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들은 간절히 찾고 있었다 (1)
로제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말할 정도는 아니에요.”
희망을 부수는 말에 디안의 얼굴이 거뭇해졌다.
“어떤 희망이라도 있으면…….”
“알아낸 게 있긴 하니 전하긴 해야죠. 가브리엘이 어떻게 나올진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디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고, 조용한 방 안에 귀를 기울이던 로제리엘이 물었다.
“음, 가브리엘은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아니면 좀 나아졌나요?”
“……아뇨. 점점 더 심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저도 무서워서 잘 못 들어가겠는걸요.”
“후우. 큰일이네요.”
가브리엘이 폐인이 되었다.
사실 지금 힐링턴과 깊이 관련된 사람 중에서 폐인이 되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특히 가브리엘은 놀랄 만큼 거칠어졌고, 사나워졌고, 어두워졌다.
‘하아.’
로제리엘은 어두운 얼굴로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정확히 두 달 전, 그 청혼의 날의 일을.
*
로제리엘의 시선은 못 박힌 듯 언니, 힐데아에게 향해 있었다.
대체 누구 언니라서 그런 건지 뒷모습도 옆모습도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자아, 이제 완벽한 한 장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멋지게 청혼하는 남자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여자. 그리고 박수를 치며 주변에서 환호하며 축하의 인사를 건넬 동생인 자신!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어, 어라?’
처음에 로제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했다.
신데렐라가 제 구두를 두고 도망치듯 뛰어나가는 언니의 드레스를 멍하니 바라봤을 뿐이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로제리엘 영애, 지금 힐데아 영애가…….”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심하게 커졌을 때, 로제리엘은 드디어 이해했다.
지금 벌어진 일의 뜻을.
언니가 도망쳤다.
사라졌다.
청혼을 거부하고.
“히, 힐이…….”
“아, 아빠?”
“당장 따, 따라가 봐야겠다.”
로제리엘은 휘청거리는 아빠를 부축하며, 얼른 사람들과 함께 뒤따랐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왜 하필 그때 언니가 돌아선 것인지, 정말, 정말 가브리엘의 청혼을 거절한 것인지!
‘분명 언니도 가브리엘을 좋아했을 텐데? 아니, 그보다 청혼을 받아들인다고 했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모두가 혼비백산했다.
왜냐하면 힐링턴 저택 어디에도 힐데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별관 쪽에도 계시지 않아요!”
“방에도 없, 그보다 짐을 챙겨서 나가신 흔적이…….”
창백하게 질린 시녀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로제리엘은 달렸다.
아니야, 힐데아가 그럴 리가 없었다.
“언니, 언니야!”
하지만 시녀들의 말대로 힐데아의 방은 텅 비어버렸고, 급히 나간 것처럼 흐트러져 있기까지 했다.
로제리엘은 귀신 같이 눈을 번뜩이며 언니가 애지중지하던 것들이 제자리에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가브리엘이 줬던 목걸이.
가브리엘이 보냈던 편지.
자신이 생일에 선물했던 물건들도 모두 있…….
‘신발이 없어!’
로제리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후에도 한참동안 뒤졌으나 시종 중 누구도 힐데아의 모습을 본 자가 없었다.
아무리 저택이 넓다고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힐데아가 집을 나갔다. 가출한 것이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로제리엘은 조용했던 언니의 얼굴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내가 뭔가 놓치고 있던 거야?”
로제리엘은 착각하지 않았다.
분명 힐데아의 시선은 가브리엘에게 향했고, 가브리엘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제 언니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니 이제 고백하고 이루어질 일만 남았는데, 대체 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또렷한 두통이 선명하게 뇌리를 강타했다.
눈을 깜빡이며 휘청거렸던 로제리엘은 복도에 비치는 유리창 너머, 창백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뭐야. 이게.’
잊었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여기가 어디고, 자신이 누구이고, 그리고 언니가 누구인지.
“맙소사, 언니…….”
일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기쁜 감정에 빠져 못 보고 놓친 것들이 있지는 않았나?
반지를 고를 때,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할 때, 언니가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언니의 얼굴이…… 어땠었지?
“설마 가브리엘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 라고 생각한 거야?”
놓치고 있었던 것들이 선명하게 목구멍에 걸렸다.
로제리엘은 덜컥 겁이 나 연회장으로 되돌아갔다.
아니야, 다시 돌아왔을지도 몰라.
그녀가 아는 힐데아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떠날 준비를 해왔던 것이 아니라면 분명 다시!
“……로, 로제리엘 영애.”
하지만 아니었다.
재빨리 보낸 손님들을이 사라져, 넓은 연회홀에는 오로지 몇 사람만 서 있었다.
로제리엘은 그 중에 한 사람, 시간이 멈춘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백금발의 남자를 보았다.
그는 또렷하고 꼿꼿하게 서서 힐데아가 뒤돌아 뛰어갔던 그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려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부관, 디안이었다.
“가브리엘이 왜 저러고 있어요?”
“말을, 듣지 않으십니다. 그저 저렇게 계속…….”
로제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 쫓아가지 않고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언니가 납치라도 당한 것이 아닌 이상 제발로 나갔을 텐데 이렇게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라고.
그렇게 다가가려 했을 때였다.
주륵, 하고 가브리엘의 뺨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
그건 눈물이었다.
로제리엘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리에서 멈췄고, 그건 옆에 따라오던 디안도 마찬가지였다.
가브리엘은 눈동자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죽어버린 사람처럼.
그리고 몇 시간 뒤, 퍼렇게 질려버린 아빠가 서재에 남겨져 있던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이런 일을 벌인 사람답지 않게 평소처럼 차분하고 우아한 필체로 써내려간 편지의 뜻은 간단했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 시간을 달라. 뒤쫓지 마라. 이렇게 떠나게 되어 미안하다.
힐데아 폰 힐링턴은 스스로 힐링턴을 떠난 것이었다.
*
그렇게 두 달.
두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로제리엘도, 그녀의 아빠도, 가문의 사람들도,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힐데아를 찾는 사람 모두가 혈안이 되어 제국 곳곳을 뒤졌다.
‘이게……. 이게 아가씨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되었어요.’
‘자물쇠가 있었는데 혹시 몰라서 따보았는데…… 안에서 이런 것이 나왔어요. 그리고 다들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모두가 힐데아의 조각글처럼 남겨져 있는 그 일기장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노트를 발견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 있는 것들은 자신들이 같은 시간을 살아왔는지 의심될 만큼 서러운 외로움과 자책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까.
외로워.
괴로워.
쓸쓸해.
사랑받고 싶어.
웃으면 될까?
웃고 싶어.
그건 전하지 못한 편지이기도 했고, 또한 단상처럼 적어놓은 힐데아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말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한차례 찢어놓았다.
그것을 읽은 리라와 시엔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죠? 아가씨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는데…….’
‘언제나 씩씩한 분이라, 모든 일을 다 알아서 하시는 분이라, 이렇게, 이렇게 상처 받고 계신지도 모르고 바보처럼!’
로제리엘은 자신이 놓치고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눈물을 흘렸다.
그건 아빠도 다르지 않았다.
‘아빠라고 부르고 싶었다고, 여기에 적혀 있구나. 모두, 모두 내 탓이다.’
아득한 표정으로 허탈하게 앉아있는 아빠를 보며, 로제리엘은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에요. 우리는 표현을 해야 했던 거였어요.’
아빠가 말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피부는 까칠했고, 그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힐을 찾더라도 자신이 없다.’
‘……아빠?’
‘찾더라도 데리고 올 수 있겠느냐? 로제. 이 아비는 자신이 없구나.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자고 그렇게 말할 자신이…….’
‘아빠가 약해지시면 어떡해요! 다 오해였다고, 사실은 이러했다고, 우리는 언니를 그렇게 사랑한다고…….’
‘이미 크게 상처 받아버린 그 아이에게 어찌?’
‘그럼 이렇게 언니가 계속 오해하게 두라는 말씀이세요? 그건 더 아니죠. 전, 전 찾을 거예요.’
‘……그래. 찾아야지. 그 아이가 무사한지 확인해야지.’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잘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혹시라도 언니가 용서해주지 않더라도 이렇게 끝내는 건 아니에요.’
슬픈 일이었다.
자신들이 웃으며 힐데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꺅꺅거릴 때, 힐데아는 마음 깊이 외로움을 느꼈다.
손을 뻗지 못하고 수줍게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할 때, 힐데아는 서러운 소외감을 느꼈다.
심지어 이성이 보내는 사랑조차도 몰랐다.
너무 좋아서 긴장한 채 숨을 들이켜는 남자를 두고, 힐데아는 자신을 혐오하고 질책한다고 생각했다.
약혼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같은 시선이더라도 말을 내뱉지 않고, 표현하지 않고, 오가지 않은 것들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누군가의 가슴에는 큰 상처를 내어 찢고.
또 그 상황을 만든 이들의 가슴에는 큰 멍울을 만든 채.
특히…….
‘저 방 주인이 완전히 미쳐버렸지.’
로제리엘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두드렸다.
꽉 닫힌 문이 바로 가브리엘의 마음인 것 같아서 속이 쓰렸다.
“가브리엘?”
지금 전하는 이 소식이 방 주인을 얼마나 더 미쳐버리게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로제리엘은 그래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그녀는 저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굳게 믿었으며, 일단 오해든 뭐든 서로 부딪혀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언니, 돌아와.
“들어갈게요, 가브리엘.”
로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끼익-
꼭 스산한 누군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문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