 위해 어떻게든 입안의 혀처럼 굴었었는데, 이렇게 신용을 잃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 못할 짓이 없었다.

항상 황녀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살았기 때문에, 그녀가 심심풀이로 적어놓곤 하는 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보내려다 만 편지 같은 것들.

셀데리아 백작 영애는 손톱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었다.

‘황녀 전하가 왜 힐링턴에게 편지를 보냈지?’

설마 자신을 내치고, 그 힐링턴을 자신의 곁에 두시려고 하는 것일까?

그건 안 돼!

질투에 눈이 먼 그녀가 마침내 황녀의 서랍에서 힐링턴에게 보내려고 했었던 편지들을 발견했을 때.

그녀의 눈은 크게 뜨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