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크라이스는 알고 있었다 (1)
문을 열었을 때 등장한 사람은 루아의 기대와는 달랐다.
나는 눈이 마주친 사람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휘어 보였다. 자연스럽게 웃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크라이스.”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습니까?”
그는 현재 대륙 곳곳에 기도 유람을 다니고 있는 최고 신관, 크라이스였다.
그와의 동행은 거절했지만, 이곳 루다나 마을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곳에도 있는 신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나를 찾는 분이 있다고.
그게 바로 크라이스였다.
‘잘 도착했군요, 힐.’
이곳에서 쓰는 이름이 힐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그는 그렇게 불렀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 중에 힐이라고 친근하게 불렀던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마을 사람들이 힐이라고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어색한 느낌이었다.
“들어오세요, 크라이스. 혹시 저녁 식사 하지 않으셨다면 드시고 가실래요? 크라이스의 몫도 준비해놓았어요.”
“아, 저는 저녁 식사는 괜찮습니다. 아, 이런……. 꼬마 손님이 있었군요? 루아였던가요.”
“네, 영주님의 동생이에요.”
루아는 아까 나에게 재잘재잘 떠들었던 것과는 달리 의자 뒤에 숨어 빼꼼 눈만 내밀고 있었다.
“낯선가 봐요.”
“아이와 친하시군요, 힐. 저번에도 왔을 때 이 아이가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웃음을 삼키며 손을 뻗자, 내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루아는 밝고 명랑했지만 이상하게도 크라이스에게만은 낯가림을 거두지 못했다.
높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화려한 신관복이 무섭기 때문일까?
루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아팠기 때문에 온갖 신관, 치료사, 그리고 사기꾼들까지 오갔다고 했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렇게 밖으로 거동도 자유롭지 못했었다고.
“안녕, 꼬마 아가씨. 그래도 우리 몇 번 보지 않았니?”
크라이스는 부드럽게 물었지만, 루아는 꽤 불퉁한 목소리로 답했다.
“루아는 꼬마 아가씨 아닌데. 루아는 루아예요.”
“기분 나빴구나? 그럼 루아라고 부르면 될까?”
“우웅.”
크라이스는 이 한적한 마을까지 종종 방문하고는 했다.
그것이 어째 나 때문인 것 같아 민망하기는 했지만.
그가 미엘르 제국의 최고 신관인 줄은 모르고 있어도 높으신 신관 나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 마을 사람들이 가끔 궁금해하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다 대고 어떤 변명도 거짓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아는 친척이라고 에둘러 말했을 뿐.
“힐, 이곳에서 계속 지내는 건가요? 겨울엔 추울 것 같군요.”
크라이스는 내 집을 둘러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고 나서 표정을 관리했다.
그래도 다 봤다.
굳이 귀족들이 아니더라도 존경 받는 최고 신관님이 보기엔 내 집이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집처럼 보이겠지?
“보기엔 그래도 굉장히 편하고 좋아요. 저만의 집이라는 느낌이라서요.”
“그렇군요. 제가 실례했어요.”
그러나 무례한 느낌은 아니라 웃음을 삼키며 의자를 내주었다.
“아니에요, 크라이스. 걱정해서 해주신 말이라는 거 잘 아는걸요. 어서 앉으세요.”
어설프게 앉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를 마주하면 떠오르는 그곳의 기억이 잠시 쓴 물을 삼켜야 했다.
처음에는 크라이스가 찾아오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아직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을 때였기 때문에.
‘영애는 제가 불편하군요.’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당신을 통해서 그곳의 소식이 들려올까 봐 무서워.
내가 불쑥 물어버릴까 봐 무서워.
로제는. 아빠는. 그리고 그 사람은 잘 지내고 있는지.
그런 하지 못한 내 속마음을 읽은 것인지, 침묵하는 내게 그는 부드럽게 말해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힐데아 영애.’
‘…….’
‘제가 당신에게 불편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일은 없을 거예요.’
크라이스는 이후에도 무척 기민하게 행동해주었다.
그의 단정한 입술 사이로 단 한 번도 제국에 관한 소식이 흘러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그 후로 차츰차츰 나는 안도하며 그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제국의 소소한 소식이 닿기에 이 마을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크라이스가 창 밖으로 보이는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곳은 참 축복받은 마을이에요. 몬스터의 습격도 없고, 주변 왕국들과의 사이도 원만하지요.”
“맞아요.”
“왕국의 기질도 그러한데 이곳의 영주님은 정말…… 사람이 좋으시더군요.”
“응! 루아 오빠는 착해여! 잔소리는 심하지만.”
자기 오빠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았는지 얼른 고개를 빼며 말하는 소녀를 보며 우리는 동시에 온화한 분위기를 삼켰다.
그건 그래. 영주님만큼 사람 좋은 분도 드물지.
도무지 이 영지를 다스리는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가끔은 멍할 때도 있지만 수더분한 외모에 순둥이 같은 눈. 그런데도 타고난 것인지 체격이 무척이나 탄탄하고 컸는데 특히 어깨가 매우 넓었다.
루아는 가끔 자기 오빠 어깨에 매달리거나 앉아 있을 때도 있다고 자랑하곤 했지.
“그런데, 힐.”
“네?”
나는 크라이스의 말에 영주님을 떠올리다가 정신을 차렸다.
“꽃집 장사가 무척 잘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영주님께 들으셨나요?”
최고 신관이 몰래 다른 영지로 오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영지에 들르게 되면 그곳의 가장 높은 귀족이나 영주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들르는 편이었다.
역시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특별한 화분, 꽃으로 유명해졌다고 하더군요. 다른 왕국들에까지 소문이 번질 정도라던데…….”
내 치유의 이능을 담은 꽃들은 힐이라는 이름으로 암시장에 판매를 했던 것만큼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효과를 내었다.
머리가 아픈 사람은 두통이 사라지고, 근심 걱정이 있던 사람들은 그것을 싹 잊고 행복한 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효과이긴 했지만, 어느새 단순한 꽃 선물이 아니라 그런 효과를 노리고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요 근래 주문이 갑자기 확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괜찮겠어요, 힐?”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 말 속에는 우려가 담겨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달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아무리 주문을 많이 하더라도 다른 왕국들에서 손님이 오는 것이지, 미엘르 제국의 귀족들이 온 적은 없으니까요.”
앞으로는 모르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오진 않을 거야.’
나는 떠나기 전,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는 정도의 내용으로 편지를 충분히 남기고 왔다.
시간을 갖길 원하며 준비는 철저히 해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마음이 안정되는 순간 다시 돌아올 예정이니 뒤따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아빠나 로제나 분명 그 부탁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가브리엘은…….
‘그 사람 반응은 모르겠어.’
그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을까? 그는 내가 왜 떠났는지도 몰랐을 테니까.
그 이후로 소소한 대화가 오갔다.
그가 오늘은 어떤 소녀의 축언을 알려주었는데, 그 소녀가 얼마나 행복하고 기뻐했었는지.
루아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 도움을 주었던 용병단과도 아직 연락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힐?”
“네.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그분들도 힐에게 도움을 받았다면서요.”
“산맥이 그렇게 험준할 줄은 몰라서, 그래도 약초 몇 번 드린 것뿐이에요.”
정말 그랬었다.
몇 주의 여행길은 내 생애 첫 고생이었기 때문에 별일이 다 있었다.
마차로 이동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나름 씩씩하고 건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아무래도 귀족 영애의 체력으로는 용병들을 쉽게 따라잡을 수도 없었고.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도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부드럽게 웃었고, 내 편안한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던 크라이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분들이 힐이 치료사이자 약초사라고 공언을 해서 이 마을의 촌장이 쉽게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던데. 아니었나요?”
“그건 맞지만요…….”
“베푼 선행이 선행으로 돌아왔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힐. 혹시…… 제국의 일이 궁금하지는 않은가요?”
잠시 호흡을 멈췄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를 보았으나, 그는 무척이나 진지한 낯빛이었다.
나는 내가 제국을 떠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정말 무슨 정신인지 모를 정도로 황급히 떠나야 했다.
덕분에 챙겨 나온 것도 적었고, 남기고 올 수 있었던 것도 편지 한 장과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남긴 화분이 다였지.’
그 화분은 정말 충동적이었다.
꽃말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그를 떠올리면서, 내 마음 한 조각이라도 언젠가 한번 넌지시 알아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는 보아도 모른 척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는 나을 마지막 미련이었다.
짝사랑.
짝사랑을 담은 꽃말의 꽃을 화분에 심어두었었고, 그것을 결국 두고 나왔었다.
내가 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 꽃은 살아 있을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기억을 흘려보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곳의 현재였고, 쓰라린 과거가 아니었다.
고작 두 달이라고 하지만 그곳을 떠난 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으니까.
“아니요.”
“그렇군요.”
“미안해요, 크라이스. 신경 써주는 것은 알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별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요.”
나는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게 되었고, 말수도 늘었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으면 감사 인사도 쉽게 내뱉을 수 있게 되었고, 타인과 포옹하는 것을 낯설어하지 않게 되었지.
유심히 날 지켜보던 크라이스가 눈을 휘며 말했다.
“전 언제든 들를 거예요, 힐.”
그러니 언제든 궁금해지면 말해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