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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92화 (92/155)

92화. 그들은 간절히 찾고 있었다 (3)

영주님의 저 수줍은 표정을 보고 처음에는 정말 엘라의 말대로 그가 내게 이성에 대한 호감을 품은 것인가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저 영주님은 누구와 대화를 하든 저런 반응을 보였다.

그는 곰처럼 느리게 움직이며 안을 바라보다가 눈을 굴렸다.

마주치니 또 웃는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손님은…… 가셨군요?”

“아, 네.”

손님은 크라이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크라이스는 항상 내게 들르기 전에 영주령에 들렀으니까.

“그분이 이곳을 편히 오갈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영주님의 배려 덕분에요. 항상 감사드려요.”

그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진짜로, 뛰었다.

“아, 아, 아닙니다! 감사라니요. 제가, 제가 항상 힐에게 감사한 것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니 다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까는 덜 익은 사과 정도의 붉기라고 하면, 지금은 딸기 정도는 되겠다.

“제게 편하게 말씀하시라고 해도 그러시네요. 음, 루아도 데리고 가셔야 하니, 잠시 들어오시겠어요?”

그는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한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 제, 제가 말입니까?”

아. 그러고 보면 저 영주님이 내 집에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불편한가?’

혹시 낡아서 거북하거나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귀족이었으니까.

불편하면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다시 한번 말하려 할 때, 빨개진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꽤 성큼성큼 영주님이 집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응? 불편한 건 아닌가?

“히, 힐. 왜, 그러시나요?”

“아, 니에요.”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터질 것 같은 영주님의 옆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았다.

저렇게까지 빨갛게 변해버리면 대체 귀족 활동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아무리 지방 영지령이라고 해도 사교 모임은 가질 텐데.

무릇 사교 활동을 제대로 하려면 표정도 숨기고 그래야 할 텐데, 저 영주님이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은 도무지 상상이 안 갔다.

음, 문제가 심각하지 않나? 마을 사람들 대할 때도 저러던데.

바로 그때였다.

“우응…… 오빠야?”

루아가 잠에서 깼다.

둘 모두의 시선을 받은 아이는 잠투정을 하면서도 꼬물꼬물 이불을 걷고 나와, 쪼르르 제 오빠의 무릎에 가서 붙었다.

‘나무와 작은 매미 같아.’

물론 나무는 영주님이었고, 작은 매미는 루아였다.

제법 사랑스러운 광경이어서 눈에 힘이 풀리고 부드럽게 바라보는데, 눈이 마주친 영주님이 다시 한번 펄쩍 뛰었다.

“그, 그, 루아가 깼으니…….”

아. 그러면 영주님이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지.

나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돌아가 보셔야겠네요. 루아, 많이 졸리지? 오빠와 함께 돌아갈 시간이에요.”

“우응……. 언니야두 우리 집에 놀러오면 좋을 텐데에.”

또 그 소리였다. 나는 영주님이 루아를 훌쩍 안아 드는 것을 보며 그들을 배웅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로 뒤따라 나올 줄 알았던 영주님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뭐지?’

다시 바라보니 그는 꼭 숨넘어갈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호흡이 불안정했고, 얼굴은 아까와는 달리 퍼래졌다.

그것이 꼭 졸도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보여 걱정으로 다가가려는 찰나.

“초, 초대를!”

그가 우렁차게 무언가를 외쳤다.

문제는 발음이 꼬여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것이었지만.

“네?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초, 초, 초대를.”

초대. 누구를. 나를?

“그, 이제 곧 제 생일인데요, 힐…….”

아아. 그런데 그게 왜?

영주님은 제 오빠의 뺨이 뜨겁다며 쿡쿡 찔러보는 루아의 손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한쪽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돌연 고개를 확 치켜들고 나와 시선을 뚜렷하게 마주쳤다.

그 순간에는 깜짝 놀랐다. 저 영주님이 저런 눈을 할 때도 있구나, 하고.

그리고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연회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와주시겠어요?”

하지만 나는 당황했다. 나는 평민인 힐이고, 그의 생일 연회라면 주변 영지의 영주들과 귀족들이 참석하는 자리일 텐데.

그곳에 왜 날?

“하지만 영주님, 저는 그곳에 참석하기에는 격이 모자라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선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아마도 외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쩌면 최고 신관이 자꾸 찾아오는 날 보며, 그냥 평민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자리에 얼굴을 비추는 건 안 될 말이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데, 귀족의 관심이 필요한 것이었다면 그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정색하며 말했더니, 차가운 예전의 말투가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영주님은 눈에 띄게 상처 입은 표정을 해 보였고, 그것이 과거 나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가슴 속이 욱신거렸다.

그게 아닌데. 그렇게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부담을, 드리려는 것은 아니에요, 힐. 그냥 제 생일은 무척 조용하게 치러질 예정이라…….”

뒷말은 어느새 잠이 깨 똘망똘망한 눈을 뜬 루아가 받았다.

“오빠야 생일에 언니야두 와쭤요! 루아랑 놀아여, 응? 오빠 친구 없어서 놀러 오는 귀족들뚜 없는걸?”

아. 루아야. 그런 말은.

아까와는 다르게 좌절한 영주님의 얼굴을 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곤란해하는 내 얼굴을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적극적으로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네, 저는, 저는 친구가 없습니다!”

“네?”

“그, 그러니 힐이 와서 자리를, 빛내주세요……. 저, 저는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이니까요.”

이걸 어떻게 거절한단 말인가. 영주님은 내게 무척 친절한 편의를 봐준 사람인 데다, 루아의 저 기대에 찬 눈빛까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그 말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정말,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가 아닌가요?”

하지만 부담도 잠시 두 남매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색하는 모습을 보니 나온 것은 결국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참석하도록 할게요.”

조촐한 만찬이라면 괜찮겠지. 별일이 없을 것이다.

희미하게 드는 불안한 생각을 잠재우며 나는 그렇게 둘을 배웅했다.

*

“오빠야.”

루아는 오빠의 바위같이 단단하고 넓은 품에 찰싹 안겨, 배시시 웃었다.

“오빠야!”

루아는 다시 한번 오빠를 불렀다. 꿋꿋하게 내려다보지 않고 앞만 보는 뺨을 쿡쿡 찌르면서.

“너, 정말.”

“오빠야 얼굴 딸기 가타!”

“후우, 너를 정말 어쩌면 좋지. 이렇게 날이 추운데 힐의 집에 가서 그렇게 있으면 어떡해?”

루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도와줘도 난리야!

루아는 아주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나 마찬가지였다.

루아는 자신이 아직 어렸지만 알 것은 다 안다고 자부했다.

예를 들어 언니야를 볼 때 자신의 오빠가 얼마나 빨갛게 변하는지! 그건 엘라 언니가 분명히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이 모에여?’

그렇게 묻는 루아의 질문에 엘라는 심오한 표정으로 그렇게 답했다.

‘옆에 함께 있고 싶은 거지.’

루아의 심장은 그 대답을 듣고 콩닥거리며 뛰었다.

힐 언니가 항상 영주성에 같이 있다면!

그 쓸쓸하고 넓은 곳에 힐 언니와 항상 함께 있다면 하루도 괴롭지 않고 행복할 것 같았다.

천사 언니. 자신을 낫게 해준 기적. 소원. 희망. 그 모든 예쁜 말들은 다 힐 언니를 위한 것이었다.

루아는 신이 나 다리를 동동 흔들었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제 오빠의 눈빛도 모르고 히히 웃으며 다짐했다.

‘오빠는 루아만 미더!’

*

황제, 디트로이아는 지금 골이 터질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축언 도둑으로 인해, 벌써 죽어나간 값진 축언이 몇이며 앞으로 또 피해가 얼마나 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어야 할 황가의 수호자, 벨키우스 공작과 힐링턴 공작이 나란히 미쳐 있는 상태여서 속이 편하지 않았다.

‘도움이 안 되는구나, 힐데아 폰 힐링턴.’

거슬렸을 때, 바로 치워버렸어야 했나.

황제는 냉정한 눈을 굴리며 방금까지 저를 조롱하고 떠난 황후를 떠올렸다.

그의 아내이자, 이 제국의 모후인 그녀는 지금의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신이 난 모양새였다.

‘항상 축언의 장점만 외치시더니, 할 말이 없으시겠습니다, 폐하?’

‘지금 그게 황후가 할 말인가 싶은데.’

‘황후니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당신의 축언 사랑에 진저리가 나는 황후라서.’

‘……데자이아!’

‘뭐, 축언과 이능이 없는 평범한 이 황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니, 알아서 잘 해결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폐하. 아, 힐데아 폰 힐링턴의 불길한 축언 때문에 이런 일이 터졌다는 의견도 있던데 폐하도 그리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무슨 수작인지는 뻔했다.

힐링턴과 벨키우스가 사라진 힐데아를 찾아 미쳐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그 잘못까지 힐데아 폰 힐링턴의 몫으로 돌린다면?

당장의 혼란은 잠재울 수 있을지 모르나 힐데아를 찾아 징벌했을 때에도 계속 축언 도둑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한다면 사건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심각한 방향으로 틀 것이다.

‘벨키우스와 힐링턴을 동시에 잃고.’

또한 축언의 절대성 또한 깨지게 된다.

황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여전히 부름에도 답변이 없는 골칫덩이 벨키우스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축언이 문제였다.

그러니 가장 필요한 자를 부르는 수밖에.

그는 미간을 구기며 대기 중인 시종장을 불렀다.

“최고 신관이 기도 유람 중이라 하였나.”

“예, 폐하. 신전에서 그리 전하였습니다.”

황제의 입술이 비틀렸다.

최고 신관, 크라이스.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자였다. 전대 최고 신관보다도 더더욱.

이 심각한 상황에 기도 유람이라. 축언을 수호하는 신전이 가장 앞서서 나서야 하는 상황일 터인데도, 방관을 해?

그것은 꼭 황후파에서 할 행동처럼 보이지 않던가.

“당장, 최고 신관을 부르라.”

“하지만 기도 유람이…….”

“지금 그게 중요한가! 그자가 어디에 있든 당장, 끌고 와서라도 짐의 앞에 데리고 오라.”

경직된 그 목소리에 시종장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폐하.

이때의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최고 신관이 있는 자리에, 이 제국의 혼란을 일시에 잠재울 수 있는 자가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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