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78화 (78/155)

78화. 놓는 것도 시간이 필요해요 (2)

‘이 내용이 정말 사실이란 말이야?’

그건 드문드문 쓰인 문장들이었다.

황녀 혼자 생각한 것들을 써내려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황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그것을 보며 유추했다.

황녀께서는 힐데아 폰 힐링턴과 로제리엘 폰 힐링턴이 그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길 바라시는 거구나!

‘벨키우스 공작과 혼담을 바라셨으니 일단 혼담이 파해져야 맞지. 자매가 서로를 의심하고 싸우면 얼마나 웃긴 꼴을 보게 되겠어.’

이상한 것은 목걸이의 주인은 힐데아 폰 힐링턴이었다는 점인데, 편지는 꼭 힐데아가 동생의 남자를 탐하는 것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는 점이었다.

그럼 소문대로 정말 목걸이는 위장이며 벨키우스 공작은 로제리엘을 진짜 약혼녀로 생각한다는 걸까?

‘그런 것 치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연회장에서 뱀 앞에 놓인 쥐처럼 가브리엘의 시선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끔찍하게 질려 혀를 내둘렀다.

힐데아의 머리털 하나 건드리면 자근자근 짓밟아버린다는 의지가 명백했는데.

실제로 사냥대회 때 관여했다고 알려졌던 이들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자들이라고 발표되었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건 황제가 중재하기 위해 발표한 것이며, 사실은 미친 것처럼 분노하며 날뛰는 힐링턴과 벨키우스에 의해 어떤 조직이 잔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와해하였고, 그로 인해 황후가 화병에 졸도했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건 기회였다.

‘반드시 황녀 전하의 신뢰를 다시 얻고야 말겠어!’

그녀는 그 편지에 인장을 찍고, 품에 잘 숨겨 도도하게 빠져나갔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했다. 이 편지로 인해 벌어질 일들이 그녀가 모시는 황녀, 라피이아를 한없이 기쁘게 할 것이라는 걸.

*

가브리엘은 지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힐데아로부터 확언도 들었고, 이제 남은 것은 그가 제대로 정식으로 공표하며 청혼하는 일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언제든, 확실하게 힐데아를 지킬 수 있게 된다.

집적거리는 짜증나는 황태자에게도 당당하게 차단할 수 있을 것이고, 황제와 황후의 도발에도 약혼자이기 때문에 그가 앞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름을 부를 수 있겠지.’

그 눈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누그러지기를 바라며, 헌신하며 무릎을 꿇을 것이다.

“진짜 확실하게 들으신 것 맞으십니까, 주군?”

비록 저렇게 초를 치는 인간이 옆에 있더라도 오늘만큼은 온화하게 넘겨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럽니다.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건지 모르겠어요.”

“뭐가 불안하다는 거지? 좋은 일에 재 뿌리지 말고 꺼져라, 디안.”

“아니, 주군이 힐데아 영애의 일에는 정신머리가 다 빠진 사람처럼 행동하셔서 걱정이, 이크!”

와장창!

디안은 뒤를 보고, 배신당한 사람처럼 억울하게 제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락 외쳤다.

“주군! 제가 주군을 위해 얼마나 걱정하고 또 노력했는데 지금 듣기 싫은 말 한 번 했다고 화병을 집어던지셨어요? 저게 얼마나 비싼 건지 아십니까!”

가브리엘은 코웃음을 쳤다.

연애에 관한 디안의 충고는 이제 빛바랬다.

그의 말대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가 힐데아를 더 물러나게 할 뻔했지 않은가.

“내 것이지 네 것인가. 깨져도 내 돈이 깨지는 건데.”

역시 용기를 내어 고백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

그가 공부했던 연애법을 쓴 저자를 직접 찾아가 선물이라도 주고픈 심정이었다.

“제가 부관인건 아시죠? 재정 관리도 도맡고 있습니다만! ……아니지,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정말, 정말, 완전 확실하게 들으신 것이 맞으세요? 힐데아 영애가 주군과 약혼하시겠다고 했다고요?”

“…….”

하필 로제리엘도 의심쩍은 얼굴로 저리 물었었기 때문에 화가 나려고 했다.

왜 아무도 믿지 못하는 거지?

그럼 힐데아가 자신을 거절하길 바란다는 건가, 뭔가.

분명 힐데아가 자신에게 좋다고 했는데.

그 좋다는 것이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신과 약혼해도 좋다는 의미였겠지만.

‘귀족 모두가 사랑으로 결혼하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잘하면 돼.

일단 힐데아가 그를 허락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두 번.”

그는 오만하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비웃었다.

“두 번이나 확실히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뺨을 매만져주기도 했어.

“악!”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자, 디안이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이 짜증나 가브리엘은 눈을 사납게 치뜨고 어디 하나 더 던질 것이 없는지 물색했다.

“뭐, 주군이 그러시다면야 확실하겠지만…….”

그는 할 수 없이 소중하게 보관하려고 했었던 것을 꺼내들었다.

“이, 이게 뭔가요 주군?”

“네가 그리도 원하는 확실한 증거.”

그건 분명히 힐링턴 공작가의 밀랍 도장이 찍힌 편지였다.

하지만 디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힐데아 영애의 성격에 이렇게 근거리에서, 사람들 몰래, 편지를 보냈다고?

“저는 힐링턴의 사람이 편지 보내는 것을 못 들었는데요?”

“굳이 보고하지 않고 전달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건 보통 위급한 상황에서나 그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가브리엘은 믿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편지를 열었고, 그 안에 적혀 있는 문장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 당신의 생일 연회, 그날의 청혼을 기대할게요.

“내가 몇 번이나 힐데아와 편지를 오갔는지 네가 모르나? 이건 분명 그녀의 필체가 맞아.”

그 확신에 찬 목소리에 결국 디안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

“하아.”

밖으로 빠져나온 디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렇게 아이처럼 행복해하는 주군을 보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축하해주는 게 맞다.

힐데아 영애와의 사이를 위해 노력하는 게 맞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바뀐다고?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주군을 피하던 힐데아 영애였잖아.’

이 힐링턴 공작가에서 힐데아가 가브리엘을 얼마나 꺼려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서로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일종의 남매 같은 로제리엘과 가브리엘을 구원하기 위해 기특한 결심을 하기라도 한 것일까?

“근데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한 거냐, 쯧.”

디안은 이때 몰랐다.

“그래도 직감은 주군이 더 좋으니까.”

그의 직감이 사실이었고, 그의 주군은 평소의 영민한 상태가 아니라 지금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볼 만큼.

은근히 치미는 불안을 무시하려 들 만큼.

너무 오래 지켜온 감정은 가끔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 수도 있었기에.

“뭐, 누가 작심하지 않고서야 상황이 그렇게 꼬이려고?”

그는 가브리엘의 계획대로 그의 생일 연회장에서 터뜨릴 기쁜 청혼을 도와주면 그만일 것이다.

설마 힐데아 영애가 저렇게 말해놓고, 연회장에서 주군을 거절하기야하겠어. 하하!

“배나 채워야겠다.”

디안은 마음 편히 걱정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주군의 앞에서 하도 떠들어서 그런지 배가 출출했다.

이것이 그들의 두 번째 큰 어긋남이었다.

*

라피이아는 자신의 앞에 파랗게 질려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아주 싸늘한 눈빛으로.

“화, 황녀 전하. 제발 살려주세요!”

라피이아는 코웃음을 쳤다.

“이상하네. 내가 그대를 죽인다고 하였나요? 그렇게도 말 이상하게 하는 버릇을 고치라 그렇게 말했는데.”

빨간 머리카락의 영애는 황녀의 아래 납죽 엎드렸다.

“제발, 제발 용서해주세요. 저는, 저는 황녀 전하께서 제게 화가 나셔서…… 저를, 저를 내치실까 봐.”

“그래서 내가 명령하지도 않은 일을, 나 몰래 했다? 그러니 모두 내 탓이다? 지금 영애는 가증스럽게 그리 지껄이는 건 아니겠지요.”

라피이아의 입술이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그대. 나는 그대를 퍽 아꼈어요.”

“아, 압니다. 알아요. 그러니 전하, 그간의 정을 보아서 저를.”

“그건 아니지.”

“!”

빨간 머리카락의 셀데리아 백작 영애는 그 말에 희망을 느낀 것인지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나는 지금 꽤 화가 났어요. 그러니 그리 쉽게 용서하는 건 안 될 말이지.”

하지만 냉랭한 라피이아의 눈빛은 그대로여서 그녀는 그대로 절망했다.

“하, 하지만 왜. 저, 전하께서도 그리하시려던 것 아니었나요?”

라피이아는 잠시 웃음을 멈췄다.

이것이 지금 뭐라 하였지.

눈이 가늘어졌다.

“후후, 왜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지요, 영애? 그러니까 그대가 잘한 것이다? 내가 어차피 하려 했으니까?”

“아, 아닙니다! 하지만 억울, 그, 러니까…….”

라피이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은 여전했지만, 아까보다는 심드렁한 태도였다.

“영애. 나는 그대가 내 물건에 마음대로 손을 댄 도둑이라는 것에 화가 난 거예요. 알았나요?”

“그, 그럼!”

“그러나 영애는 이제부터 황녀 궁에 출입할 생각을 거두는 게 좋겠어요. 내 모임에도 나올 필요 없어요.”

셀데리아 백작 영애는 절망했다.

그건 사교계의 영원한 추방이나 다름없었다.

“저, 전하? 전하, 어째서!”

“몰라서 물어?”

라피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어린 아이를 상냥히 보듬어주는 부모처럼 눈을 휘었다.

“말귀를 더럽게 못 알아듣는구나. 감히 주인의 뜻을 알아서 결정하고 행동한 것이 괘씸하다는 뜻이란다. 혼자 무슨 짓을 해놓고 그것을 주인에게 덮어씌울 줄 알고. 그렇지 않니? 다들 얘 데리고 나가.”

“전하, 전하!”

곧 라피이아는 손가락을 딱 쳤고, 들어온 시녀들이 안 된다며 발악하는 영애를 끌고 나갔다.

방이 고요해졌고, 라피이아는 영애가 이실직고하고 간 편지의 내용을 내려다보았다.

“스케일도 크게 놀았군. 그 힐링턴과 벨키우스를 상대로 말이야.”

필체 조작에, 움직일 줄 모르던 거북이를 도발한 내용이라.

아주 깜찍한 짓을 했다.

그것도 자신의 이름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