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별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1)
가브리엘의 생일 연회가 다가온다.
‘원작과 같다면.’
그는 원작에서처럼 생일 연회 때 청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로제는 행복하게 물든 장밋빛 뺨을 한 채 청혼을 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게 끝나겠지.’
내가 버틸 수 있는 건 분명 거기까지일 것이다.
로제가 청혼을 받는 그 순간을 멀쩡한 얼굴로 버티고, 모두가 축하하는 사이에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내 작은 목표였다.
이후는 걱정이 없다.
둘은 행복한 사랑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둘을 고난에 빠뜨리는 일은 있겠지만 으레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고.
내가 옆에 없더라도 로제는 행복할 것이다.
“굉장히 밝네.”
“아가씨,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저택 분위기가 무척 밝다고 했어, 리라.”
“아아…….”
리라는 말을 어물거렸지만, 뒤엣말은 로제와 가브리엘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확실히 가문간의 혼약이라 그런지 저택은 축제 분위기였다. \
두 공작가의 결합은 축하할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붕 뜬 것 같은 저택의 분위기에서 홀로 도태된 기분이랄까.
그러다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렸다. 도태는 무슨!
‘좋아. 이럴 때, 차분하게 혼자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앞으로 멀리 떠나게 되면 여태까지 잘해준 사람들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표시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에 힐링턴의 모두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물도.
“저기.”
처음엔 날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마냥 쉽지 않았다.
일단 대화부터 힘들었다.
“네, 아, 아가씨? 아가씨께서, 제, 제게 무슨 일로……!”
그렇게까지 펄쩍 뛸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냈다.
시녀들은 내가 말을 걸면 그릇을 깨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가끔은 주저앉기도 했다.
‘주저앉는 건 너무 한 것 아닌가 싶은데.’
그래도 그들 모두 정원사 아저씨의 반응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안녕하세요.”
“억!”
그분은 내가 뒤에서 말을 걸었더니 너무 놀라 가위로 덜컹-값비싼 장미꽃을 댕강 잘라버리고 말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붉은 꽃들.
나와 아저씨는 모두 침묵했다.
“이게 얼마나 비싼 건! 데…….”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돌아본 아저씨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요.”
“!”
후두둑 떨어지는 장미들을 보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그런데 아저씨는 말을 건 상대가 나라서 그런지 이제 가위까지 떨어뜨렸다.
“제, 제가 지금 소리를.”
“괜찮아요.”
“감히! 제가!”
음, 술을 마시는 것 같진 않았는데 수전증이 있는 것 같다. 아저씨의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를 살폈지만, 얼굴색은 건강해 보였다.
“아, 아가씨?”
“장미는 내가, 음, 내가 어떻게 해줄 순 없겠지만. 혹시 알까요. 다음 날 이 장미꽃들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있을지?”
개소리였나 보다. 내 농담에 그는 웃기는커녕 더 정색했다. 그리고 납죽 엎드릴 듯 인사하며 크게 소리치기까지 했다.
“괘, 괘, 괜찮습니다!”
나는 시무룩해졌다.
아저씨의 눈에 눈물까지 맺혔기 때문이다.
저 장미 키우기 굉장히 어려워서 며칠 동안 고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했네.’
몰래 밤에 정원에 와 이능을 사용해서 장미를 원래대로 복구해 놓아야겠다.
가족들에게 내 이능에 대해 알리진 않았지만, 저 몇 송이 장미꽃으로 인해 이능을 들키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난 곧장 로제에게로 갔다. 로제는 마침 운동을 끝내고 산뜻하고 방만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이렇게 올리고 있으면 어떡하니, 로제.”
습관처럼 잔소리를 했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귀족 영애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느긋한 태도로 누워 잘 씻은 포도를 먹고 있던 로제는 방긋 웃었다.
“언니야, 언니 요즘 얼굴이 너무 좋아졌어. 언니도 기분 좋은 거지?”
기분은 내가 아니라 로제나 다른 사람들이 좋은 것 같은데.
특히 우리 로제는 얼굴에 태양꽃이 핀 것 같이 밝았다.
“그, 렇지.”
네가 이제 청혼을 받을 테니까.
비록 내가 이 자리에서 계속 축하해주지는 못하겠지만…….
가슴이 아리고 슬퍼졌다. 저렇게 밝게 웃는 로제가 내가 도망쳐서 조금이라도 슬퍼할까 봐서.
“로제.”
나는 로제 옆에 다가가 흰 손을 꽉 잡았다.
“언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으응? 언니야, 갑자기 왜 그래? 물론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그냥.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로제, 네가 나한테 정말 많은 것을 해주었어.”
로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언니 많이 사랑해!”
그 모습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나는 기억에 액자가 있다면 지금의 이 얼굴을 꼭꼭 담아두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멀리서 보고 싶을 때 기억을 한 번씩 펼쳐보는 것이다.
로제리엘, 내 사랑스러운 동생이 저렇게 웃었구나 하고.
다음은 아빠였다.
아빠는 직접 얼굴을 뵙고 말씀드리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방법을 고심했다.
역시, 편지가 좋겠다.
나는 질 좋은 종이와 봉투, 그리고 아껴 두었던 깃펜과 잉크를 꺼냈다.
말머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정말 우리 사이가 어색하기는 하구나.
‘그래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나는 아빠를 참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빠도 분명 날, 아끼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고 보면 이제 아버지라고 불렀구나.’
생각할 때는 아빠라고 자연스럽게 떠올리면서도 입밖으로 나가는 것은 격식을 차린 딱딱한 호칭이었다.
근엄한 얼굴의 아빠는 분명 그런 사소한 차이를 귀담아 두진 않았을 테지만.
‘한 번쯤은 용기를 내보자.’
편지는 글이니까,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사랑하는 아빠.
그렇게 적어두고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결국 날이 새고 아침이 되었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써내려간 편지는 꽤 길었는데 그것을 아빠의 집무실 책상에 몰래 두고 나왔다.
그렇게 식사 자리에서 아빠와 로제, 가브리엘, 그리고 내가 모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아빠를 몰래 힐끗거렸다.
읽으셨을까?
어떠셨을까?
그리고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보지 못했던 아빠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헉. 눈이…… 왜 저러시지?’
저번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심했다. 누가 보면 말벌에 양쪽 눈을 다 쏘인 줄 알 것이다.
그때, 가브리엘이 아빠를 보며 말했다.
“힐링턴 공작 각하의 베개가 그렇게 축축하다면서요?”
가브리엘의 빈정거리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베개가 왜 축축하지. 아빠는 침 흘리는 잠버릇은 없으신데.
‘그나저나 편지는.’
난 열심히 눈을 마주쳐 보려고 했지만, 눈두덩이가 심각하게 부어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는 아빠는 내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이 마주칠라치면, 곧바로 고개를 홱 돌리고 마셨으니까.
몸이 안 좋으신지 연신 붉어지는 목덜미를 보니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겨, 결혼, 결혼이라니.”
아빠는 이윽고 그 말을 꺼냈다. 나와 로제의 눈이 딱 마주쳤고, 로제는 귀엽게 윙크를 했다.
어쩔 수 없겠구나.
지금 아빠 마음에는 로제의 결혼에 대한 고민뿐인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섭섭한 마음이 살짝 흩뿌려졌다.
진솔한 마음을 가득 담아 쓴 편지였는데, 그래도 뭐라고 해주실 줄 알았는데.
혹시 아빠라고 써서 화가 나셨을까.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어쩐지 어깨에 힘이 빠졌다. 입꼬리도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섭섭하긴 했지만,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애써 위안했다.
가문간의 혼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편지 한 장이 얼마나 중요했을까 싶었기도 했고.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갔다.
“아가씨? 이게 대체 뭔가요?”
항상 나와 로제를 아껴주고 돌봐주었던 리라에게는 시녀들에게 물어 그녀가 가장 좋아한다는 가게의 신발을 선물했다.
리라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것을 품에 꼭 껴안고 놓지 않겠다는 듯 손등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마음에 드나 보네.’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시엔은 뭐가 갖고 싶어?”
다음은 시엔이었다. 주변에 물어도 그녀가 좋아하는 것에는 딱히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시엔의 취향이 굉장히 독특하다나? 그리고 차라리 직접 묻는 게 나을 것이라고.
그러면서도 내가 물으면 웬만하면 다 좋아할 것이라고 언급해주었는데, 앞 뒷말이 맞지 않아 의아했다.
까다롭다며. 근데 다 좋다고?
그래서 물었을 때, 시엔은.
“아, 아, 아, 아가씨가 제게 선물을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변했다. 내가 말을 걸어서 당황한 것인가 싶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저번에 비밀 잡화점까지 안내를 해준 것도 시엔이고, 한 번씩 말을 걸면 저런 얼굴이 되고는 했지만 끝까지 피하지 않고 대답해주는 것은 시엔이었다.
리라 다음으로 말이지.
“저는.”
“응? 뭐라고, 시엔?”
“저는 다…… 좋아요.”
“그렇게 말하면 고르기가 힘든데.”
진지하게 고민하며 말하자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시녀들이 갑자기 차갑게 침묵했다.
시선은 시엔에게 향해 있었는데, 꼭 그것이 무언의 압박을 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 느껴졌다.
흘려듣기에 자기만, 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아가씨가 쓰시던 물건 중 하나를 받을 수 있을까요?”
시엔의 눈이 그때만큼은 초롱초롱하고, 나를 직접 바라보고 있어서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고개를 끄덕이자 시엔이 언제 똑바로 바라봤냐는 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무엇을 줄지 고민을 했지만 시엔은 머리를 올려 묶을 때가 많고, 귓불이 참 예뻤다.
깔끔하고 우아한 진주 귀걸이가 잘 어울릴 것 같아, 예전에 내가 생일 선물로 받았던 진주 귀걸이를 선물해주었다.
“쓰던 것인데 정말 괜찮겠어? 이왕이면 새것으로 선물하고 싶은데.”
“아, 아니에요! 저는 이게, 이게 좋아요…….”
어쩐지 시엔이 울먹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진주 귀걸이가 그렇게 갖고 싶었구나.
그런데 시엔은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진주귀걸이를 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서운해, 시무룩해졌다.
‘이왕이면 착용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혹시 팔았던 것일까?
팔았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이지만, 그래도 고심해서 준 선물을 되팔았다고 하면 섭섭할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신경을 끊고 그렇게 마무리를 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