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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86화 (86/155)

86화. 도주는 나쁘지 않았다 (1)

아, 따뜻한 햇볕, 불어오는 바람.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나는 지켜보는 이도 없는 푸른 벌판 위에 누워서 한껏 태양빛을 내리 쬐는 중이다.

‘이대로 녹아도 될 것 같아.’

답답하게 조이는 코르셋도 없었고, 부푼 치맛단 때문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드레스도 없었다.

뒤꿈치가 아프게 배기는 힐도 없었고,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며 계속 손목에 무리를 주는 부채도 없었고.

무엇보다…….

여기엔 날 아는 사람이 없다.

미엘르 제국 수도에서 도주한 지 벌써 두 달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낯선 곳에서…….

“힐!”

“어?”

난 눈을 반짝 떴고,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과 눈을 마주쳤다.

“왜, 엘라?”

엘라.

살짝 그을린 갈빛의 피부, 장난스러운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

정착한 마을 루다나에서 사귄 친구였다.

내가 그냥 약초사 힐인 줄 알고 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친구.

꽤 억척스러운 성격의 엘라는 마을 촌장님과 말싸움을 해도 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얼마나 저렇게 똑바른지.

첫 만남 때도 낯선 타지에 어울리지 못하고 움츠러든 내게 먼저 말을 건 것도 엘라였다.

‘어머, 내 또래는 처음이야. 저기 너 몇 살이야?’

눈을 반짝이며 엘라가 그렇게 물었다. 그건 내가 이 마을에 와서 처음 제대로 나눈 대화였다.

‘저는 스무 살이에요.’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고, 엘라가 활짝 웃었다.

날 보며 그리 아무렇지 않게 웃는 사람을 로제 이외에 처음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엘라는 수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손뼉을 쳤다.

‘그럼 친구네! 나도 동갑이야!’

날 거리낌 없이 끌어안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친구가 되었는데.’

그런데 엘라는 내가 영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힐, 너.”

“윽. 왜, 왜 그래?”

이것 봐.

또 보자마자 눈을 사납게 치뜬다. 아, 저건 잔소리 하기 전의 표정인데.

“너 또 여기서 자고 있던 거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응?”

“으응……. 그게.”

눈을 뜨니 엘라의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양들이 메에에에 하고 울었다.

“아, 내가 진짜 못살아.”

“뭐가 못 살아?”

고개를 갸웃했는데 엘라는 보란 듯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힐. 넌 식욕이 없니?”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이 어떻게 식욕이 없어. 오늘 아침도 먹…… 먹었었나?

가만히 눈만 굴리는데 엘라가 잔소리를 빠르게 퍼부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난 눈만 떠도 배고픈데. 봐봐, 이 팔목 가는 거. 목은 또 어떻고! 왜 살이 찌지는 않고 자꾸 빠져.”

“살 빠진 거 아닌데.”

“아냐. 빠졌어. 이러니까 내가 내버려둘 수가 없는 거 아니야. 후우, 넌 어떻게 가만히 놔두면 세월아 네월아, 식사도 거르고!”

난 어설프게 웃었다.

식사보다 햇빛이 좋아서 그러고 있었다고 말하면, 엘라에게 뺨을 꼬집혔기 때문이다.

물론 아픈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매서웠다.

“얼른 일어나. 점심 먹어야지. 먹어야 일을 할 거 아니야. 아, 맞다. 너 꽃집 이렇게 방치해 놔도 돼? 아까도 보니까 외지 손님들이 꽤 있던데.”

이건 억울한 말이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나는 한 달 전에 이곳 루다나 마을에서 꽃집을 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가 연 꽃집이 너무 인기가 좋아져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한동안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다고. 그러니 오랜만에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겠는가?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오늘은 휴일이야. 나도 쉬어야지.”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요즘 인기가 너무 많아져서 외부에서도 막……. 아무튼, 됐어. 오늘 점심 메뉴는 마사 아줌마의 샌드위치야. 양파 가득 넣어서 먹자.”

엘라의 다부진 말에 어이가 없었다.

“뭐야,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먼저 정한 거야?”

“응. 넌 이래도 좋아, 저래도 좋아, 다 좋다고 말하잖아. 그러니까 이 몸이 미리 정해준 거지. 자, 늙은이처럼 늘어져 있지 말고 일어나!”

“늙은이라니……. 너무해.”

나는 간지러운 입매에 힘을 풀며, 엘라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따가운 잔소리를 내뱉으며 풀물이 밴 내 치마를 탁탁 두드려 펴주었다.

그리고 내 뺨을 쭉 늘렸다.

“으이그, 표정이 이게 뭐야? 제대로 웃어야지. 처음에 네 얼굴 보고 화난 줄 알고 제대로 말도 못 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내, 내 표정이 어때서?”

“이것 봐요. 애가 표현이 이렇게 서툴러. 자아, 이렇게 활-짝 웃으랬지! 넌 어쩜 루아보다 못해?”

“윽, 아파.”

“아프면 화를 내, 이것아.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구!”

아마 두 달 전이라면 지금의 이 광경을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나는 내 뺨을 잡아 쭉 늘리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는 친구를 보며 결국 와락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이제 이것이 내 평온한 일상이다.

*

“으음, 역시 마사 아줌마의 샌드위치는 최고야. 빵이 아쉽기는 한데 이건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주 잠깐 엘라의 입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하지만 저렇게 먹는다고 해서 식사 예절에 어긋난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엘라를 따라 샌드위치를 베어물었다. 야금야금 베어먹는 고급 빵보다도 입 안 가득 찬 샌드위치는 무척이나 맛있었다. 특히 빵이 특이했다.

“난 쫄깃해서 좋은데.”

엘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됐어, 힐. 너는 다아아아 좋다고 하는 천사잖아.”

“처, 천사라니.”

“왜애. 아주 다들 좋아죽던데. 매일 우리 엄마, 아빠가 네 친구 힐 반만 따라가라고 얼마나 성화신지 알아?”

대놓고 쏟아지는 칭찬 섞인 농담에 나는 어설프게 뺨을 매만졌다.

과분하게도 이곳 마을 사람들은 날 너무 환영해주었다. 그럴 만한 사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을 삼키려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하지만 엘라는 귀신이었다.

“뭐야아, 부끄러워? 응?”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풋!”

난 결국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그제야 손에 소스가 묻어 있다는 걸 깨닫고 아, 했지만.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해. 사는 내내 칭찬만 한가득 받았을 애가. 착하지, 조용하지, 예쁘지, 능력 좋지!”

“그, 그만.”

“참 신기하단 말이야. 어쩜 칭찬 한 번도 못 들어본 애처럼 부끄러워할까? 난 너처럼 얌전한 애를 못 봤어, 힐.”

엘라의 사정없이 쏟아지는 칭찬에 나는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칭찬도 힘든 거였다. 들을 때마다 손등에 소름이 돋는걸. 게다가 이곳 마을 사람들은 너무 솔직하다.

지금도 봐.

“힐! 네가 키운 꽃이 얼마나 예쁘고 향기가 좋은지, 머리맡에 두었더니 아침이 다 향긋하구나.”

“가, 감사해요.”

이곳 식당의 주인인 마사 아줌마라 불리는 노부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그렇게 칭찬부터 건넸다.

그녀는 우리들에게 주스를 두 잔 내밀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의아하게 바라보니 엘라가 주스를 쪽 빨아먹으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안 먹어? 그렇게 말하듯.

마사 부인이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은 것도 그때였다.

“왜 보고만 있니? 이건 서비스란다. 맛있게 먹으렴.”

“하지만…….”

“오, 그런 얼굴 하지 마렴, 힐.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보니 오늘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말이야.”

“……그, 그만해주세요. 마사 부인.”

“호호호, 나를 그렇게 정중하게 불러주는 건 너밖에 없단다.”

거래하지 않아도 쉽사리 내밀어지는 호의와 칭찬의 말들은 아직도 나를 낯간지럽게 했다.

“우리 힐, 또 빨개졌네!”

“엘라!”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그 부끄러운 말에 적응을 못 하고 얼굴을 붉히면, 꼭 이렇게 한마디를 하곤 했다.

나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고, 마사 아줌마와 엘라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해. 내가 무섭지도 않은가. 이곳 사람들은 요즘 날 놀리는 재미에 사는 것 같아.

퍽 우울해져서 시무룩해지는 순간이었다.

딸랑하는 종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언니야!”

아.

익숙한 부름에 심장이 덜컹하는 것은 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로제.

로제리엘.

그 애는 잘 지낼까?

그렇게 기시감을 느끼면서도 바라본 풍경에는 환히 웃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로제는 없었다.

서 있는 것은 다른 아이였다.

이제 다섯 살이 된 루아.

내가 이 마을에 쉽게 정착하게 될 수 있었던 계기.

눈이 마주치자 루아가 활짝 웃으며 양 손을 귀엽게 흔들었다.

“언니야, 루아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또랑또랑한 말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누가 저 애를 다섯 살 먹은 아이라고 할까?

나도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루아. 어서 와.”

쪼르르 달려온 루아가 식탁 테이블에 턱을 기대며 눈을 깜빡였다.

그 귀여운 모습에 엘라가 으으,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을 들으며 루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주었다.

아이는 명랑했지만, 몸은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힐 언니야, 잘 자써요? 루아는 언니 생각 엄청엄청 했는데!”

“언니도 루아 생각 많이 했어.”

“치이, 근데 왜 언니 맨날 내 초대 거절해써요? 루아랑 같이 열 밤만 자면 안 돼?”

널 보면 내 동생이 떠오르거든.

그래서, 마음이 아프면서도 또……. 반가워.

“언니는 꽃집을 운영하잖아. 그래서 영주님의 성에서 자는 것은 어려워요.”

“치잇……. 그럼 루아가 언니네로 갈까?”

“그럼 영주님은 루아 걱정에 밤낮을 설치실텐데.”

“오빠 미워! 루아 맨날 아무것도 못하게 해!”

“영주님은 동생인 루아를 굉장히 아끼시는 거야.”

나는 이능을 불러일으켜 아이의 몸속에 집어넣었다.

차갑던 아이의 조그마한 손이 조금씩 온기를 띄는 것을 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루아가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언니야, 근데요.”

“응?”

“우리 저택에 귀한 손님 와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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