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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84화 (84/155)

84화. 오해의 정점

단단한 어깨, 긴 팔다리, 그리고 찬란한 머리카락.

이제는 뒷모습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그 사람.

가브리엘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은 꼭 운명의 장난 같았다.

그는 눈을 깜빡이다가 내가 나타날 줄 몰랐다는 듯이 움찔하며 굳었고, 그 모습을 보며 습관적인 서글픔을 느낀 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넌지시라도 이 마음을 전할 순 없을까.

그가 알아채지는 못할 만큼,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내가 특별하게는 생각했다는 그 정도로.

그가 로제에게 정식으로 청혼한 뒤에는 아예 돌아볼 순간도 없이 버려야 하는 마음이었다.

내 마음이 너무 불쌍하잖아.

불현듯 드는 그 욕심과 충동이 온몸을 지배하기라도 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테라스 문을 열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그러자 평소처럼 껄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던 가브리엘이 날 마지못해 바라봤다.

말은 내가 먼저 걸었다.

“왜 여기에 계신가요, 가브리엘? 잠이 안 오세요?”

“……시간이 늦은 것을 압니다. 다만, 걷다 보니 이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저녁 식사를 거르셨는데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 혹 제가…… 영애의 잠을 방해했습니까?”

누가 들으면 내가 걱정되어서 날 찾아온 줄 알 것이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나는 그를 가만히 보았다.

사랑이라는 게 뭐길래.

도대체 왜 이 남자였을까?

사랑이라는 것을 자각한 이후에도 왜 하필 가브리엘이었을지를 한참 생각했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어느새. 그렇게 되었지.’

이미 마음은 기울어졌고,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에도 저 얼굴을 보고 있으니 좋았다.

웃어버릴 것 같아 안면 근육에 힘을 꽉 주는 것만이 버틸 방법일 정도로.

‘멀어지고 나면 단번에 잊을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리는 것 아닐까?’

나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바라지 않는 상대의 감정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내뱉고 나서 멈칫했지만, 나뿐 아니라 그도 한순간 멍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그 기세가 제법 살벌했다. 다만 그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혹시 저런 얼굴을 할 만큼 불쾌, 한 것일까?’

가만히 집중하니 그가 황녀라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황녀가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자세히 물어보려 했는데 그가 돌연 고개를 들고, 날 똑바로 바라보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난 일단 그 시선에 놀랐고, 그 대답조차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아니란 말이야?

내 마음을, 모른 척하겠다는 건가?

후자라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손발이 차가워졌다. 겁쟁이처럼 벌써 후회가 됐다. 난 왜 이런 말을 꺼내서.

가브리엘도 어쩌면 눈치를 챘던 것 아닐까.

그의 앞에서만 우물쭈물 눈치를 보게 되는 내 모습을 보며 어쩌면, 로제리엘의 언니인 힐데아는 어쩌면, 그렇게.

그래서 저런 표정을 하고 바라보는 걸지도 몰라.

“영애께서 무어라 생각하시는지는 몰라도, 아니었습, 그러니까.”

“…….”

무언가를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단호하고, 경멸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말했다.

“저는 오로지 한 사람만 봅니다.”

아, 가브리엘은 로제리엘을 떠올릴 때 저런 눈을 하는구나.

선명히 바라보는 시선은 처음이라, 꼭 나를 향해 말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것 같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시선이 태양 같았다.

저런 사람이 저런 표정으로 고백을 해온다면, 분명 누구나 사랑에 빠지고 말 것이다.

나도 그래요. 그렇게 말하면서.

하지만 나는 아니지.

“그 한 사람 외엔 누구의 감정도 제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쿵, 하고 차가운 도끼가 내 심장을 반쪽으로 갈랐다.

“절대 다른 마음을 품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말조차 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덜컥 겁도 들었다.

정말, 설마 정말 그가 내 마음을 알았나? 그래서 저렇게 거리를 두었나?

“그러니까…… 영애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운 듯 말하는 그 작은 목소리는 내게 닿지 않았다.

“그, 그렇군요. 대화…… 잘했어요, 가브리엘.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여기 더 있다가는 눈물을 쏟을 것 같았기에 무어라 어물거리며 대답을 한 뒤 테라스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치솟는 눈물을 참고 헐떡였다.

더 비참한 것은, 이 순간에도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내 마음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침대 위에 웅크렸다. 추웠다. 로제가, 로제가 보고 싶었다.

긴 밤이었다.

*

저택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벨키우스 공작이 본의 아니게 힐링턴 저택의 부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벨키우스 공작의 생일 연회에 맞춰 힐링턴의 사용인들이 그곳으로 건너가 함께 연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눈을 힐끗힐끗 맞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곱고 착한 우리 첫째 아가씨가 머지않아 완전히 힐링턴을 떠나게 되겠구나.

누군가가 울음을 참듯 삐죽거리며 항의하듯 물었다.

“아니지, 그거 약혼반지잖아. 대뜸 결혼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요즘은 일단 약혼만 하고 결혼하기 전까지 연애하는 낭만 결혼이 유행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아가씨는 당장 저택을 떠나시는 게 아니야!

“아가씨가 우리를 위해 주신 것이 얼마나 많은데.”

“난 아가씨를 더 많이 보고 싶어…….”

힐링턴 공작이 딸이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에 베개로 눈물을 적시고 있듯이, 사용인들 중 몇몇도 우울함에 잔뜩 빠져 있었다.

요즘 들어 더 침착하고 차분해진 힐데아를 보면 더 그랬다.

그녀는 꼭 이별을 아쉬워하지 말라는 것처럼 먼저 말을 걸고, 선물을 주고, 필요한 것을 묻기도 하면서 그들을 다시금 감동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우리 힐데아 아가씨처럼 천사 같으신 분이 또 없지!’

그들도 결심했다.

우리도 뭐라도 하자.

평소에는 차마 말을 걸기도 힘들만큼 고귀한 아가씨이지만, 그래도 날이 날이니 사용인들도 두근거리며 그녀의 곁을 서성였다.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지?

어떻게 전달해 드려야 하지?

비록 힐데아의 앞에 서면 제대로 쳐다도 못보고 말도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용기내고 싶었다.

아가씨가 결혼하시게 되어 저희가 정말 섭섭하고 적적하고, 그렇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축하드린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여럿이 야금야금 모은 돈으로 선물을 준비한 상태였다.

평민들의 것을 과연 아가씨가 좋아하실지 모르겠지만.

걸레질을 열심히 하던 시녀가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물었다.

“언제 전해드리는 것이 좋을까?”

이제 내일, 바로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공작의 생일 연회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 벌어지는 연회였기 때문에 힐링턴 쌍둥이 자매는 바로 이동만 하면 되었다.

상기된 얼굴로 뺨을 문지른 다른 시녀가 가슴 앞에 손을 모으며 헐떡였다.

“나, 나는 못해. 아가씨의 옆모습만 봐도 얼마나 빛이 나는지 숨이 막히는 것 같단 말이야.”

아가씨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병환을 고쳤던 시녀는 그 뒤로 힐데아의 그림자만 봐도 바짝 굳는 증상을 갖게 되었다.

사실 다른 이들도 많이 다르진 않았다. 너무 좋아서 힐데아 앞에서는 얼굴이 온통 새빨개졌다.

“후아, 후아. 난 정말 심장 마비 걸릴 것 같아. 우리 차라리 그냥 청혼 받으시고 나서 드릴까? 조, 좋은 선물도 아니고…….”

“맞, 맞아. 그래도 첫 선물은 약혼반지여야지, 우리들의 때 묻은 선물이면 안 되지 않나 싶어서…….”

“약혼반지가 그렇게 귀한 물건이라면서?”

시녀들은 눈을 영롱하게 빛냈다.

“솔직히 전쟁 영웅, 전쟁 영웅하면서도 우리 힐데아 아가씨 앞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긴장한 게 역력해서 한심해 보이기도 했었는데.”

“흠흠! 여기 벨키우스 사람들도 많아. 조용히 말해!”

시녀들은 키득거리는 웃음을 토했다.

항상 익숙한 풍경이었다.

잔뜩 굳어 귓불이 터질 듯 빨개진 벨키우스 공작과 우아한 귀족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힐데아 아가씨의 차가운 눈빛.

그 대치가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보는 사람이 손에 땀을 쥐게 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힐데아가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여 가브리엘이 청혼하리라는 이야기가 퍼졌을 때, 드디어 대쪽 같은 힐데아가 가브리엘의 열렬한 마음에 넘어갔구나 싶었더랬다.

“우리는 아가씨가 청혼받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선물을 드리기로 하자.”

시녀들은 활짝 웃었다.

*

사람들이 각자 마음을 먹은 것처럼, 여기, 또다른 마음을 먹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그러기로 결정한 것인가?”

가주, 시어스 폰 힐링턴은 사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고용주가 아니었다.

시엔과 리라, 그리고 다른 이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힐링턴에 남기로 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도 고하기는 해야 했다.

“네, 저희는 표정제거술을 없애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가주님께서 그런 의견을 주셨다고 들었어요. 많은 고민을 했지만…….”

리라와 시엔은 딱딱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리라의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시엔은 입술을 연신 바들바들 떨었다.

“아가씨가 결혼하실 때, 환히 웃으며 그 결혼식을 축하하고 싶어졌습니다.”

“저희의 웃음이 아가씨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모처럼 낸 용기를 시어스는 웃으면서 화답했다.

분명 상냥한 힐데아는 그들의 낯선 웃음에 제 일처럼 기뻐하며 손을 잡을 것이다.

그때 자세히 그들의 사정을 이야기해주어도 좋겠지.

시어스는 섭섭하지만, 그래도 내일 딸아이가 청혼 받는 날이 분명 축복으로 가득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날이 흐르고.

드디어, 운명의 그날.

가브리엘의 생일 연회날이 밝았다.

*

“준비 되셨습니까, 주군?”

제법 멋지게 빼어 입었던 부관, 디안은 창백하다 못해 기절할 것처럼 보이는 제 주군을 바라보았다.

기가 막힐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핏기까지 없으니 그야말로 대리석 조각처럼 보일 것 같았다.

저래서 제대로 청혼에 대한 발표를 할 수 있을까?

한심해서 힐데아 영애가 도망가면 어떡하지?

헛생각을 터뜨리며 그는 신호를 보냈고, 드디어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 낮고 그윽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들 맞이할 준비를 하러 가도록 하지. 앞장서라, 디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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