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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87화 (87/155)

87화. 도주는 나쁘지 않았다 (2)

귀한 손님이라고?

나는 신이 난 것 같은 루아의 머리를 땋아주면서 생각했다.

지금 머물고 있는 마을 루다나는 아라난 왕국의 엔데렌 백작 영지령에 속한 작은 마을이다.

산맥 중간에 위치해 넓게 펼쳐진 평원과 평화롭게 우는 양떼들, 수가 많지 않아 서로 가족같이 친하며, 다정하고 상냥한 마을 사람들.

그만큼 루다나는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조용한 마을이었다.

좋게 말하면 한적하고, 나쁘게 말하면 오가는 사람이 전혀 없는 그런 조용한 그런 곳.

‘그 조용한 평화도 내 꽃집 때문에 시끄러워지고 있지만.’

그런데 영주성에 머물 만한 귀한 손님이라고 하면 수도에서 온 신분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쩐지 그 누군가가 내가 잘 알고 있는 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은 2인분으로 준비해놔야 할까?’

그런 고민을 떠올렸을 때였다.

나는 엘라와 마사 부인의 표정이 꽤 능글맞은 웃음을 띠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왜 둘 다 그런 표정을?

“왜 그런 표정을 해, 엘라? 마사 부인, 왜 그러세요?”

말을 꺼낸 것은 엘라였다.

그녀는 당장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고 싶다는 표정을 하며 입술을 요상하게 휘며 말했다.

“다 들었어. 또 영주님이 고백했다면서?”

루아가 내 무릎을 꼭 쥔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빤히 올려다보는 그 동그란 눈이 묻고 있었다.

영주님이면 우리 오빠? 오빠가 언니한테 고백해써? 하고.

“아, 아니야. 루아, 저런 말 들으면 못 써요.”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애가 듣고 오해하면 어떡하려고.

나는 루아의 귀를 막으며 엘라를 살짝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고백이야, 엘라. 영주님은 동생을 치료해줘서 매번 감사 표시를 하는 것뿐이야.”

“…….”

“…….”

엘라와 마사 부인의 표정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오묘해졌지만,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꽃을 간혹 사가실 뿐인걸. 게다가 영주님은 귀족이잖아.”

이곳 엔데렌 백작령은 백작치고 무척 젊은 귀족이 다스리는 곳이었는데, 한적한 지방 영지이기 때문인지 별다른 마찰 없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부모님 대신 작위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눈을 귀엽게 깜빡이고 있는 다섯 살 아이, 루아의 하나밖에 없는 오빠였고 처음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낯선 타지인이었던 내가 이 마을에 제대로 정착하며 살 수 있게 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내가 루아를 고치게 된 것 때문이었지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엘라는 탄식을 하며 재미없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엘라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은 대체 왜 영주님과 나를 엮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이곳이 워낙 조용한 곳이라 재밌는 일이 없어서 그런 걸까?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평민 힐일 뿐인데.’

이들은 날 그냥 평민이자 치료사, 혹은 약초사인 힐로 알고 있을 뿐인데 어떻게 자기들 영지의 영주님과 엮을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제국 수도였으면 난리가 났을 거야.’

공작 영애와 평민의 사랑이라고 소문만 돌아도 그 가문은 펄쩍 뛰며 추문에 휩싸일 것이다.

그래서 가끔 저 자유로운 분위기가 익숙해지질 않았다.

이를 테면 저런 말.

“그래도 연애 대상으로 한번 고려해 봐, 힐.”

“연애 대상이라니.”

“가벼운 연애 말이야, 얘. 푸핫, 그런 엄숙한 얼굴 좀 하지 마! 누가 결혼하라고 했니?”

그렇게 말하며 엘라는 영주님이 불쌍해 죽겠다고 중얼거렸다.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노려보다가 엘라가 대뜸 물었다.

“혹시, 떠나온 곳에 남편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남편이라니.

나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약혼자도 아닌 상대를 짝사랑해서 도망쳐온 나한테?

“그건 아니구나?”

“응, 아니야.”

“그럼 연인이라도?”

“그것도 아니야.”

애초에 다들 날 싫어했는걸.

“좋았어.”

엘라가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순간, 루아가 끼어들었다.

“언니야, 다시 한번 웃어 봐!”

“응?”

예쁘게 웃는 작은 아이는 내가 이 마을에 들어와 가장 처음 보게 된 사람 중 한명이기 때문에, 어설픈 내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터지는 웃음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것이다.

“히히, 다시 웃어주쎄요.”

“루아, 다쳐요.”

“으응, 어서 웃어 봐아.”

무릎 위로 올라온 루아가 내 입술을 찰흙 만지듯 문질렀다. 그 조물조물한 손의 감촉이 너무 간지럽고 귀여워서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신없이 바라보던 루아가 양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키득거리며 외쳤다.

“언니이 이제 예쁘게 웃어! 루아 자꾸 자꾸 보고 싶어요. 오빠한테 자랑할 거야.”

루아의 감탄에 엘라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게 다 이 엘라 언니 덕분이란다. 그래도 저거 몇 번 없는 진귀한 장면이에요. 매번 어색하게 웃을 때마다 얼마나 내 마음이 아린지 몰라. 어찌 된 애가 웃을지도 모르냐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루아를 품에 안았다. 마을에는 정해진 일과가 있었고 우리는 이제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꽃집은 오늘 열지 않을 테지만, 돌봐야 할 동생들이 많은 엘라는 할 일이 많을 테니까.

“아무튼 앞으로 영주님 곤란하게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엘라. 특히 루아 앞에서는 더더욱.”

“어휴, 답답해. 답답해.”

설령 엘라의 말대로 설령 그런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거절할 수밖에 없어.’

나는 지금 누구의 고백도 받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가브리엘.’

나는 아직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가슴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12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감정을 두 달 만에 털어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심장이 요동을 치니까.

분명 내 마음은 아직 그에 대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아직도. 아직도. 얼마나 지나야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

“또, 또, 또!”

“알았어. 알았어. 웃을게, 됐지?”

“그 표정이 아니야!”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마자 이어지는 엘라의 잔소리에 나는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고, 참다못한 루아가 시끄럽다고 꽥 소리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즐거운 점심 식사가 끝이 났다.

*

루아의 손을 잡고 마을 곳곳을 누비다 석양이 질 무렵 내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야, 여기 안 추워요?”

루아는 몸이 차갑게 변하는 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 난로 하나 변변치 않은 내 집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물론 돈은 많았다. 힐로 화분을 판매하면서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금액의 돈은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왕국에서도 인출할 수 있는 공용 재화였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촌장님께 부탁해서 마을에 있던 허름한 빈 집에 머무르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이 집이었다.

‘아늑한 내 집.’

비록 없는 것이 더 많고 힐링턴 공작가에 있던 내 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초라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응, 언니는 이 집이 좋아. 따뜻한 사람 냄새가 나잖니.”

“사라암 냄새? 그거 좋은 거예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루아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토실토실한 뺨을 콱 깨물어주고 싶은 것을 참으며 문을 열고 루아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찬기가 꽤 들어 얼른 장작을 넣어 난로에 불을 때고, 준비해두었던 수프를 데워 아이에게 내어주었다.

호호 불면서 귀엽게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아야, 돌아가 봐야 하지 않아?”

“우응. 오빠가 데리러 온댔어요. 하지만 루아는 가기 싫은데! 언니야가 말해줘요, 루아 여기서 자고갈래.”

나는 창문을 뚫고 들어온 석양빛을 받아 옅은 붉은색으로 변한 루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옅으면 우리 로제와 비슷한 머리색이 될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면 밝고 명랑한 루아의 성격은 우리 로제의 어렸을 때와 비슷하구나.

“언니야. 언니는 그리운 사람 이써?”

“응? 왜 그런 소리를 하니?”

어린아이가 하지 않을 법한 소리에 깜짝 놀랐는데, 루아는 방긋 웃으면서 슬픈 소리를 했다.

“루아 알아요. 그건 누가 보고 싶을 때 하는 표정이야. 우리 오빠가 엄마, 아빠의 그림을 보면서 그런 얼굴을 하거든요!”

“……그렇구나. 그러면 루아는 어떻게 하니?”

“루아는 오빠의 다리에 찰싹 붙어서 올려다봐요. 그러면 오빠는 바보처럼 웃으면서 눈물을 먹어. 그리고 루아를 안아줘요!”

“루아는 무척 상냥하구나.”

“헤헤.”

갑자기 그런 기억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의 생일 때, 울적해 보이는 아빠의 얼굴.

그리고 재잘거리며 일부러 아빠의 곁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상냥한 분홍 머리의 꼬마아이.

‘로제도 그랬을까?’

어쩌면 비슷한 광경이 아니었을까. 아빠는 엄마의 죽음을 떠올리며 슬퍼했을 테니까.

어쩐지 로제가 무척 그리워졌다.

죄책감도 치밀었다. 갑자기 사라져서 굉장히 놀랐을 텐데…….

‘청혼하는 순간만큼은 잘 참고 나중에 떠나왔어도 괜찮았을 텐데. 난 왜 그 순간을 못 참아서.’

울적한 기분에 빠지려 할 때였다. 루아가 총총걸음으로 의자에서 내려와 무언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야, 이건 뭐예여?”

나는 작은 상자를 바라보며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평소라면 무엇이든 루아에게 보여주며 아이의 호기심을 채워주었을 텐데 저것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애써 웃으면서 루아에게 다가가 아이를 안아 올리자, 갸우뚱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저건, 언니의 소중한 사람이 준 선물이야.”

“그럼 루아도 구경할 수 이써요?”

“아직은……. 나중에 언니가 보여줄게. 괜찮을까?”

“우응, 아쉽긴 하지만 루아는 참을 수 이써!”

“어머, 우리 루아는 정말 착하구나?”

우리가 서로를 보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똑똑, 하는 정중한 노크 소리가 문 밖에서 울렸다.

루아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언니야, 오빠가 온 건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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