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청혼,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이 각자의 상념을 갖고 서있었다.
벤자민 황태자는 연신 그림처럼 우아하게 선 은발의 여인, 힐데아 폰 힐링턴을 응시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열렬한지 꼭 이 자리의 주인공이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공작이 아닌 황태자인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반면 사랑스럽게도 웃고 있는 로제리엘 폰 힐링턴은 뭇 사람들과 어울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꼭 축하 인사를 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응답하며 받아주는 사람의 모습과 꼭 같았다.
사람들은 그 모습들을 보며 긴가민가했다.
‘소문대로 로제리엘 영애에게 청혼하는 게 맞는 건가?’
아니면 혹시.
‘다른 소문대로 목걸이 주인인 힐데아 폰 힐링턴의 청혼의 대상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황태자는 왜 힐데아 영애를 저리 열렬하게 바라보는 것인지?’
시선들이 바삐 오갔다.
결국 황제가 막지 못한 힐링턴과 벨키우스 가문의 혼담이 이루어진다면 그 이후의 결과를 생각해봐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누군가가 그렇게 의문을 제기했다.
사랑스러운 장밋빛 뺨을 한 채 재잘거리고 있는 로제리엘이 그녀의 시선 끝에 잡혔다.
“무엇이 이상하신가요, 부인?”
“쌍둥이 자매 중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인데, 정작 로제리엘 영애는 계속…….”
제 언니의 칭찬만 하고 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로제리엘의 태도는 꼭 약혼식 하는 주인공의 가족 같았다.
사람들이 축하합니다, 영애 하고 말을 걸면 우리 언니 오늘 너무 예쁘지 않아요? 하고 발랄하게 외치는 것이다.
반면 시어스 폰 힐링턴 공작은.
“헉, 얼굴이 저게 뭐야.”
나이에 걸맞지 않게 팽팽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자랑하는 준수한 남자는 지금 한 마리의 팬더가 되어 있었다. 짙게 내려온 그늘에 퉁퉁 부은 눈은 또 얼마나 흉측한지.
“설마 그 소문이 맞았던 걸까요? 힐링턴 공작이 못 말리를 팔불출이라 약혼 소식에 매일 밤 눈물로 지새고 있다는.”
“에이, 그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저 눈을 봐요!”
이 맞지 않는 박자에 사람들은 대체 어떤 흐름으로 박수를 쳐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제일 이상한 건 저 사람이죠.”
특히, 저 냉담해 보이는 듯한 힐데아 폰 힐링턴이 가장 미스터리했다.
동생의 혼담 자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냉랭하고, 자신의 혼담 자리라고 하기엔 정말 말도 안 되는 표정이었다.
“한 번도 웃지 않았다니까요.”
혹시 이것이 정략결혼의 결과?
온갖 억측이 난무할 때였다.
음악 소리가 잠시 멈추며,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에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이 생일 연회의 중심이자, 현재 미엘르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성 귀족.
전쟁 영웅인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공작이었다.
“어머나, 멋져라…….”
“벨키우스 공작은 정말 근사한 사내예요. 후우, 축하해야 하는 자리지만 오늘 그를 힐링턴에게 빼앗기게 된다니 정말 서글프네요.”
그는 무척이나 늠름한 자태였고, 가히 그림 속 주인공에 빗댈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였다.
찬란히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 반사되는 백금색의 머리카락은 꼭 환상 속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한 곳으로 향해 있었는데, 그 열렬한 시선이 상대를 꼭 잡아먹을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은.
‘힐데아 폰 힐링턴?’
놀랍게도 부끄러운 듯 벨키우스 공작의 시선이 오래 머물지는 않았으나 그때의 그 열기를 사람들은 똑똑히 목도했다.
그제야 귀족들은 상황을 이해하는 듯, 하지만 긴장된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
정말 힐데아가 약혼녀가 될 것이라면 그녀는 왜 저렇게 얼음 같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지?
정말 로제리엘이 아니란 말인가?
*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반짝이는 금색의 머리카락이 마치 흘러내리는 꿀 같았다.
‘나는 오늘 이 장면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온전히 눈에 담았다.
그때 시선이 마주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의 시선 끝은 로제리엘을 온전히 찾고 있을 텐데.
그때, 그의 입술에서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얼굴을 굳혔다.
“오늘 이 자리에 와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익숙한 대사를 내뱉는 남자의 모습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드디어.’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구나.
내게는 단 한 번도 향한 적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와 눈빛이 좌중을 훑었다.
마지막 순간이라서일까?
아쉬움이 불쑥 솟았다.
끝의 끝까지 그에게 나는 엑스트라일 뿐이었을까.
묻고 싶었다.
새벽녘, 결국 몰래 두고 나왔던 그의 생일 선물.
꽃말에 관심이 없던 내가 겨우 물어 준비했던 소박하고 조촐한 선물.
짝사랑을 의미하는 그 화분을 누가 보냈는지 그가 알기를 바라면서도, 끝까지 모르길 바랐다.
모순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한 가지 고백을 하고자 합니다.”
숨이 헐떡거렸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미련하게 붙잡고 있던 짝사랑인지.
저 남자의 정해진 운명을 알면서도 미련한 감정을 놓지 못했었다.
드디어 마음속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끝을 놓을 순간이다.
“나는 힐링턴 가의 영애께 청혼합니다.”
어쩌지? 어쩌지.
나는 저 말의 끝을 지켜보고, 박수를 친 뒤, 축복까지 마치려 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곳으로 갈라졌다.
“…….”
시선이 따가웠다.
한쪽은 기둥처럼 굳어 서 있는 나에게, 그리고 다른 한쪽은 누가 봐도 사랑스럽고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에게.
거기까지였다.
내가 참을 수 있던 것은.
‘이제 그만하자.’
여기까지 했다면 잘한 것이다.
나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잡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순간 소란스러운 기색이 일었으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보지 않아.’
인파 속으로 파고들며 나는 그 연회장을 나왔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영애는 달콤하다>에서 남주가 여주에게 청혼하는 절정에서 나는 도망쳤다.
아무리 원작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라고 해도 나처럼 불쌍한 엑스트라라면 도망 정도는 쳐도 될 테니까.
그랬다. 내가 사랑한 남자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
내 동생은 이 소설 속 세계의 사랑 받는 여주인공이었고, 그는 바로 여주인공의 유리구두를 가져올 운명의 남주인공이다.
그 영광된 자리에 내 자리는 없었다.
‘이제 놓을 수 있겠어. 다 내려놓고…… 사라지자.’
과분한 욕심을 품은 것은 나였다.
그러니 엑스트라는 사라져야지.
*
가브리엘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힐데아?’
왜 그녀가 몸을 돌리는지.
아니, 그뿐 아니라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 지금 저게…….”
곧 있을 찬란한 순간을 기대하며 크게 손뼉을 칠 준비를 하던 로제리엘은 얼이 빠진 듯 들고 있던 부채를 툭 아래로 떨어뜨렸고.
“히, 힐?”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툭툭 닦아내는 추태를 보이던 시어스 폰 힐링턴 공작은 제 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눈만 바보처럼 깜빡였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힐데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어째서…… 그런 얼굴을.”
자신의 청혼에 마치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을 마주한 것처럼 변하던 힐데아의 표정을.
놀라 도망치는 힐데아의 뒷모습이 낙인처럼 내리 찍혔다.
힐데아.
그녀를 처음 봤을 때처럼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가 처참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그녀가 구해준 심장이었으니, 그녀가 버린다면 뛸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욱신 통증을 호소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브리엘은 상황을 인지했다.
가장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현실이 그의 눈앞에 드리워졌다는 것을.
‘지금.’
힐데아가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를, 거절했다.
저것이 거절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곧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윽고 파도처럼 커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며 로제리엘과 도망쳐버린 힐데아를 가리켰다.
누군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힐링턴과 벨키우스의 혼담이 끝난 겁니까? 지금 힐데아 폰 힐링턴 영애가 벨키우스 공작가의 혼담을 거절한 장면 맞는 겁니까?”
“…….”
“그것도 이런 식으로 거절했다면, 두 가문은 끝이 난 것이라고 보아야겠군요!”
한 귀족이 말문을 트니 그 뒤를 따라 여러 질문이 바늘처럼 따라붙어 그를 할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어떤 물음에도 답할 수 없었다.
그도 알고 싶었다.
힐데아와 자신의 사이가 시작도 못 하고 끝나버린 것인지. 이렇게 처참한 방식으로 거절한 것인지.
“주, 주군. 괜찮으십니까?”
“…….”
“저희가,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여기 계시지 마시고, 일단 주군은 안으로 들어가셔서 어찌 된 상황인지……. 힐데아 영애를 만나보러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
“힐링턴 공작가 사람들이 뒤따랐습니다. 주군도 함께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군, 주군?”
경직된 얼굴로 다가온 디안이 그렇게 말하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그도 알았다.
당장 힐데아를 따라가 보는 것이 맞다는 것을.
경악하며 사라지는 로제리엘처럼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그가 무심코 잘못한 것이 있어 힐데아가 저런 태도를 보인 것일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가브리엘은 돌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힐데아의 멀어지던 뒷모습을 떠올렸다.
아니.
환히 웃으면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좋아요, 라고 말하던 그녀를 떠올렸다.
아니.
용기를 내도 좋다는 말에,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조용히 대답하던 그녀의 옆모습을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자신을 향해 한 번도 편안하게 웃지 못하던 그녀를 떠올렸다.
‘모든 것이.’
사실은 다 모두 그의 착각이었던 것일까?
그 편지도, 그녀의 확답도, 긍정의 대답들도 모두.
반지를 고를 때 함께 모든 것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을까.
서로 감정을 오가며 행복을 키웠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의 오만한 환상이었나.
‘아아.’
그는 생전 처음 현기증을 느꼈다.
‘아프다. 너무 아파.’
모두가 경악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조롱하듯 웃음을 참는 것들도 알고 있었으나 그런 것들에 화도 나지 않았다.
그의 정신을 꽉 채우는 것은 오로지 힐데아였다.
그녀의 그 표정.
찌푸린 미간.
상종하기도 싫다는 듯 단호히 멀어지던 뒷모습.
그 칼 같았던 거절…….
뒤따르지도 말라는 것 같았던 경고.
그 앞에서 가브리엘은 바보처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그의 청혼은 처참하게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