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흔들리는 일상 (1)
다음날이었다.
평소처럼 일찍 출근해서 꽃집 문을 연 나는 제법 심각한 얼굴로 주문 장부를 보고 있었다.
“후우.”
아무래도 요즘 이상하다.
나는 장부를 펜으로 툭툭 두드렸다.
“또 주문이 들어왔잖아? 게다가 이번 주문은…….”
아라난 왕국에서의 주문이 아니었다.
물론 내 꽃집이 루아를 치료한 것 때문인지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내 꽃집의 꽃을 주문하는 다른 왕국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아지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미엘르 제국에서의 주문이라니.”
주문서를 뒤적거리다 보니 눈에 보였다.
“이상해. 너무 퍼졌어.”
요근래 집중적으로 일어난 변화였다.
새삼 불길해졌다. 변화는 안정을 흔들기 마련이니까.
‘정말 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나는 그간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살았다. 제국의 소식 하나도 아무것도 알 수 없도록.
그래서 스멀거리는 불안함이 스며들었다.
번지고 번지다 드디어 미엘르 제국에서의 주문까지 들어온 상황이라니.
그래. 현재, 꽃집에서 파는 꽃들이 경미한 통증 완화 정도의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덕분에 주변 왕국에서도 찾는 사람이 늘어난 것인데, 내 꽃을 사는 사람들은 정말 간절히 필요한 약을 찾는 것보다는 유행에 가까웠다.
그 꽃이 유명하다며?
그래? 나도 한번 사보자!
이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미엘르 제국은 달라.’
갑자기 주문이 들어온 이유를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설마 내가 암시장에서 화분을 판매하던 힐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낸 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떻게?
힐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흔한데, 도대체 왜?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싸한 통증이 살갗으로 번졌다.
‘아니야. 내가 아는 귀족은 아니고, 암시장의 화분은 정말 극소수에게만 팔렸어. 모두가 아는 정보도 아니었지.’
주요 귀족들의 작위와 영지는 외우고 있었다.
주문을 넣은 귀족은 황궁의 연회에 초대받지 못했던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에서 날 찾고, 무언가를 확인하겠다는 듯 꽃을 주문할 리는 없으니.
‘기우겠지? 그래, 가족들이 날 찾은 것은 아닐 거야.’
떨떠름한 것을 삼키며 고개를 저으려는 찰나, 딸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힐! 밥 먹자!”
“아.”
“뭘 그렇게 놀라?”
오늘도 활기찬 엘라였다. 웃으면서 자리를 피자마자, 엘라는 돌연 어제의 일을 물었다.
“맞다, 너 영주님의 생일 연회에 초대 받았다며?”
“응?”
아까의 고민이 싹 잊혀지는 화제였다.
“다 들었어, 어디서 내숭을!”
난 눈만 깜빡였다.
대체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걸까. 입 무거운 영주님이 그렇게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설마 루아?
엘라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어머, 어머 이거 무슨 진도가 이렇게 훅 들어오지? 힐, 그렇게 안 봤는데 대단하다, 야. 이제부터 너한테 잔소리하면 안 되겠어. 내 연애 사업이나 집중해야 하나?”
아, 정말.
“그런 거 아니라니까.”
엘라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먹구름처럼 가라앉았던 고민들이 한층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어느새 나도 따라 웃고 있었다.
“아니긴! 아니긴! 봐, 힐. 영주님이 보통 마음이 아닌 거라니까. 너만 초대했잖니?”
“그런 거 아니야.”
엘라는 내 말이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어휴, 따지고 보면 영주님은 나랑 더 친하단 말이야. 그런데 난 쏙 빼놓고 너만 초대했다고요, 너만. 이상하지 않니?”
“전혀 이상하지 않은걸.”
신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또 저런 말들을 한다, 또.
“그러지 마, 엘라. 루아가 좋아해서 초대하시는 것 같았어.”
엘라는 갑자기 끄응 소리를 내며 탄식했다.
“후우, 난 가끔 영주님이 불쌍해지려고 해, 힐.”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다. 응, 그래. 오늘은 닭고기 샐러드니까 많이많이 먹으렴.”
한가득 샐러드를 입에 밀어넣는 통에 한동안 우물거리며 그것만 씹어야 했다.
아, 그리고 곧 감탄했다.
이 닭고기는 퍽퍽하지도 않고 무척 부드러웠다. 이것도 마사 부인의 솜씨일까?
심각하게 고뇌하다, 갑자기 궁금증이 솟았다.
“그런데 엘라.”
“우응. 왜?”
“영주님이 너랑 더 친한 사이라고 했잖아. 그러면 영주님의 생일 연회도 잘 알고 있니?”
“연회? 가본 적은 없는데.”
상냥한 그 사람이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진 않을 것 같지만, 본의 아니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내가 먼저 조심해야 했다.
“정확히 뭘 말하는 거야?”
이 물음을 할까 말까 고민이 되었지만, 그래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혹시라도 그 연회에 귀족들이 모인다던가.”
엘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놨다.
나는 두근거리며 엘라의 기색을 살폈다.
평범한 평민이자 치유사가 귀족들을 꺼릴 이유는 많지 않다. 혹시라도 의심의 기색이 있는지, 그러나 엘라의 얼굴은 말갛기만 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내가 기억하기로는 우리 영주님이 그렇게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어서, 따로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귀족분들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아, 그래?”
“응, 여기가 워낙 한가한 곳이잖아. 뭐 흔들어서 떨어질 것이 있어야 귀족들 간의 다툼도 생긴다며.”
“으응. 그렇지.”
친구가 없다며 다부지게 외치던 영주님이 떠올라 시무룩해졌다.
그럼 영주님은 정말 진지하게 친구가 없었던 거구나. 꼭 내 모습 같은걸.
그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나는 이제 엘라가 있으니까 외톨이가 아니잖아?
돌연 의지도 솟았다.
‘원한다면 나라도 영주님의 친구가 되어주어야겠어.’
친구가 없는 괴로움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던가.
괜히 의심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선물은 이능을 가득 담은 화려한 꽃다발로 해야겠다.
루아에게도 도움이 될 겸.
그때였다. 엘라가 벌써 샐러드 한 통을 다 비운 채, 그런 말을 한 것은.
“그런데 요즘 좀 이상한 것 같아.”
“응? 뭐가 이상한데?”
엘라가 의미심장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외지인들이 좀, 자주 보이는 것 같은데. 물론 우리 마을 경치가 하도 좋아서 관광객들이 이때쯤 늘어나고는 하지만 좀 이상해.”
그녀의 말에 괜히 심장이 덜컹했다.
설마…… 나 때문에?
정말 나를 찾아서 미엘르 제국에서 이쪽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겠지?
겁이 덜컥 들었다.
그러면 반드시 아빠를, 로제를, 그리고 그 사람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아직은.’
주먹이 꽉 쥐어졌다.
‘아직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물론 영원히 소식조차 전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리라고는 여기지 않았지만, 편지의 내용대로 하지 않고 아빠나 로제가 나를 찾고 있다면…….
하지만.
모르겠다.
‘화를 낼까.’
모르겠어. 정말.
“어머, 힐. 너 왜 그래? 식은땀 좀 봐.”
“어, 어?”
“진짜잖아. 너 얼굴 좀 봐!”
깜짝 놀란 엘라가 손수건으로 내 이마를 훔치지 않았다면, 무슨 생각을 하고 굳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너 어디 아픈 거야? 체했니?”
“아, 아니야.”
“아니긴! 아픈 거면 당장 말해! 꽃집이고 나발이고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건강이야. 당장 의원님한테 가자. 아니, 네가 약초사이긴 하지만…… 어쨌든!”
엘라는 정색을 하며 말했고, 나는 가까스로 웃어 보였다.
“아픈 거 아니야. 그냥 잠깐 놀랐나 봐. 나도…… 오늘 제국에서 주문이 들어왔던 참이었거든.”
“정말이지?”
“응, 정말이야. 열도 하나도 안 나. 완전 멀쩡해.”
“너는 하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대서 의심이 간단 말이야.”
엘라는 내 말이 영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낯이었지만, 더 추궁하진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근데 말이야, 힐.”
“응?”
“아까 말한 거. 제국에서 주문이 들어왔다는 거 정말이야? 아니, 어떻게 거기서까지 주문이 들어와? 진짜 이상하네.”
“응……. 그러게.”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불안함으로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속으로 속삭였다.
“네 꽃이 그렇게 유명해졌나 봐. 하긴 네가 피운 꽃은 유독 파릇파릇하고 신기할 정도로 향이 좋으니까.”
“그, 렇지 뭐.”
아니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이 평화는 당장 깨지지 않을 거야.
아무렴. 내가 어떻게 도망쳤는데.
흔적은 남기지 않았어.
‘아직은 괜찮아, 힐데아 폰 힐링턴.’
그러나 이때의 나는 몰랐다.
그 평화가 깨지는 날이 너무나 빨리 찾아오고야 말 것이라는 걸.
*
가장 단정한 옷을 입고, 두꺼운 외투를 걸친 후 영주성으로 향했다.
다그닥다그닥, 덜컹.
요란한 소리가 웃음이 나왔다.
빠르고 고요하게 움직이는 귀족들의 마차가 아닌, 당나귀가 모는 짚단이 푹신하게 깔린 수레에 앉아 가는 경험은 무척 신기했다.
엉덩이가 조금 얼얼하네.
‘우와.’
그러나 그 아픔을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보이는 풍경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정말 예쁘다.”
넓게 펼쳐진 푸른 초원은 한겨울에도 지지 않고 저 색을 빛낸다고 했다.
이곳에서 제대로 겨울을, 그리고 봄을 다 겪을 수 있을까.
얼굴이 어두워지려는 찰나 나는 영주성에 다다랐다.
이곳까지 태워준 잡화점의 에쉬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마사 부인의 절친한 친구였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렴, 힐! 맛있는 거 많이 먹으려무나!”
“네, 감사해요, 아저씨.”
멀어지는 수레를 배웅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국의 공작저택에 비하면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고, 고즈넉한 영주성이었다.
그래도 제법 운치가 있었다. 꼭 그 영주님을 떠올리게 하는. 그때 이후로 이곳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다.
이곳에서 나는 루아를 처음 만났었다.
창백하게 질린 아이, 내가 치료한 첫 환자.
그때 생각이 끼어들었다. 첫 환자는 아니잖아, 하고.
‘그러네.’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내 첫 환자는 우습게도 가브리엘이구나.
도둑질을 하러 들어왔다가 심장이 멈춘 그 애를 살렸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파혼하려고 담을 넘는 대범한 아이라니.
‘잘.’
지내고 있겠지.
입술을 깨물며 가브리엘의 생각을 털어냈다.
그리고 제법 무거운 품 안의 꽃바구니를 씩씩하게 안았다.
“정신 차리자. 웃어야지.”
오늘은 즐겁게, 영주님과 루아를 축하하기 위해 온 것이니까 표정을 풀어야 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왔는데.
“언니야아아!”
기다렸다는 듯 폴짝 안기는 루아를 안으며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루아의 목소리가 꽤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