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당신의 길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정갈한 흰색의 의복, 성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금색 장신구,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선명한 은발.
미엘르 제국에서 한번 보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유명인.
눈에 띄게 잘생긴 남자는 바로 최고 신관 크라이스였다.
나는 반색하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최고 신관님. 직접 방문해주실 줄 몰랐어요.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많이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영애. 갑자기 찾아온 제가 실례한 것을요. 그보다 크라이스라고 불러달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상할 정도로 나는 그에게는 유독 친근감을 느꼈다. 꼭 우리 로제와 함께 있을 때처럼.
나는 얼굴에 힘을 빼며 그의 앞에 다가갔다.
“아아, 그랬지요. 편히 앉으세요, 크라이스. 즐겨 드시는 차가 있다면 바로 들이도록 할게요.”
“아무거나 좋습니다. 그런 쪽엔 잘 알지 못해서요.”
“그럼 제가 좋아하는 차를 드셔보시겠어요? 달콤하고 상쾌한 맛이에요.”
“좋습니다.”
나는 반가운 마음 반, 의아한 마음 반이었다.
최고 신관이 공작가에 직접 찾아올 이유는 그렇게 많지 않다. 축언과 관련 있지 않고서야.
‘혹시 내가 그때 물어봤던 치유 이능에 관련된 일일까?’
마주 보고 앉아 그를 보며 눈을 깜빡이는데, 뭔가 곤란하다는 듯이 시선을 피하던 크라이스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왜 그러지?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그가 결심한 듯이 나를 보았다.
“힐데아 영애.”
“네, 크라이스.”
“영애도 짐작하시겠지만,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온 것은 아니랍니다.”
“네, 그러시겠지요.”
매우 진지한 안색이라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
혹시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어서.
내 축언에 나도 모르는 무슨 문제라도 뒤늦게 발견된 것일까 하여.
“그때 제게 찾아오셨을 때의 대화를 몇 번이나 곱씹어보았습니다.”
우리가 나눈 대화?
‘그 대화라면…….’
나는 기억을 떠올리고 곧 얼굴을 굳혔다.
나는 너무 괴로운 마음에 그에게 묻고 말았다. 사랑하면 안 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았던 마음을 그에게 토로했었다.
그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설마 내 마음을 알았…….’
내 주변의 사람은 많지 않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이라고 하면 로제리엘의 약혼밖에 없었다.
분명, 무언가 눈치를 챘겠지.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절대, 로제에게,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이 이야기가 들어가길 원하지 않았다.
“크라이스, 저는…….”
“말을 끊는 것을 용서해주세요, 힐데아.”
흔들리는 내 눈을 보며 크라이스가 몸을 내 쪽으로 숙이듯 하며 말했다.
꼭 내가 울까봐 무섭다는 듯 다급한 목소리였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공작께서 드디어 힐링턴 가문에 정식으로 청혼을 하려 한다고.”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소문에 관심이 없을 신관들조차 들었을 정도라면 정말 수도에 파다하게 퍼진 것이라고 보아야 했다.
이제 다들 알게 되었구나.
모두 축복할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함께 웃을 수 없다면 어떡하지?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내뱉는 목소리 또한 바람 앞의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나는 차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크라이스, 당신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귀족들의 소문에 밝지는 않으실 텐데요.”
“음, 귀족들에게 유명한 어떤 잡화점에서 벨키우스 공작이 특별한 물건을 주문했다고 하더군요. 평민들도 쉽사리 이야기할 정도의 화젯거리였습니다.”
“…….”
“그리고 공작이 산 물건이 상대의 머리카락과 꼭 같은 색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청혼의 상대가 로제리엘 영애라는 것이 기정사실로 돌더군요.”
“……네, 맞아요. 그는 로제리엘의 머리카락과 같은 분홍색의 반지를 샀고, 그것을 청혼할 때 사용하겠지요.”
비밀 잡화점의 정보는 쉽사리 밖으로 새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쩌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렸을 수도 있겠다.
‘누가, 왜?’
힐링턴과 벨키우스가 빨리 결합되기를 바라는 쪽의 움직임일까?
하지만 왜.
이제 며칠만 지나면 가브리엘이 정식으로 가문간 결합을 발표할 텐데.
나는 왠지 모르게 초조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꼭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등을 떠미는 느낌이다.
힐데아, 이제 떠나야 할 때야. 준비를 해. 미련 그만 가지고!
그렇게.
“저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애가 괴로워했다는 것을.”
“!”
나는 숨을 들이켰다.
“제가 감히 잘못된 추측을 한 것이라면 뺨을 때리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크라이스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손을 뻗어, 내 손등을 감싸쥐었다.
“힐데아 영애는 제게 그리 말했지요.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어찌해야 하는지. 그리고 저는 보지 않는 것을 추천드렸습니다.”
쿵, 하고 망치가 내 가슴을 두드린 것 같았다.
“그러자 당신이 무척 걱정되었습니다, 힐데아 영애.”
가브리엘과 로제리엘의 약혼이 성사되고, 그 후에 누군가 내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모두 저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불쌍하고 어리석은 이를 바라보는 눈빛. 혹은, 어째서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냐는 듯한 질책.
나는 고개를 천천히 수그렸다.
“난. 나는…….”
내 가족이 저런 눈빛으로 나를 보게 할 수 없었다. 손끝이 떨렸다.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혹시 그 사람입니까, 힐데아 영애? 그래서.”
죄책감, 수치심, 어쩌면 이런 식으로 마음을 들킨 것에 대한 서글픔. 혹은 공포.
온몸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나는 낮은 어조로 빠르게 속삭였다. 일단 크라이스를 내보내고 나서 그 뒤에, 그 뒤에 생각해보자.
그는 입이 무거우니까 저 말을 가볍게 떠들고 다니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지금만 모면하면 돼. 손바닥에 식은땀이 바짝바짝 났다.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들킬 일도 없어요. 이 마음을 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요. 공작가가 추문에 휩싸이기 전에 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명한 고통 때문에 피가 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떠날…….”
“영애.”
하지만 채 말을 잇기도 전이었다.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
“피가 나잖아요.”
“…….”
“제가 당신을 고통스럽게 했군요.”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가 코앞에 있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요. 힐데아.”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입술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뒷말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아요. 힐데아 영애는 차분하고 준비성이 철저한 성격이니 분명 한순간의 충동은 아니었겠지요.”
울컥, 하고 무언가 치밀었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사실은 말이야, 나도 그를 좋아해. 내 동생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실 나도 좋아해.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꺼낼 수조차 없어. 왜냐하면 둘이 사랑하니까.
그런데 다정한 크라이스의 눈이 위로를 건네주는 듯했다.
“감정은 쉽게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영애께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 모든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오늘 영애를 찾아온 것은 이런 압박감을 느껴 영애를 슬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싱긋 웃었기 때문에.
“다른 부탁을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제안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영애는 모르시겠지만, 저도 이제 수도를 떠나 기도 유람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옵니다. 그래서.”
크라이스가 아까보다도 더욱 확고한 손길로 내 손을 꽉 잡았기 때문이다.
“제안드립니다. 힐데아.”
힘을 주려는 것처럼.
흔들리는 내 눈을 보며 그가 조용히 웃은 것은 그때였다.
“당신이 이곳을 떠난다면, 그 길을 제가 함께하고 싶습니다.”
“……네?”
“저와 같이 가시겠습니까?”
“…….”
나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이야기를 던지면서 말이다.
*
나는 혼란스러웠다.
방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말하는 리라에게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말하며,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밖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몇 번이나 울렸다가 사라졌지만, 신경 쓰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왜 크라이스는 그런 말을.’
아니, 내뱉으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도우려는 것이다.
“하아…….”
귀족 영애가 대뜸 떠나겠다고 할 것 같으니 걱정되어 실례도 무릅쓰고 빨리 찾아온 것일 테다.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돕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정말 친절한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여행길에 아는 사람을 데리고 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혼자 떠날 거예요, 크라이스. 말씀은 고맙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힐데아.’
‘괜찮아요, 크라이스. 저도 나름 철저히 준비해왔거든요.’
‘…….’
그는 몇 번은 더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내 뜻을 존중했다.
대신 이 말 한마디를 남겼다.
‘힐데아, 당신의 뜻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제게 당신이 향할 곳을 가르쳐주실 순 있으시겠습니까?’
‘전 제 행적이 노출되길 원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떠나는 의미가 없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 크라이스는 빙긋 웃었다.
‘누구도 알지 못할 겁니다. 저는 힐데아 영애의 행선지를 누구에게도 알려줄 생각이 없으니까요.’
집나간 영애가 걱정되어 찾아온 것이라면 그 가출 장소를 알게 되었을 때, 바로 가문에 알리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거기다 대고 차마 그것도 알려드릴 순 없어요, 라고 말할 순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결국 내가 향할 마을을 말해주고 말았다.
고르고 골라 정했던 곳.
미엘르 제국과도 멀고, 평화롭고 안전하며, 무척 고요한 소왕국의 영지를.
낮에 크라이스와 나눈 대화에 관한 생각을 거두며 현재에 집중했다.
아득한 밤.
찌르르 우는 벌레 소리만 생경하게 들렸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였다.
‘응?’
나는 밖에서 무슨 인기척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짝 열려 있는 침실 밖 테라스 창문 너머로 누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목소린…….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이건 분명, 가브리엘의 목소리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