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89화 (89/155)

89화. 크라이스는 알고 있었다 (2)

크라이스는 제 앞에서 제법 편안하게 보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싸늘하고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 오늘따라 유려한 그림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였다.

‘오늘도 말하지 못했군.’

아니, 그래서라는 이유로 핑계를 대었다. 오늘도.

크라이스는 여자에게 당신의 가족들이 당신을 미친 듯이 찾고 있으며, 특히 당신에게 대놓고 청혼을 거절당한 남자는 좌절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공작.’

크라이스도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그러다 나중에 신도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자초지종을 알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나, 힐데아는 그 남자가 자신이 아닌 동생 로제리엘을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착각이었고, 벨키우스 공작이 처음부터 혼담을 제안하려고 했던 청혼의 당사자는 힐데아 본인이었다.

자. 이것을 알려주면?

‘돌아가겠지.’

모든 오해가 풀어지고 나면 저 여자는 기대에 찬 얼굴로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의 이 여자는 사라지고, 힐링턴의 힐데아만 남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보게 될 광경이라면 행복해 하는 가브리엘의 손을 잡고 있을 힐데아의 모습이겠지.

그는 그게 싫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이건 독점욕, 소유욕인가?’

크라이스는 자신의 마음에 선명하게 떠오른 감정을 인지하며 쓴웃음을 삼켰다.

신관도 결혼은 한다.

연애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다른 교리의 경우에는 모르겠으나, 유일신 연님의 교리 중에서는 신관이라고 정숙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러니 신관이 자신이 모시는 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연모하는 감정을 품었다고 죄가 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 따위의 사치스러운 감정에 눈 돌리지 않으리라 맹세했었지. 그랬었는데. 당신은 왜 다르지, 힐데아 폰 힐링턴?’

크라이스는 그랬다.

피눈물을 흘리며 황후의 손을 잡게 되었을 당시, 그 이후에도 줄곧 그의 얼음 같은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복수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제법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이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하는 힐데아의 말을 들으며, 크라이스는 눈을 살짝 감았다.

평화로웠다.

복수로 넘실거리며 괴롭기만 했던 심장이 모처럼 고요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훔쳐서라도 갖고 싶을 정도로.

‘그래. 나는.’

지난 두 달간, 힐데아에게는 수도에서 겪은 괴로움을 잊는 시간이었다면, 크라이스는 제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불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정했다.

수도에서 그녀를 찾는 공문들을 보며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팠을 때,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이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왔을 때, 마침내 저를 향해 웃으면서 인사하는 힐데아를 보았을 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크라이스는 눈을 떠 아름다운 힐데아를 눈에 담았다.

‘당신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눈이 벌겋게 변해 폐인처럼 제 딸을 찾고 있는 힐링턴 공작에게 힐데아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고.

온갖 자금을 풀어 전 대륙을 이 잡듯 뒤지다가 절망하여 술독에 빠져 살고 있는 벨키우스 공작에게 언급 따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눈앞의 웃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에 안도하고, 웃으며, 독식하고 싶어 하는 자신이 있었고.

눈을 번들거리며 집착으로 얼룩져가던 황태자 벤자민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 말하는 황후에게조차 힐데아의 행방을 숨겼다.

그녀의 행방에 대해 말하면 갈급한 자들 중 누구에게나 큰 힘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숨겼다.

‘꼭 이 여자에 대한 감정이 내 복수보다 우선하는 것처럼.’

크라이스는 허를 찔리는 것 같은 생각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쩌면 이 여자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의 모든 반응은 남달랐다.

눈부신 태양빛 아래, 그 태양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가련한 사막의 선인장처럼 한 번 봐버린 순간, 힐데아를 보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손이 떨렸고, 경악스러웠다.

경배했고, 그저 경애했다.

‘당신은 너무 눈부셔, 힐데아.’

크라이스는 애타는 숨을 내쉬었다.

누구도 이 다정한 시간을, 소유욕을 채울 수 있는 그녀와 자신만의 시간을 깨뜨리길 원하지 않는다.

영원히.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 작은 마을에 힐데아를 가둬놓고 싶었다.

‘하지만.’

크라이스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럴 수 없겠지.’

그러기엔 힐데아 폰 힐링턴은 너무 빛났다.

그녀가 운영하는 꽃집.

지금 그 꽃집이 밖에서 얼마나 시끄럽게 소문이 나고 있는지 힐데아는 결코 모르리라.

그것을 최대한 감추고 숨기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당신은 어디에서나 사랑 받는 사람이라는 걸 당신만 모르지.’

평화롭지만 사실 루다나 마을은 외지인을 낯설게 대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힐데아의 처지가 걱정되었던 것도 있었다.

그런데 웬걸.

그의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

‘힐은 언덕 위의 집에 있어요. 근데……. 힐을 찾아온 손님이세요? 혹시 고향 친구?’

‘어머, 힐은 우리 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은인이죠!’

‘그 애가 키운 꽃들이 얼마나 향기롭고 예쁜지, 옆에만 둬도 두통이 사라진다니까요?’

‘그 애가 영주님의 동생을 살렸을 땐 얼마나 기적 같았는지!’

영주의 동생을 치료할 수 있도록 그녀의 이능이 들어간 약초를 건네어 누구도 낫지 못하게 했던 소녀를 치료하는 바람에 힐데아는 이곳 영지의 보물이자, 은인이 되어 있었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치유의 이능이었을까 하는 것.

지닌 능력이 치료의 이능이 아닌데도 그렇게 발현된 것은, 아픈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누구보다 남달랐기 때문일까.

저번에 한 번 물었던 적이 있었다.

‘영애의 이능이 치유라고 생각하시나요?’

‘네. 확실한걸요.’

‘영애는…… 사람을 살리고 싶었습니까?’

‘음, 저는 아픈 게 싫어요. 그뿐이에요.’

<정해진 운명이 없다>.

그 절대적인 축언을 들었을 때, 그도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결코 치유의 이능이 발현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보단 더, 더 파괴적인 이능이 발현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힐데아는 치유의 이능을 자각했다.

시들시들한 꽃을 피우고, 그녀의 이능을 맞은 숲은 한층 울창해졌다.

다친 새들을 치료하고, 아픈 사람을 낫게 했다.

비록 이곳에서는 주위의 이목을 고려해서 모든 것을 식물을 통해 베풀었다지만, 그건 절대적인 치유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크라이스는 동시에 다른 한 가지 비밀도 알고 있었다.

결코 힐데아에게 말할 생각이 없는 비밀.

‘어떤 치유 능력도 망가진 화분을 원상 복구할 수는 없다.’

힐데아의 능력은 분명 치유 능력보다도 훨씬 더 상위의 것이었다.

훨씬 더…….

‘어쩌면 내가 지닌 것보다도 더.’

뛰어난 이능. 기적.

“크라이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 벌써 떠나실 시간이 다 되었네요.”

“네, 아쉽습니다. 무척.”

당신이 당신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생각을 숨기며 크라이스는 조용히 웃었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위선자에 지독한 거짓말쟁이였다.

*

나는 멀어지는 크라이스를 배웅하고 들어온 참이었다. 방에는 곤히 잠들어버린 루아의 숨소리만 들렸다.

“아.”

그리고 시선이 닿았다.

아까 루아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던 그 작은 상자에.

욱신거리는 심장의 아픔은 분명 이 상자 안에 든 것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내가 놓아버리고 온 것들을 상기시키는 크라이스와 대화를 나누어서인 것일지도.

나는 바닥에 앉아 상자를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에 있는 것을 들추었다.

“이 신발…….”

처음 이 신발을 선물 받았을 때, 너무 기뻐서 주체할 수 없었던 기분이 생생했다.

구름 위를 뛰어다닐 것처럼 푹신한 바닥 재질, 앙증맞고 귀엽게 흔들리는 작은 날개.

구두보다는 전생에 운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생김새.

운동할 때 신으면 좋겠다고 선물을 주던 아빠.

이제는 너무 작아져 신을 수 없는 아주 작은 그 신발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루아에게 선물하면 몇 년 뒤에는 맞을 만한 신발이 될 것이다.

“잘, 지내겠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편지라도 한번 보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에게, 특히 나만 보면 환히 웃어주었던 우리 로제에게 나는 너무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런 소식을 전할까 하는 욕심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겁이 덜컥 들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찾아오면?

나는 바로 같이 돌아갈 수 있을까. 이곳에서의 편안함을 뒤로 하고, 환히 웃는 엘라나, 귀여운 루아나, 친절하신 영주님이나, 다정한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돌아갔을 때 나는 다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까.

가브리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나는 신발을 상자 안에 넣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닫았다.

‘미안해.’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가족들이 모두 평안하기를.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밖에서 똑똑, 조심스럽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안녕하세요. 힐……. 계십니까?

*

두 달 전만 해도 연회 준비로 시끄럽고 활기차던 저택의 복도는 먹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조용하고 암울했다.

저택의 긴 복도를 걸어가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인의 얼굴도 이전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침 문 밖에 나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디안이 가까이 다가온 로제를 보며 반색을 했다.

“오셨습니까, 로제리엘 영애?”

“안녕하세요, 디안.”

눈치를 살피던 디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