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흔들리는 일상 (2)
이게 어찌 된 상황이지.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다수의 눈을 보며 눈을 굴렸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는 그들 사이에 있는 영주님을 향해서였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배신감이 확 들었다.
영주님, 조촐한 연회라고 했잖아요. 조촐한 만찬이라면서요? 그런데 사람이 왜 이렇게 많…….
‘잠깐.’
그 뜻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영주님을 바라보았는데, 그제야 그가 창백한 낯으로 쩔쩔매는 것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는 꼭 알 수 없는 힘에 구속되어 꼼짝도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생일 연회의 주인공의 모습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저들은 그럼 누구지?’
나는 얼굴을 굳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들 중 한명이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보았다.
영주님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어쩐지 비열하게 히죽 웃었다.
“이야, 신기한 꽃집 주인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건들거리는 목소리에는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얼굴이 절로 냉랭해졌다.
“미인이기까지 하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 언니야…….”
나는 루아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생각을 굴렸다.
그러니까 저들은 여러모로 보아 왕국의 귀족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영주님의 친구로는 보이지 않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로군.
“누구십니까?”
“으응? 그게 지금 할 말인가?”
“영주님께서 굉장히 불편해 보이시는데요. 그 손 내려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어린아이가 보고 있지 않나요?”
딱딱한 내 말투에 귀족의 얼굴 역시 곱지 않아졌다. 원래도 곱지 않았지만.
그때였다.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대신하여 화를 냈다.
“너, 뻣뻣한 태도는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거지? 고작 평민 주제에. 이 비리비리한 영주와는 달리 이분은 왕국에서도 알아주는 후작 각하시라고! 어서 납죽 엎드려 인사하지 못해?”
불쾌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를 빠르게 파악했다.
‘아라난 왕국의 후작?’
특별히 들은 바 없는 위치였다. 그러니 대단한 축언과 이능을 지니거나, 외국의 황실에도 전해질 만큼 특별한 인물은 아니라는 소리.
나는 냉담하게 영주님을 살폈다. 그리고 바르르 떨고 있는 루아의 상태도.
‘외지인이 갑자기 늘어난 것,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내 태도가 심기를 거슬리게 했는지, 후작이라는 자가 혀를 차며 영주님의 어깨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일그러지는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민했다.
이곳 루다나가 너무 평화로워 잊고 있었지만, 현재의 나는 평민이었다. 평민이 귀족에게 반발할 수 있는 방식은 그리 많지 않다.
바로 그때였다.
“어, 언니야 괴롭히지 마!”
루아가 두 팔을 쭉 뻗은 채,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나도 놀라고 다가오려던 그 후작도 놀라고, 무엇보다 영주님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얼른 손을 뻗어 루아를 데려오고자 했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루아는 순순히 끌려오지 않았다.
“오빠야두 놔쭤요!”
“하하하!”
후작, 아니 후작 놈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게 뭐가 재밌다는 거지?
“고작 어린아이에게 보호 받는 꼴이 참 우습구나. 응? 그렇지 않나, 사무엘 이라 엔데렌 백작?”
영주님은 조롱하는 그 목소리에도 이를 꽉 깨문 채 부들부들 떨었다.
루아의 어깨가 작게 흐느끼듯 흔들렸고, 나는 루아를 내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노려봤다.
“네가 노려보면 어쩔 생각이야. 이봐, 나는 호의를 갖고 찾아왔어. 그쪽의 꽃이 그리도 유명하다지?”
결국 꽃집 때문이었다.
나 때문이었다.
깊은 분노가 심장을 꽉 죄는 느낌이었다.
제국 수도에 있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일은 드물었는데.
“그래서 용건이 무엇입니까. 꽃집에서 꽃을 주문하고 싶으셨다면, 이런 방식이 아니어도 되었을 텐데요.”
나는 저자들의 면면을 모두 유심히 살폈다. 빠짐없이 기억하겠다는 듯이.
영주님과 시선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그의 흔들리는 눈빛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하지만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나는 눈앞의 후작에게 다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저런 자들은 겁먹거나 매달리면 더욱 잔인해지는 성격을 지녔다. 그렇게 흔들릴 수는 없지.
“하아? 주문이나 하라? 너는 내가 일반 사람들과 같아 보이나? 네가 주문 받는 이 마을의 천한 것들과 같을 순 없지 않겠나.”
“주문하는 자의 신분은 주문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내뱉은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냉정하고 건조했다.
“귀한 분이라도 주문 순서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며, 그건 후작 각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뭐라?”
“왜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나는 보란 듯이 눈을 치켜뜨며, 잠시 입술을 비틀었다. 아마 훌륭한 비웃음이었을 것이다.
허를 찔린 듯 저 후작이라는 놈이 반응했으니까.
“이것이!”
확 하고 손을 치켜들었다.
어찌 예상과는 하나도 다르지 않을까. 한 대 맞아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으나, 먼저 맞은 걸로 유리한 상황이 되는 건 내가 귀족일 때나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맞아줄 필요가 없지.
단련된 운동과 체력 단련으로 비리비리한 귀족이 휘두르는 손찌검 따위야 느리게 보였다.
루아를 잡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도 후작은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이, 이 비천한 것이!”
바락 소리를 지르면서도 헛손질을 한 것이 창피했는지 후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당황한 그의 다른 일행들이 영주님을 압박하고 있던 곳에서 벗어나 이쪽으로 와 그를 부축했다.
3대 1이라, 너무 우스운 광경이다. 나는 한심하다는 듯 눈을 천천히 굴리며 그 세 명의 남자를 바라봤다.
“손부터 나가다니 귀족의 예의와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모습이로군요.”
“너, 네가 이렇게 뻣뻣하게 굴고도 무사할 것 같나? 그까짓 작은 꽃집 따위 언제든 무너뜨려 버릴 수 있다! 그런데 감히 내게,”
“그렇게 해보시던가요.”
“뭐, 뭐라고?”
담담한 내 말에 후작의 얼굴은 대놓고 흔들렸다. 나는 루아를 이제 내 뒤에 숨기며 코웃음을 쳤다.
제국 수도에서도 이런 무식할 정도로 무례한 인간은 한두 번씩 튀어나왔다.
차라리 뒤에서 호호 웃으면서 뒷담화를 하며 모욕 주려는 귀부인들이 낫지, 처음에 이런 자들은 어찌 상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더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지그시 바라보며 코웃음 치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만으로도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모습들을 보이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럴 때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상대에 관련된 진실을 찾아 조곤조곤 말로 조졌다.
“꽃집을 없애겠다고 하셨지요. 네, 고귀한 신분의 자가 힘없는 평민에게 그런 짓을 한다고 하면 참으로 볼품없겠습니다.”
“그따위 말로 이 몸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은가?”
뭔 소리야.
저자는 내가 고개를 숙여 자신에게 사죄를 고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1초 만에 기고만장하게 노려보는 눈빛을 보아하니 더더욱 순순하게 나오고 싶지 않아졌다.
“흥, 이제 와서 사과해봤자 소용없다. 네 꽃집은 봐주지 않을 생각이니. 대신, 이 몸이 널 고용…….”
고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꽃집 없애고 싶으시면 없애세요. 꽃집은 다시 열면 그만이니.”
“하? 이, 이 빌어먹을 것이, 네가 꽃집을 열면 그 다음 꽃집도 망가뜨리면 그만이다! 아니, 이 영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감히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그따위로 대꾸해? 네가 대체 무엇이길래 이리도 오만하게 구는 것이지?”
“그렇게 하시고 싶으시면 그리 하시면 됩니다. 제가 평민이더라도 금전이 있는 편이라 얼마든지 몇 번이고 꽃집을 열 수 있거든요. 하지만.”
어디 보자, 내게 주문했던 자들 중에 아라난 왕실과 관련된 인물이…….
“그런 행동에 대한 후폭풍은 후작 각하께서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제 꽃집이 없어져 꽃 주문을 하지 못할 경우에 주문을 한 고객 분들의 분노와 같은 것을요.”
“너, 이 빌어먹을,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제국에 관련된 소식에서는 귀를 닫았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이 왕실에 대한 정보는 열심히 수집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내 꽃을 주문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귀족들이란, 값진 것을 탐내는 성정들이 있었고 그 값진 것이 빼앗기 쉬운 자의 손에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으니까.
나는 입을 한껏 더 비틀고, 눈을 냉랭하게 떴다.
“제 고객 중에서는 아라난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 있으신 후난 백작님도 계시고, 현재 왕의 친척이신 알프레네 공주 전하도 계십니다.”
“뭐?”
“그분들의 시간이 과연 후작 각하의 시간보다 비천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로 인해 어떤 분노를 사게 된다면, 저는 어떤 연유로 늦어지게 되었는지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
창백해지는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
눈앞의 남자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이었다.
신분과 능력으로 상대를 찍어버리는 자에게는 그보다 높은 신분과 능력을 지닌 자가 압박을 주거나, 그런 자를 끌어들이면 된다.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하시겠다면, 네. 기꺼이. 하십시오.”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꼴을 보니, 이 자리에서 누가 승자인지는 판가름이 난 것 같았다.
*
평범하고 고요한 마을.
그렇기에 오가는 사람들이 특별할 경우에는 시선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 아래 그늘에 모여 까르르 떠들고 있던 마을의 어르신들은 훌쩍 커다란 키의 사내가 앞을 지나가자 한 마음으로 입을 꾹 다물고 집중했다.
깊게 눌러쓴 후드 탓에 자세히 보이지도 않았는데도, 어쩐지 남다른 기운이 사내에게 흘렀기 때문이리라.
그 남자는 마을의 전경을 둘러보다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깊게 그늘진 후드 안,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또렷한 보라색 눈동자였다.