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80화 (80/155)

80화. 반지를 함께 골라주세요 (2)

누가 알까.

시어스 폰 힐링턴.

비록 이제 사십 줄에 들었지만 아직도 외모는 파릇파릇한 삼십 대 초반 같은 외모의 공작.

<사랑으로 완벽하리라>라는 축언을 가지고 태어난 벨키우스 공작 이전의 가장 뛰어난 기사.

그는 한때 미엘르 제국의 가장 단단한 검이나 방패이며 수호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이렇게 딸 앞에 작아지는 팔불출 아버지였다.

“처지가 서럽구나. 이것이 바로 우울증인지 모르겠어.”

그는 서럽다는 듯이 스스로를 껴안았다.

“이 아비는 이제부터 연어 스테이크가 꼴 보기 싫어질 것 같구나, 로제.”

“아빠…….”

아무리 힐데아에게 자연스럽게 반지를 건네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연어에 박아서 주겠다는 정신머리는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

“방법도 너저분했다.”

시어스는 차갑게 냉소했다.

“엥? 그건 제 의견이었어요, 아빠. 먹을 거 앞에서는 사람이 더 감격하게 되잖아요! 난 언니가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헤헤.”

“…….”

그건 너나 그렇단다, 로제.

애정을 담아 속삭여주고 싶었던 시어스는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어제 자기 직전까지 울었더니, 아직도 눈이 뻑뻑했다.

시어스는 아직도 로제가 환히 웃으며 전한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힐데아가 그 얄미운 가브리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니.

‘그래. 그놈이 좀 집착이 심한 놈인가.’

얼마나 진득하게 굴었으면 냉정하게 굴었던 힐데아가 수락했는가 싶을 때는 가브리엘을 후려패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래도 이후에 힐데아가 묘하게 밝아진 것을 생각하면 또 어쩔 수가 없군.’

로제리엘이 고개를 갸우뚱 흔들며 물었다. 저럴 때는 순진한 어린 동물 같아서 결국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아빠는 괜찮으신 거예요?”

역시 이 맛에 자식을 키우는 것이다. 저렇게 걱정해주는 눈을 보면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눈 봐요, 눈! 완전 웃겨요! 푸흐, 아까 언니가 아빠 눈만 봤는데.”

……배가 부르진 않았다.

시어스는 자른 양고기를 입에 넣었다. 고기 맛이 훌륭하군.

“아빠, 그냥 솔직하게 말해보는 건 어떠세요?”

“뭐라고 하란 말이냐, 로제.”

“언니가 결혼할 거 생각하면 눈물뿐 아니라 콧물도 나오고 있다고요?”

“…….”

“농담이고요. 아빠가 섭섭하다고요.”

시어스는 로제의 한심 절반, 불쌍함 절반이 섞인 시선을 받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웃으며 보내줘야지.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그 착한 아이, 가족들 신경 쓰느라 편하게 결정 못 할지도 모르는데.”

“그, 렇게 멋있게 말하는 것 치고 아빠 눈은…….”

“로제. 이 아비를 놀리지 말아라.”

제대로 살갑게 말해주지도 못하고, 보듬어주지도 못하고, 가끔 칭찬을 해주거나 칭얼거림을 받아주지도 못했는데.

벌써 딸을 보내야 한다니.

로제 말대로 그는 요즘 극심한 우울증에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특히 그놈의 반지 이야기까지 나온 상황에서는 매일같이 울었다.

힐데아. 내 딸. 소중한 내 딸을 저런 속 시커먼 놈에게 보내야 하다니…….

“살기가 싫구나.”

로제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언니 어디 안 가요. 그냥 결혼하는 것뿐이에요! 가브리엘이 무슨 먼 왕국의 왕자도 아니고요.”

시어스는 그것을 그나마 위로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힐데아가 먼 곳으로 떠나버리는 것은 아니지.

훌쩍.

“아빠 또 울어요……?”

그는 침울하게 속삭였다.

“늙어서 그런 모양이다.”

“으휴, 정말.”

“후우.”

“천천히 드세요, 아빠. 다 드실 때까지 같이 있어 드릴게요.”

눈물에 젖은 양고기는 아주 맛있었다.

*

마차를 타고 내린 곳은 내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왜 여길?’

여긴 비밀 잡화점이잖아.

혹시 가브리엘도 시엔의 추천을 받고 온 것일까?

얼떨떨하게 바라보는데 가브리엘이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었다.

이걸 잡아야 해, 말아야 해?

심란하게 바라보자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길이 닿았다.

‘그래, 보통 귀족 신사가 영애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하는 건 일반적이지.’

애써 위안하며 그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여긴 대체 뭐로 만든 걸까?

공간 자체가 특이한 것 같은데.

“안녕하십니까! 고객님들. 오, 이런. 예약하신 손님분이시군요. 말씀하신대로 소중한 반지를 고르려 오신 것이지요? 옆의 분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는 그때의 그 판매원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눈으로 경고했다.

거기까지 하세요.

“흠흠, 눈빛이 매섭…… 네에, 두 분 다 눈빛이 무척 훌륭하시군요.”

무슨 소리람.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헙, 알겠습니다. 저는 입 다물고 준비한 훌륭한 물건들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곳에서 사갔던 물건이 바로 가브리엘의 커프스 버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 오묘한 인연이었다.

그래서 지금 저 판매원이 내게 자꾸 샐쭉한 눈웃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리라.

‘아니라고요. 그런 거 아니라고.’

가뜩이나 슬픈 것을 참고 있는데, 저 판매원은 아무래도 가브리엘이 내가 커프스 버튼을 선물한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멋대로 추측하고 오해하는 게 분명했다.

내가 지금 저 남자가 반지를 선물하려는 대상이라고.

돌겠구나.

“힐데아, 어떤 것이…….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반지를 모두 사고 싶습니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건 아니죠. 아무리 돈이 썩어나게 많아도 그건 진짜 아니지. 누가 약혼 반지를 20개가 넘게 사?

뭐 요일마다 다르게 끼고 다니라고?

“그, 건 아닌 것 같아요.”

“……역시 그렇겠지요.”

나는 반지들을 한 번, 그리고 가브리엘을 한 번 보았다.

저 단호하기만 했던 남자도 사랑 앞에는 저렇게 귀엽게 무너지는구나.

반지를 다 사고 싶다고 말하는 그와 그 시선을 받을 로제가 부럽고, 예쁘고, 또 슬프고 복잡한 마음이었다.

“이것이 어떨까요?”

나는 그 중 유독 선명하게 반짝이는 분홍색의 반지를 가리켰다.

색이 좀 짙어서 붉은색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게 가장 로제의 머리색이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브리엘을 바라봤는데 그는 미묘한 얼굴이었다.

“그것보단.”

그리고 그 옆의 반지를 가리키는 것아 아닌가.

“이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의견을 구한다고 데리고 와놓고 왜 저렇게 말을 하지.

그래도 침착하게 성질을 죽이며 그가 가리킨 반지를 보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 붉은색에 가깝잖아.’

로제의 붉은 눈은 나와 같았지만 내 쪽이 더 짙고 로제의 눈이 조금 더 옅고 밝았다.

‘그래, 이건 오히려 내 눈동자 색이 가깝다고.’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잘못된 선택을 하게 둘 순 없었다.

“아니요, 가브리엘. 역시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색이 반짝거리고 예쁘고 그리고 연해서 더 비슷하고요.”

“예? 하지만 이 색이 더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말해놓고도 자신이 없는지 살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어쩐지 우습고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표정이 이상했을 것을 생각하며 얼굴을 굳혔다.

‘이러지 말자.’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견디는 것이 어떻게 몇 시간도 못 가는구나. 마음에 날개가 달려 팔랑팔랑, 그의 어깨에 찰싹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가브리엘.

가브리엘.

그렇게 외치며.

가브리엘이 그때 내 손에 든 반지를 보며 말했다.

“……보다 더 옅긴 하지만, 빛을 받으면 진하게 보이기도 하는군요.”

“이건 다이아몬드인가요?”

가만히 지켜만 보던 판매원이 손뼉을 크게 쳤다.

웅-하고 울리는 것이 아무래도 무슨 이능력자인 것 같은데 도통 모르겠다.

“안목이 높으시군요, 손님. 하지만 이건 그냥 평범한 다이아몬드는 아닙니다! 이건-”

그냥 다이아몬드가 아니면 뭐, 저것도 축언을 담을 수 있는 것이라는 걸까.

그때 가브리엘이 툭 끼어들었다.

“그럼 그것으로 포장해주게.”

마치 뒤의 말을 못 듣게 하려는 것 같아서 의아했다. 하지만 궁금증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더 알아봐서 좋을 게 없겠지.

그리고 조용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보고 또 봐야지.

결국 내가 그리며 떠올리게 될 모습은 그의 뒷모습이겠지만.

심장의 통증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그가, 다정한 편지를 보냈던 이 사람이 평생 행복하기를 바랐다.

*

“오, 정말?”

로제는 통신구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방금 판매를 완료했다고 소식을 전하는 이에게 씩 웃어 보였다.

“수고했어요. 근데 가브리엘이 당신의 이능으로 부탁을 했어요?”

-네, 상단주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요. 아주 훌륭하고 근사하게 쓸 수 있도록 안전하게 배송해야지.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의 앞으로, 생일 연회 전날까지 배송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후후후, 완벽해!”

발랄한 목소리의 통신구가 끊기자 로제리엘은 콧노래를 부르며 히히 웃었다.

“너무 쉽게 풀려서 이상할 정도이긴 하지만.”

로제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그러다가 따끔한 감각이 갑자기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의 두통은 도통 사라지지 않는다.

‘아, 어지러워.’

윽, 하고 고개를 숙인 순간.

“휴우.”

갑자기 로제는 눈을 깜빡이며 거울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주먹을 흔들었다.

“좋았어. 잘했다, 기억 잃은 나! 이제 며칠만 있으면 돼.”

로제리엘의 귀여운 얼굴 위로 밝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입술을 톡톡 쳤다.

“흐흐, 그때는 드디어 이 무거운 입이 봉인 해제되겠구나!”

으아, 좋다. 기지개를 켜며 로제리엘은 하하 웃었다.

침대가 출렁이며 몸을 받아냈다.

“자유로워지면 가장 먼저 뭘 말할까?”

내가 누군지?

아니, 이건 아니고.

역시 그게 좋겠다.

로제는 빠르게 중얼거리며 입맛을 짭짭 다셨다.

“언니한테 같이 간장치킨 개발하자고 해야지!”

언니는 자신보다 몇 배는 더 똑똑하니까 그 맛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을 생각하며 로제리엘은 행복하게 침을 꿀떡 삼켰다.

그리고 다시 머리가 따끔한 두통과 함께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이 미간을 톡톡 두드렸다.

“응, 내가 언제 누웠더라?”

대수롭지 않게 넘긴 로제리엘은 발딱 일어났다.

“무, 엇, 으, 로, 할, 까, 요!”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약속한대로 그의 생일 연회에서 벌어질 깜짝 청혼을 어떤 영상구로 저장을 할지 즐겁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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