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이별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2)
“이게 뭐야, 리라?”
심드렁한 안색의 리라는 어쩐지 코웃음을 치는 것같이 편지를 노려보았다.
“무례한 방식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아가씨. 하지만 고급 마법이 걸려 있어 일단 아가씨게 가져와 보았어요. 꺼림칙하시면 보지 않고 폐기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잠깐만, 마법? 줘 봐. 한번 살펴볼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어떤 가문의 인장도 찍히지 않은 편지봉투를 바라보았다.
“정말 인장이 없네. 이런 편지는 처음 받아보는데.”
“네. 무례한 방식이죠. 제대로 된 신사라면 이런 식으로 보냈을까요?”
음, 이런 방식은.
리라의 저 냉담함은 과민반응은 아니었다.
“그러게. 누가 나한테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냈지?”
“아가씨가 받아줄 것이라는 착각도 오만하지요.”
난 미간을 찌푸리며 뺨을 긁적였다.
누가 보낸 것인지 짐작이 가지도 않았지만, 방식이 제일 문제였다.
‘민망하게. 보통 연인들 사이에서 쓰는 방식이잖아.’
정확히는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연인.
예를 들어 가문의 반대에 직면한 연인들이나 쓸 법한 방식이다.
당사자들을 제외하곤 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알지 않기를 원할 때 쓰는 것이니까.
즉, 그런 사이가 아닌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지 짐작도 가지 않아. 찝찝하기도 하고. 어쩌지?”
중얼거리자마자 리라가 반색을 했다.
“그럼 바로 폐기할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야. 요즘 시기가 시기니까 중요한 편지일 수도 있어.”
그런데 편지봉투의 입구를 만지작거리던 그때였다.
“아가씨!”
“어?”
갑자기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깜빡하는 사이 아까와는 주변이 달라져 있었다.
‘리라?’
분명 몇 걸음 옆에 떨어져 있었던 리라가 언제 온 것인지 내 옆에 바짝 붙어 날 뒤로 물리고, 편지를 단도로 찍어 버린 것이다.
푹 찍힌 검이 무척이나 살벌했다. 나는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지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리라 움직이는 거 하나도 못 봤는데?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리라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너무 놀라 뭐라 물어보지도 못하고 편지봉투를 내려다봤는데.
‘……응? 변했네?’
아까는 없던 인장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장은.
난 얼떨떨하게 대꾸하며 리라가 검을 뽑고 건네주는 편지를 받았다.
“이거 황실의 인장이잖아.”
또야?
트라우마 걸리겠다.
나는 내 속을 뒤집어 놓으려던 황녀의 편지를 떠올리곤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런 날 보며 리라가 다시 편지를 가져가려고 했다.
“아가씨, 역시 안 보시는 게 좋겠어요. 앞으로 정확하지 않은 편지는 올려보내지 않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그보다 리라, 방금 전에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움직인……. 어?”
나는 얼른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를 가르면서 말했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을 보며 말을 멈췄다.
리라와 내 시선이 동시에 그것으로 향했다.
보드라운 실크 천,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고급스러운 문장.
누가 봐도 이건.
“이건 손수건이잖아.”
손수건 하니까,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황궁.
손수건.
그리고 편지.
‘설마 벤자민?’
역시나 편지를 펼쳐보니 황태자, 벤자민이 내게 보낸 편지였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필체가 그의 유순했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편지는 장황했지만,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사냥 대회의 일에 대한 사과.
정중한 선물이라고 보낸 손수건.
그리고 가브리엘이 청혼을 준비하려 하고 있다는 소문이 번졌다는 것.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브리엘의 생일 연회에서 자신과 춤을 추어줬으면 한다는 것.
“황태자가 왜 이런 편지를 썼지?”
벤자민은 황후의 사람이다.
그녀의 지극한 아들 사랑을 생각해봤을 때, 뜻을 달리한다고는 보기 어려웠고 벤자민 자체가 그런 성품이 아니었다.
그러면 결국 지금 황후는 힐링턴과 벨키우스의 무사 결합에 분노하고 있어야 옳을 텐데.
‘정말 순수하게 사과를 하려고 보낸 건가?’
어째서 벤자민은 이렇게 기뻐 보이는 걸까.
편지일 뿐이라고는 하지만 꼭 웃고 있는 얼굴을 앞에서 보고 있는 듯, 문장마다 기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게다가 나와 춤까지 추자고 하다니.
“공작님께 보고할까요, 아가씨?”
깊게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 리라가 있었지.
리라는 굉장히 서슬 퍼런 눈빛으로 편지를 원수 바라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힐링턴이 지금은 황궁과 멀어진 편이라고 해도, 저 반응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그 손수건은 버리시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선물인데.”
“더 좋은 물건들도 많답니다. 얼마든지 사실 수 있어요.”
“그런 것이 아니라, 버리면 분명 그것도 전달이 될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부드러운 손수건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이건 그때 손수건을 건네준 보답으로 보낸 것이 분명했다.
호의를 거절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라 고개를 저었다.
거절만 매번 당해본 나 같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따끔하고 쓰라린지 잘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 내가 보기엔 그냥 평범한 손수건 같아, 리라.”
“하지만 아가씨, 보통 은밀히 보낸 선물을 간직한다는 것은…….”
“응? 뭐라고, 리라?”
잠시 생각에 빠진 리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보기 드문 표정이라 가만히 바라보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냥, 제가 한번 다시 알아볼 수 있게 손수건을 건네주시겠어요? 혹시 모를 조치가 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까지는 거절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알았어.”
내가 떠나기 전에만 돌려줘.
그렇게 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다.
‘뭐지.’
지금 리라가 손수건을 짓이기듯 구긴 것 같았는데, 잘못 봤나? 개수작, 뭐라고 한 것 같았는데.
어쨌든 이 편지가 가르쳐주는 중대한 사실은 하나였다.
결국 황궁에서도 가브리엘의 청혼에 대해 알았구나, 라는 것.
나는 로제의 환한 얼굴을 떠올리고, 그다음에는 가브리엘의 진중했던 얼굴을 떠올렸다.
괜찮겠지.
욱신.
심장의 고통을 무시하며 빌었다.
부디 그 반지가 제대로 로제의 손가락이 끼워질 수 있기를.
*
벨키우스 공작가에서 성대한 생일 연회가 열린다.
전쟁 영웅이자 앞으로 제국을 담당하는 큰 축이 될 것이 분명한 젊은 공작의 눈에 들고 싶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고급 선물을 보내왔다.
파티장에 초대될 수 있기를 고대하며 눈을 빛내는 이들도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는 태양신처럼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냉담한 성격이라 선을 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연회의 초대장이 아무에게나 가지 않았다는 소리다.
“하, 이 빌어먹을!”
황녀 라피이아는 짜증을 삼키며 쥐고 있던 부채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속이 시원하지는 않았다.
이 빌어먹을 작자가 자신을 쏙 빼놓고 초대장을 돌린 것이다.
그것이 황녀, 라피이아에게 얼마나 큰 모욕이 될 줄 알면서 일부러.
라피이아는 입술을 비틀었다.
‘네가 네 무덤을 판 것이야, 가브리엘.’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 가끔 힐데아 폰 힐링턴이 생각났다.
물론 걱정이나, 우려는 아니었고 가끔, 아주 가끔.
셀데리아 백작 영애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자신이 둘의 관계를 비틀어 놓았을 것이 분명한데도 제가 직접 하지 않아서일까?
‘언급이라도 한번 주려 했건만.’
그런데 그 복을 지금 가브리엘이 차버린 것이다.
굳이 부르지도 않는데 직접 가서 뭐라 해주고픈 마음은 일절 없었다.
애초에 가브리엘이 곤경에 처하는 모습은 몇 번이라도 보고 싶었고, 한 번씩 생각난 것은 힐데아 때문이었으니까.
‘제법 좋은 눈이었지.’
아주 솔직한, 아주 선명한.
황족이기에 아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편견을 갖고 미리 손톱을 세우지도 않는 이상한 눈이었다.
물론 그쪽은 자신을 싫어하겠지만, 그 고요한 눈 속에 있었던 연심이 사그라드는 광경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황녀는 자신답게 행동하기로 했다.
연회장에서 엇갈린 두 남녀와 그로 인해 쓰러지듯 좌절할 여자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라피이아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지금쯤, 벌어진 사태로 분노하고 있을 아바마마를 찾아가 달래야 했다.
“아바마마께 기별을 고하거라. 찾아뵐 것이라고.”
“예, 전하. 지금 당장 움직이겠사옵니다.”
“그래.”
빠르게 사라지는 시녀를 보며 라피이아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이 촌극이 벌어질 연회에 굳이 초대를 구걸하며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
의외의 방문자가 찾아온 것은 가브리엘이 내게도 파티의 초대장을 보냈을 때였다.
모두가 밝았지만, 나만 어두침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자리를 일찍 떴다.
그런데 시엔이 내게 손님이 왔다고 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시엔, 안녕. 그런데 손님? 나한테?’
‘네에…….’
이 시기에 누가, 나를.
혹시 잘못 찾아온 거 아니야?
나는 눈을 깜빡이며 로제의 방 풍경을 떠올렸다.
끝도 없이 쌓아지던 선물과 편지들, 그 안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분명 미래의 벨키우스 공작 부인에게 보내는 아부성 짙은 편지들일 것이다.
로제는 한껏 거만한 표정으로 귀엽게 속삭였다.
‘하아, 정말 인기가 이렇게 많아서는 곤란한데! 나는 오래오래 연애 결혼 할 거란 말이야.’
‘?’
당장 청혼 받고 결혼하게 생긴 애가 무슨 소리람.
로제의 말은 언뜻 이해가 안 가긴 했지만 어쨌거나.
‘로제에게 온 손님이 아니고?’
‘네, 힐데아 아가씨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상대는…….’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른 준비를 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재.
“후우.”
나는 손님 응접실의 문고리를 잡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 사람이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천천히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